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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35]    2월 2 용대두 햇살은 곱고  /  경첩 맞아 기지개소리 들에 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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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양력 3월 6일, 음력으로는 2월 2일, 중국민간에서 말하는 “룡대두龙抬头”날이다. 북방에서는 춘룡절春龙节, 남방에서는 답청절踏青节이라 부르기도 했고 당나라 때부터 "2월 2"를 쇠는 습관이 있었다. 아마 푸름의 계절이 남방에 빨라 찾아들어 들놀이 시작하기 좋은 시기라 그곳에서는 답청절이라 했을 것이다.

오늘의 답사는 금요일에 급급히 결정지었다. 새로운 지역을 답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답사 성질이다. 날씨도 따스해졌고 바깥출입에 무리가 없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지난 해 장암동 참사지에 대한 답사가 그냥 마음에 걸린 것이다. 1994년에 세워진 장암동참사기념비를 찾아보지 못했고 참사 마을 옛터를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을에는 학교가 있었고 교회당이 있었다. 일본군이 감행한 무자비한 학살은 그 교회당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고로 답사만 생각하면 온 겨울 개운치 못한 기분이었고 드디어 지난 토요일 용정에 계시는 최근갑 옹을 찾아뵙기로 약속 잡았다. 1994년 참사기념비를 세울 때 최근갑 옹이 서울에서 온 당시 장암동 참사 희생자의 자손을 동행하여 동명촌 마을 박씨 노인의 안내 하에 그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아침 9시 경에 용정에 있는 최근갑 옹의 자택에 들어섰다. 답사팀 창립되던 그날부터 우리의 행사에 동참했고 고문으로서 많은 력사현장을 확인해주고 숨겨진 력사사실을 이야기해준 고마운 대선배이시다.

최근갑 옹은 용정 은진중학교 23기생이다. 그의 아버지 최승영(1900)은 함북 종성 출생, 1920년대 화룡현 서성구 이도구에 이주, 지금의 화룡현 토산자 뒤 골안이다. 3.1 운동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대 말에는 러시아 연해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었다. 1931년 3월 일제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었으며 1933년 정월에 서성으로 돌아왔고 1942년에는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최근갑 옹은 고학으로 은진중학교를 다녔고 토목전공이었다. 해방 후에는 용정시 정부 건축부서에서 일을 맡아 보았고 개혁개방이후에는 은진동문의 대표로, 용정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부회장, 회장직을 맡았다. 또 용정 3.13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용정의 조선족력사 복구사업에 투신하면서 "비석 아바이"란 호칭을 얻게 되었다. 용정의 산증인인 것이다.

최근갑 옹은 1994년 세원 장암동 참사기념비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념비는 그해 8월에 세워졌고, 당시 참사 희생자인 김경삼金京三의 아들 김기수金基柱가 서울에서 찾아왔고, 최근갑 옹의 현장 확인과 도움으로 참사희생자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은 3.13기념회에서 1999년 6월에 마을 동쪽 높다란 언덕에 새로 세운 장암동참사유적 기념 석 만을 보고 돌아갔고 학교터와 교회당 터 그리고 처음 세운 희생자 비석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지난해 답사에서 우리는 참사유적지 기념 석 위 편에 있는 산길을 따라 숲속을 헤매었다. 기실 유적지 기념석 아래 산기슭 오솔길을 따라 가야만 했던 것이다. 최근갑 옹은 상세한 지도를 그려주었고 나는 확신을 하면서 일요일 답사를 시작했다.

보충 답사는 김인선 형의 차량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김인선 씨는 시인이자 언론인으로서, 또 나의 대학 선배로서 처음으로 답사팀에 합류했다. 그 외 촬영을 전담한 김창희 시인과 현재 겸직으로 연변대에 출근하는 박초향 양이 동행했다.

