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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던 “도문이 말하다”까지

- 원 도문시박물관 부관장 신창권 씨 인터뷰

도문이라고 우리에게는 북한의 남양과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는 변경도시가 다가온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홍범도 장군이 주역이   되어 이끈 봉오동전투로 인상적일 것이다. 봉오동전투는 또다시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한국독립무장투쟁사의 최고봉을 이루는 승전으로서 우리 역사에 길이 남아있다.


01.jpg   신창권辛昌权(1959) 씨

이러한 유서깊은 고장의 광복전 역사를 기록하고, 출판까지 이어온 이가   있다. 신창권辛昌权(1959) 씨이다.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며 민족사 애호가도 아니다. 평범한 정부 공무원으로서 행정업무에 충실한 일군이다. 다만   민족사 사료가 사라지는데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이로부터 느껴지는 자신의 책임감, 나아가 주변 타인들의 격려가 그를 한명의 사학 저자로 승화스킨 것이다.


02-1.jpg   마반산산정 고찰에 나선 신창권 씨(오른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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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권 씨의 저서 도문은 말한다 표지

도문은 오래전에 현급 시 되어 있지만 조선인이주 초기에는 보잘   것 없는 시골이였다. 이곳 최초 지명은 회막동灰幕洞 또는 회막골灰幕沟이다. 글자 그대로 온 마을이 안개 낀것처럼 부인다는 뜻이다. 두만강대안에서 건너 온 이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바람에 하늘이 맑게 개일 새 없이 늘 연기가 자욱하게 흩어져 내려 있었던 것이다.   19319.18사변전까지 이 고장은 고작 100가구가 모여 살았고 대부분이 화전농이며 몇 호 안되는 어부가 움막을 치고 고기를 잡아 식량과바꾸거나 생필필품과 바꾸면서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9.1 8사변후 일제는 중국에서 대량의 약탈을 시작하였고, 또 이러한 수요에 따라 19335월 도문에서 돈화로 통하는 철도가 부설되면서 기차가   정식으로 통하게 되었다. 이로서 회막동 번화한 시가지로 서서히 변모하게 되었다. 위만주국정부도 회막동이라는 지명이 촌스럽고, 발전하는 도문 시가지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19335월 민간대표 9명으로   지명개칭팀을 내오고 같은 해 6월에 지명을 도문으로 개칭하기로 결정하였다. 여러개의 물줄기가 이곳에서 합수하여 이루어진 부르하통하가   이 지역에서 두만강과 합류하여 흐르는 지역 특징을 반영한 지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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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문 역전


03-1.jpg     도문세관


03-2.jpg    일본 도문영사분관

기차가 통하고 물동량이 늘면서 도문에는 일본영사분관이 설치되고 또   거리는 점차 번화한 상을 띠면서 장마당도 생겨나고 북한 남양과의 호시互市 주기적으로 열게 되었고 따라서 일본인 술집 등도 들어앉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도문기차역은 조선이주민들이 북간도로 들어오는 주요한   통로가 되면서 조선이주민의 집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변강도시 도문의 종합적 가치가 급격히 늘어나는 황금시기였다.


도문은 당시 북간도에서도 용정 버금으로 가는 주요한 시가지로 자리잡았으며 광복전까지 이러한 위치는 흔들림이 없었다. 광복이 되어 70여년이 흘린 오늘날에서도 광복전 도문 조선인이민사, 나아가 투쟁사에 대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사료는 극히 적으며 책자로 출판되는 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신창권 씨는 연길 태생이다. 연변대 조선언어문학학부를 1983년에 졸업하고 도문시철도제2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다가 도문시문화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고 도문시박물관 부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5년에 연변 8개 현() 정부에서는 항일 사망자 통계를 진행하였는데 도문시도 예외가 아니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사료들이 수집, 발굴, 정리 되었으며 작업은 한단계 마무리되었다.


04.jpg     국가문물보호장비산업화응용 박람회에 참가한 신창권 씨.

이대로 끝나면 사료는 사료대로 방치되어 있을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이 잊혀질 것이고, 그렇게 사료가 백지장 되어도 어느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 사료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었고   누군가 나서서 사료에 대한 지속적인 마무리 작업을 하기 바랬다. 말이 쉽지 사료를 정리한다는 것은 엄청난 정력과 시간과 고달픔이 동반하는 작업이였다.


신창권 씨는 중국에서 대학입시를 시작하여 세번째 되는 해에 합격되었다. 당시는 대학진학율은 50:1도 넘어 대학생이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만큼 당시의 대학생은 함금량이 높았다는 얘기이다. 주변 많은 사람들은   사료정리라는 작업을 신창권 씨가 맡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다분했다.   그의 실력을 믿고 있었고 신창권 씨라면 해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신창권 씨의 고민은 날로 깊어만 갔다. 밀어버릴 수 없는 책임감이 꿈틀거렸고, 자신에 대한 부정 역시 달갑지 않았다. 그렇되어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그것이 8년이란 자료수집과 2년이란 집필시간으로 고스란이 이어졌다.


04-1.jpg     해협국제전시센터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신창권 씨.

사료수집은 단순히 항일 사망자에 그치지 않았다. 공업, 농업, 교육, 무역,   금융 등 방면으로 확산되었고 조사 지역도 도문시를 벗어나서 동북3성으로 확장 되었다. 일제시기 서류 원본사료를 하나하나 살펴야 했다. 많은 사료는 일어로 작성되었다. 서류보관국, 공안국, 철도국 등 하나도 빠짐 없이 흝었다. 용정의 교전기록 일어 원문 서류, 도문의 일본   귀순서 원본자료, 그리고 무역, 금융 관련 원본 통계자료 등은 거대한 자료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어지는 과로에 시력이 떨어져 갔고 또 지병인 위병이 도졌다. 하는 수 없어 1-2개월 쉬었다가 다시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신창권 씨의 노력에 의해 많은 사진들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자료들은 다른 지역과 차별이 없는 사료들이였다. 하지만 도문은 위만시기 특수한 상황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집단부락이다. 현장을 찾아서 실마리를 찾고 옛날 노인들을 찾아 면담하고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끝에 합수평(현 곡수)집단부락, 석두하자 집단부락, 북대동 집단부락, 천수평 집단부락, 영창동 집단부락, 정암촌 집단부락, 부암촌 집단부락, 양수 집단부락이 새롭게 정리되는 행운을 가졌다.


05.jpg     도문철도국 일본인 역장 자택

그리고 도문에서 일본군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댔다. 신창권 씨의 끈질긴 노력 끝에 일제시대 도문시 위안부의 상세한 상황을 우리는 오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도문에서 일제의 양귀비 재배 및 마약 제조와 유통 관련 사료 역시 그의 저서 도문은 말한다 반듯하게 적혀 있을 수 있었다.


신창권 씨는 사료 조사와 수집을 통하여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였고 또 조선인이주와 인물에 관하여 현재의 정론과 다른, 또는 차이가 나는 자신만의 결론도 갖게 되었다.


역사의 진실은 한꺼번에 밝혀질 수 없지만 우리가 꾸준하게 연구하고 편견 없이 분석한다면 어느날에는 역사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신창권 씨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06.jpg   사료 분석에 열중하고 있는 신창권 씨

평소에 잠자고 있던 우리들의 양심 또는책임감 어떤 환경에 처했거나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스스로 깨어날수 있음을 우리는 신창권 씨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깨여남은 나중에는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과 잠재력의 폭발로 이어져 작은 기적 하나하나를 낳았던 것이다.


신창권 씨의 도문은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심성心性 만들어낸 신창권 씨의하나의 작은 얼굴 되었다.   (주성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