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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36]   두만강 기슭 첫 학교는 정동이요 / 바른 정자 밝아오는 동녘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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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0월에 세워진 정동正东서숙은 간도지역에서 가장 일찍 세워진 학교 중 하나이며 두만강기슭에 세워진 첫 학교이다.

룡정 지역의 마지막 답사코스로 오늘은 룡정 개산툰진 자동촌 후저동에 위치한 정동서숙옛터 기념비를 정했다. 자동은 윤동주 할아버지가 간도에 들어서서 정착한 첫 이주지이다. 그 후 윤씨 일가는  문치정, 김약연 등 4대 가문이 명동으로 이주한 1년 후인 1900년에 명동으로 재 이주했었다.

시외버스 편으로 움직이어 9시 30분 경 개산툰진에 달했다. 지난 주 노루바위골 보충답사를 동행했던 3명 외 김충, 주향숙 두 시인이 합류했다. 개산툰팔프공장을 에돌아 서남쪽으로 걸어 조양촌을 통과하는 기찻길을 따라 하루의 도보를 시작했다. 개산툰팔프공장은 계획경제 때 연변의 중요한 기업으로서 인기가 퍽 높았으나 현재는 가동은 되고 있으나 어제 날의 호황은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향 양지쪽 비탈에는 닿는 해빛은 따스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버스 안에서 얼었던 몸을 조금씩 풀면서 시름없이 길을 즐겼다. 정동서숙 옛터기념비를 먼저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기타 유적지를 보는 순서이다.

이곳 개산툰은 룡정에서 동쪽 약 29km 상거, 두만강을 사이 두고 북한 온성군 삼봉리와 마주한다. 지리적 관계로 조선이주민이 가장 먼저 정착한 지역이며 1897년 화룡욕 무간국抚垦局이 화룡욕(현 룡정시 지신향 정부 소재지)에서 광소촌에 옮겨오면서 개산툰진은 이 일대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되었다.

철길을 따라 3km 가면 자동촌이다. 이곳은 아들이 많이 태어난다하여 불러진 지명이다. 계속하여 올라가면 철교가 보인다. 일제 건물로서 이 철교를 통하여 개산툰에서 조선 삼봉리로 통하는 철길이 이어진다. 2009년 여름에 왔을 때는 그나마 강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마른 수석들뿐이다. 여기서 다시 흙길에 올라 마을이 끝나는 곳까지 걸었다. 북쪽 비탈에는 사과배 나무가 줄지어 있고 비록 산골이지만 계절은 시가지를 앞질러 나무는 몽롱한 연두색을 띠고 있었다. 길 양 옆에 얼룩소가 유난히 눈에 띠웠다.

일행이 닿은 곳은 최종 목적지인 후저동厚底洞이다. 자동의 마지막 마을이며 지금은 자동촌 제6촌민소조로 불리우며 2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조선족 마을이다. 정동서숙 옛터기념비가 세워진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지난 20세기 초부터 30년대까지 반일투쟁의 중심지 하나였다. 우리가 오던 서남쪽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덕신향 금곡에 이르며 금곡의 매바위골은 1930년대 손원금 등이 꾸린 병기공장이 있었고 연길작탄 등 무기를 제조하던 곳이다.  

마을에 들어서서 밭을 거두고 있는 할머니를 찾아 여쭈어 보았고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맞은 편 집을 소개받아 일행의 뜻을 알리고 자문하니 바로 앞밭 둔덕에 세워진 작은 비석 하나가 보였다. 옛터기념비 앞 밭이 정동서숙의 옛터이고 역시 이 밭에 교회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동서숙은 반일지사 강백규姜伯奎, 강희헌姜曦轩, 유한풍俞汉丰 등이 농가 한 채를 사서 20여 명 학생을 모집하여 세운 서숙이다. 1908년 10월 28일,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정동서숙 창립식을 가졌다. 숙장은 강백규, 숙감 강희헌, 학감 유한풍, 교원 최봉철이다. 강백규는 간민교육회시기부터 반일에 앞장섰으며 독립운동의사부의 주요간부, 3.13후에는 간도국민회 주요간부, 간도청년회 부회장이었다.

1912년 여름, 통학중심에 새 교사 건축을 결의하고 모금에 들어갔다. 김윤승金允升이 1만원 희사하고 김성래金成来와 최병국崔秉国이 각 2000원 희사, 원 서숙 집을 5000원에 팔았다. 그 외 학부형과 조선이주민의 모금에 힘입어 1913년 10월 28일 정동서숙 창립 5주년을 맞아 자동 종성동에 교실 6칸, 교무실 3칸이 되는 새 청사를 세웠다. 정동학교라 개명하고 5년제 신학을 실시했다. 교직원은 5명, 학생은 80여 명이었다. 이 시기 학교운영위원회가 설립되었고 회원은 달마다 50전 회비를 납부했다.