일행은 무난하게 노루바위골 마을에 들어섰다. 1920년대 참사로 원 마을은 사라졌고 지금은 이 마을을 동명3대로 부른다.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본 따서 이곳 농촌에도 아스파트 길은 닦아졌다. 마을을 관통하는 외골길을 따라 참안지 비석으로 가는 오른쪽으로 갈라진 산길에 차를 멈춰세웠다. 산길이라 행차가 불가능하기에 앞길은 도보로 행해야 했다. 우리가 정차한 바로 옆에는 1960년대 말 집체호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집체호란 중국 농촌의 특이한 력사산물이다. 문화혁명을 마무리 한 시각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창의 하에 도시의 지식청년, 즉 고등학교 졸업생과 부분적 중학교 졸업생을 농촌에 내려 보내어 농민들의 재교육을 받게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지식청년들은 농촌에서 십여 명 지어 수십 명 남녀들이 별방을 쓰며 함께 생활하는 집체호集体户라는 형식이 나타났고 농촌 당지에서는 이들을 위해 집체호의 살림건물을 지어주었다. 중국은 이 세대를 일러 잃어버린 10년이라 한다. 지금 보면 당시 지식청년 정책은 대량의 도시 실업인구를 해결하는 최적의 방안일 수도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봄기운이 완연하다. 오늘 또한 경첩이라. 땅 밑 벌레가 놀라 소스라쳐 깨어나기 시작하는 날, 겨울 지나 첫 맞는 봄의 들판은 환희적이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노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암동참사유적지 기념 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갈림길에 닿았다. 참사유적지 기념석을 잠깐 들러보고 다시금 되돌아 내려와 최근갑 옹이 알려준 산기슭 길을 따라 걸었다. 800미터에서 1000미터 상거한 곳이라고 했다.

오직 길을 따라 걷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짐작컨대 그만한 거리를 걸었으나 비석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 걸어서 얼마 되니 길 오른편은 가시철조망으로 둘려있었다. 누군가 이 지역을 도맡은 것이 분명했다. 또 한참 걸으니 길 왼편도 가시철조망으로 둘려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혹시나 허탕을 친다는 불길함을 던져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걷고 걸으니 오솔길은 끝났고 우린 더는 나갈 길이 없었다. 아래는 작은 도랑이 흘렀고 건너편은 느슨한 언덕이었다. 우리가 실패한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실오리 같은 희망 속에서 우린 김인선 시인님의 제의대로 언덕에 올라 우리들의 목표를 더듬기 시작했다. 헛고생이었다.

다시 오던 길에 들어섰다. 얼마 움직이지 않아 길 왼편에 꽤나 큰 돌들이 묻혀있었고 김인선 시인과 김창희 시인 둘은 돌을 살피고 있었다. 폐허된 마을의 기초 돌을 방불케 했다.  

순간, 두 시인은 이구동성으로 외쳐대며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저기 비석이 보인다!"

오른편 철조망 속 10여 미터 상거한 둔덕에 부연 비석이 눈에 띄운다.

"1920년..." 시력이 뛰어난 김인선 시인이 비석 앞면에 새겨진 글씨를 읽고 있다.

틀림없이 우리가 찾는 그 참사희생자 비석이다. 어쩌면 하늘이 순간적으로 도운 것일까?

다행스럽게 우리가 초봄에 왔으니 찾아볼 수 있었지, 여름이면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가 우거져 철조망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돌비석은 일반 조선족 비석보다 컸다. 앞면은 "一九二0年十月三十日日军의/ 间獐岩惨杀事件牺牲者、三十三人追念碑“라 새겨있고 왼쪽 옆면에는 "牺牲者遗族代表、故金京三의子金基株建”, 오른쪽 옆면에는 "一九九四年七月“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 뒤편은 참나무 숲이요, 느름 나무 5-6그루가 섞여있고 앞 편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푸르다. 비석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평탄한 공지가 펼쳐지고 서쪽은 학교옛터, 대개 남쪽이 교회당 위치이다. 마을 옛터 바로 동쪽 편, 추념비석 앞 공지에 몇 개의 옛 무덤 봉오리가 있다. 참사가 지난 뒤 장암동 마을은 사라졌고 퍽 뒤 인가가 드문 이곳에 자연히 묘지가 들어선 것이라고 최근갑 옹은 알려주었다.  

일행은 귀로에 올랐다. 우리 스스로도 다행스러운 발견이라 확신했다. 집체호 건물 앞, 주차한 곳까지 도보로 25분 거리였다.

오늘은 2월 2, 용대두요, 이날은 음식도 특별하게 먹는다. 돼지머리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식용두食龙头"라 하고 중국 물만두(죠즈 饺子)를 먹는 습관이 있는데 이날만은  "용이龙耳" 즉 용의 귀라고 한다. 여성은 이날에 바느질하지 않고 어떤 지방 여성은 세탁도 하지 않는다. 바늘 빛이 용의 눈을 다칠까 , 세탁이 용의 겁질(皮)상할까 천만근심이다.

무사히 연길로 돌아왔다. 점심은 중국식대로 돼지머리고기를 안주하고 죠즈를 먹었다. 더불어 다가오는 3.8부녀절도 축하했다.

이날은, 중국에는 이발하는 남자가 특별히 많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