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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만 품고 사는 시인

-   시 쓰기가 일상이 된 작가 김영능 인터뷰



삶에 대한 태도가 늘 삶의 가치를 결정할 때가 많다. 삶을 스스로 중히 여기고 나의 생명을 필연적 존재라 생각하면 우리는 절대 한번밖에 없는 삶을 헛되게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지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인 삶을 지향하며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선한 마을 가짐으로 타인과 세상 만물을 사랑하면서,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순간순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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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능 시인,   정전담판회의장 기념비를 찾았다.

   

너무 이상적인 상상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인물이 종종 나타난다. 김영능金荣能(1946) 시인, 엄격히 말하면 그는 시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무슨 목표 의식을 갖고 시를 쓰지도 않았으며 더욱히 시를 예술적 창작 보다는 일상의 감수와 사랑을 표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김영능 시인은 2000년에 연변문학에 시“태산에 올라” 외5수를 발표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2002년 첫 시집 “별에 부친 노래”(흑룡강민족출판사)를 출판, 이미 6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생활에 대한 애착과 사업에 대한 열정, 그리고 진취심이 김영능 시인의 인생밑천이였다. 훈춘 영안촌에 태여난 김영능 시인은 어린시절부터 독서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면서 생활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으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부지러운 품성을 키웠다. 영안인민공사 농업중학교를 졸업 시 200여명 졸업생 중 유일하게 우수졸업증서를 수여받는 영광을 지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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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능 시인의 “우수졸업증서”


“나는 무엇보다도 글을 쓰려면 책을 많이 보아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는 책과 책읽는것을 무척이나 좋아 하였다.


책을 손에 쥐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   가는지 몰랐고 책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히로애락을 함게 하는것이 좋았다. 하여 나의집 벽에는 책장이 요란하고 우리집 침상 머리와 창턱에까지도   책들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문화혁명시기에 홍위병红卫兵한테 빼앗겨 태워 버린 책만 하여도 몇 가마니가 되였다 ”

김영능 시인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수십년   쓴 일기가 그의 생활과 사업과 사랑과 문학의 밑거름이 되어 영양소를 발효하였다. 첫 일기는 1962년 5월 7일에 썼다. 자신의 감수나   느낌,또는 인상적인 사연을 열심히 적어갔고 이는 용광로가 되어 한 인간을“제련”하고 있었다. 일상을 고맙게 생각하는 습성이 서서히 키워졌고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 짙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시란 형식을   빌게 되었고 일기의 많은 부분은 시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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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능 시인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1962년 5월 7일자   첫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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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책 표지

   

1963년 8월 21일, 김영능 시인은 일기책에 자신의 첫 시를 적었다. 고향에서 개구쟁이 친구과 함게 시내가에서 알몸으로 배구를 친후에 제목도 없이 쓴 것이다.


두둥실 배구

창공에 명월인가

저마다 구술

고구라 당할소냐

용기와 재주

저저마다 자랑찬데

은하를   그물삼아

우주에서 월구칠

신주에 우공들

뜻 장하고나


중학교를 졸업한 김영능 시인은 농촌에 남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대대 단지부 서기, 민병영장 등 직무를 연임하면서 지식청년 400여 명을 상대로 부정기 신문 “광활한 천지”를 꾸렸다. 그리고 1971년 훈춘금동광 노동자로 있으면서 2000여 명 직원을 상대로 주간지 등사본 신문 “광산의 아침”을 펴냈다. 글에 대한 애착과 솜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1년 음력설을 계기로 3개월 간 상하이를 방문, 회사를 대표하여 광산에 내려온 300 여명 지식청년들의 가족방문을 하였다. 일찍히 시골밖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이는 향후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김영능 시인은 기업인의 길을 걷다가 사직하고 개체영업자의 길을 개척하면서 튼튼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기간에도 시에 대한   사랑과 창작은 지속되었다. 이러는 와중에 당시 연변문학 잡지사에서   시편집으로 일을 하던 시인 김응준 선배를 소개 받게 되면서 구체적인 가르침과 시평을 받아보면서 시창작에서의 담금질 과정을 거쳤다.

