겨레의 가락을 길이 이어 갈터 - 국가급 판소리 예술전승인 강신자겨레의 가락을 길이 이어갈터 - 국가급판소리예술전승인강신자
판소리는우리겨레의가장대표적인종합예술표현형식입니다. 판소리는 창자唱者가고수鼓手의북장단에맞추어소리唱, 나라리白, 발림科 등과고수의추임새를곁들어어떤이야기를엮어내는극적인성악곡입니다. 요즘 말로하면 무대위에서 노래와 동작 및 음악표현으로 특정된 내용을 담아내는 가극 또는 뮤지컬이라고 이를수 있지요.
판소리의특점은“춘향전”, “심청전”, “농부전” 등에서찾아볼수있는것과같이벌려놓은판에서두세시간동안창자혼자서그모든이야기를엮어낸다는점에있습니다. 따라서 판소리는 우리 겨레 희노애락과 삶의 내용을 가장 긴 호흡으로 담아내는 종합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급판소리예술전승인강신자교수는자호감이넘치는어조로판소리에대하여이렇게기자에게설명했다.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판소리교수로 교편을 잡다가 정년퇴임한 강신자교수는 1941년 2월 1일 도문에서 태여났다. 비록 시골농부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였지만 어릴때부터 두만강 푸른 물이 굽이돌고 일광산의 삐여난 산발이 둘러선 월청의 산수좋은 기운을 받아 목청이 유난히 고와서 동네방네에 이름난 꼬마 꾀꼴새로 칭찬받았다. 1957년 연변예술학교가 설립되자 그 이듬해인 1958년 성악전공에 시험쳐 단번에 붙었다. 지금부터 50년도 넘는 세월이 지난 일이지만 강신자교수는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면서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그때 열대여섯살밖에 안된 시골녀자아이가 노래에 대하여 안다면 무얼 알았겠습니까. 그저 시키는 대로 민요 ‘아리랑’ 한곡 불렀습니다. 시험관은 그 우리 민요로 유명한 신옥화 선생, 박정렬 선생이였고 김태희 교장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어서 나더러 몇곡 더 부르게한 그들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시더니 이번에는 선생들의 가락을 따라 부르라는 것이였습니다. ‘만고강산 유람할제’ 이렇게 몇단락 따라 부르게 하시더니 이만하면 됐다고 하시면서 ‘넌 이제부터 남도민요를 배워야겠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예술학교에 붙은 그녀는 박정렬 선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남도민요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되였다. 그런데 민요공부란 선생이 장구 하나들 들고 들어오셔서 “쿵~ 딱!” 한 장단치고는 한 마디 부르고 이것을 따라 부르게 하는 방식으로 배우는데 피아노곁에서 우아하게 발성련습을 하는 다른 아이들과 번쩍번쩍하는 악기를 들고 다니는 다른 전공을 공부하는 애들이 몹시 부러웠다. 더군다나 한 침실을 쓰는 아이는 엄마가 일본인이였는데 피아노를 매우 멋있게 치였다. 거기에다 민요를 배워주는 선생님도 우아한 차림의 다른 교수님들과 달리 한복차림이나보니 머리꾸밈이나 복장이 매우 촌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한참 마음이 혼란스러울 즈음 조선 평양예술극장에서 지만수, 방옥란 두 교수님이 오셨는데 그녀는 이 두분 선생님들에게서 남도민요와 판소리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였다. 비로소 우리 예술의 심오한 경지와 만나게 된 그녀는 침식을 잃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따라서 그녀의 노래실력은 일취월장으로 발전하여 시험에서 항상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그런데 당시가 60년대 초반이라 지금처럼 무대상황을 록음록화로 담지 못한것은 물론이고 무대사진 한장 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음속으로 그려볼뿐이지요.”
강신자교수는 중등전문학교인 연변예술학교가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연변대학 예술학원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배양하였다. 우리 조선족인민들에게서 모두 사랑받는것은 물론이고 전국 나아가 국제무대에까지 올라서 빛나고 있는 가수들인 방은하, 함미자, 김현자, 김재분, 김월녀, 김화, 변영화, 최려나, 박연, 김선희 등 새별과 같은 수많은 우수한 가수들이 모두 강신자 교수가 직접 키워낸 가요계의 스타들이다.
2012년 12월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로부터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 판소리예술전승인 증서를 받은 강신자교수의 예술풍격과 교수특점에 대하여 연변대학 예술학원 조인복 교수는 “강신자의 민족성악발성체계에 대한 연구”란 제목의 론문에서 다음과 같이 론술하였다. 특약기자 석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