답사팀 일행은 자동촌 6촌민소조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왔다. 철교가 다시금 보이었다. 300-400미터 거리이다. 길 오른편에 "국가빈곤부축항목"시멘트 표시간판이 있고 바로 왼편 길 너머 마을이 자동촌 4촌민소조이다. 이전에는 종성촌이라 불렀다. 이곳에 북한 종성에서 건너온 사람이 많아서였다.

마을에 들어서서 다행스럽게도 당지주민 현 씨(46)를 만났다. 이곳에서 태어났고 80세를 넘긴 노모 역시 이 고장 토배기였다. 현 씨에 따르면 1982년 이곳 지명을 행화촌이라 바꿨다. 마을에 살구나무가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백년이 넘는 살구나무 한그루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무 옆에 나뭇가지로 위를 덮어놓은 우물이 있다.  살구나무는 반일지사들의 아지트였으며 현재 살구나무 뒤 초가집은 백년에 이른다는 것이다. 바로 그 초가집 뒤에 두 개의 큰 가마를 걸어놓았는데 그중 하나는 가짜로서 가마를 열면 아래에 사람이 숨을 수 있는 작은 굴이 있다. 이 굴은 반일지사들의 피신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나무와 우물은 군용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부업이라고 하면서 살구나무를 다 잘라버려 지금은 살구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현 씨의 안내를 받으며 정동학교 옛터 자리에 이르렀다. 기초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었다. 너비 8-9미터, 길이 약 20미터 되어 보였다. 현 씨는 당지에서 구운 벽돌로 지었으며 지붕이랑 홍송나무를 썼다 한다. 수년 전만해도 펌프대가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붉은 참질 토질이어서 사과배도 룡정 것보다 맛있다고 한다.

현재 4촌민소조에는 25명이 있는데 조선족은 10명이다. 현 씨와 함께 큰 길에 나와 걸으면서 의문이 하나 생기었다. 마을 아래 남쪽에 강이 흐르고 있는데 어떻게 마을 위에 논밭을 풀었을까?

해방 후 마을에 일본 동경대 유학생 한 분이 왔는데 대단한 사람이라 했다. 논밭을 풀 수 없겠는가?  했더니 엄지손가락을 추켜들고 측량하더니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마을 사람들은 도랑을 파고 둑을 쌓고 물을 올려 진짜로 벼농사에 성공했다. 감격한 마을 사람들은 자동에 그 사람의 기념비까지 세웠지만 문혁시기 누군가에 의해 부셔지고 지금은 찾을 수 없었다.  

행화촌에 중학교를 세우고 이듬해인 1914년 여학생 25명을 모집하고 박에스켈朴SKL을 교원으로 초빙했다. 1918에는 중학부를 설치하고 교사를 증축했으며 실험의기와 생물, 광물 표본을 갖춘 실험실을 꾸리고 도서도 사들이었다.

1919년 3.13 반위시위에 정동학교 사생은 70여리를 달려 집회에 참가하였으며 정동충렬대를 조직했다.

정동학교는 일제 "경신년토벌"에서 빗겨갈 수 없었다. 1920년 10월 19일 야밤, 일본토벌대는 정동학교 중, 소학부 교사를 소각했다. 3.13만세시위 3주년을 맞아 후저동에 다시 학교를 꾸렸고 1923년 4월, 행화촌 중학교 옛터에 교실 6칸, 교무실 1칸 되는 새 청사를 재건했다. 1930년 4월 5일, 정동학교는 2년제 보습과를 증설하고 중등인재양성에 착수했다. 학생은 120여 명, 교내에는 "토요일강연회", "사회문맹퇴치", "시장방곡市场防谷", "통신연락" 등 조직이 비밀리에 활동했고 반일사조는 날로 고조되었다.

1932년 6월 15일, 일제는 다시금 학교를 소각하고 무고한 백성 20여 명을 참살했다.

광복을 맞은 해, 정동학교 창립 37돐을 맞아 정동학교는 정동중학교로 복교되었다. 개산툰 거리에 자리한 재만 일본인학교 교사를 대용했다. 학생은 421명, 그중 남학생이 253명이었다.

1950년 1월 정부의 배려로 광소소학교 옛터에 세워졌던 양정소학교 교사를 내주어 정동중학교는 광소촌光绍村으로 옮겨갔다. 그 후 민립 광개光开중학교로 개명했다가 1985년 정동중학교로 교명을 회복했다.

정동서숙 창립부터 광개중학교로 개명하기까지 정동중학교는 15회에 걸쳐 486명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답사일행은 개산툰진에 돌아와서 택시 편으로 광서촌에 위치한 정동중학교 옛터를 들러보고 귀가 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