김영능 시인은 맑은 마음과 고마운 몸가짐으로 사람을 대하고 시창작을 향수하면서 날로 젊어지는 심태로 시인의 대열에 서서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며 오늘은 누구도 부럽지 않는, 만족하는 여생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여유로운 심정은 그의 해외여행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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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응준 시인이 김영능 시인에게 보낸 편지, 시에 관한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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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능 시인의 시 “빨래줄”


   자그마한 시골같은 훈춘에 묻혀 살면서도 그의 발길은 세계에로 뻗어있다. 지구촌이란 말이 김영능 시인에게 가장 어울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첫 외국행차는 한국이다. 중한수교 이듬해인 1993년 한국   럭기 금성 회사의 요청으로 연변주에서는 10여명 회사 사장으로 구성된 견학단을 조직, 김영능 당시 사장단 일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그번   견학을 통하여 선진국의 기업과 사회 문화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되려 김영능 시인의 “해외관광병” 발단이 되었다. 지금까지 세계 33개 나라를 다녀왔으며 매번 여행에 기행문을 꼭꼭 남기군 하였다. 여행을 통하여 세상 만물을 새롭게 느끼고 시심을 다듬고 인간적   사랑의 마음을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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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관광에서


이렇게 인생의 시적 마음을 차곡히 쌓아가는 시인에게도 아쉬움은 있었다. 젊은 시절 어려운 생활난에 여러차례 이사를 하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연애편지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아쉬움을 시인은 오늘날에도 인생의 미중부족으로 말하고 있다.


김영능 시인의 첫사랑은 결발부인 김인숙 양이다. 김시인의 앞집에서 사는 청매죽마이다. 당시 김영능 시인의 집은 16명 식구의 대가정이였다. 어려운 살림이 불보듯   훤하였다. 앞뒤 집에서 살면서도 김시인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첫 연애편지는 시였다.


때이른 봄바람 불어 보채고

초저녘   둥군달                             

고독타 떼질이니

철당겨 핀꽃 그향기 심술굳은데

꽃본 나비

편깃 주저하니

가시가 두려워선가

엷은잎 다칠가 겁나선가

꺽으려는것이

독초 안이고 향화거늘

가시가 아픈들

주저하랴만

편깃 날아 첫 길이고

꽃볽어 첫 잎이니

풍우속 해연

고인물 잠자리 될가 두렵고

설화속 매화

온실화초 닮을가 겁나고나



1969년12월9일에 쓴 것으로서 지금도 그 일기책에 그대로 남아있다.


연애편지를 써서는 김인숙 양의 남동생에게 주었고 다시 김인숙 양에게 전달 되었다. 연애편지라 하지만 간단히 몇 마디 적는 것이 아니라 몇 페이지, 때론 4-5펴이지 되는“장편”이다. 3년 연애에서 수없이   썼는데 수 천 통이 된다. 오래동안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느때인가 알지도 모르게 분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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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김인숙과의 약혼 사진   


“그 연애편지만 있어도 숱한 시 감이 되는데...”

오늘도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 김영능 시인님.


김영능 시인님은 아직도 미발표 시를 수백편 갖고 있다. 그리고 몇 권으로 출판할 수 있는 분량의 기행문도 있다. 지금도 시상이 떠오르면   핸드폰에 적어두고, 다시 정리하고, 그리고 낚시하고 독서하고 술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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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강에서 낚시의 한때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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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날   일기책을 뒤져 보면서 ...


하지만 아쉬움이 하다 더 생겼다. 함께 술 마시며 정을 나누고 인생을 즐길 친구가 하나씩 줄어서 지금은 조금씩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코로나가 아니였다면 지금쯤은 십여 개 나라는 더 누려보았을걸.”

(주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