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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34]   너를 두고 가는것은 아득하지만 / 결국에 네 원쑤는 내가 갚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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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북방의 겨울치고는 햇살이 그나마 따스했다. 하지만 계절은 속일 수 없고 냉한은 여전했고 아침이 지나면서 점차 심해졌다. 올해의 남은 답사 스케줄을 가늠해 보면 아마 오늘 답사가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일행 8명은 연길 기차역 장거리 버스역에서 도문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봉오동 전적지기념비가 목표였다. 나랑 창희 기자랑 수년 전에 차편으로 다녀왔지만 지금은 기억이 아물거렸다. 승차 전 버스역 승무원과 문의하고 나서야 겨우 감이 잡혔고 석현으로 가는 갈림길 어구 주유소에서 일행은 하차했다.

찬바람이 온몸에 스며드는 불쾌한 감각이 전율처럼 퍼졌다. 석현 방향으로 떼를 지어 뚜벅뚜벅 걸어가노라니 개발구를 지나 앞쪽에 돌다리가 보이었고 우리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동쪽으로 뻗은 길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미심하여 구호준 소설가는 앞에 보이는 농가를 찾아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돌아왔다.

오른편은 눈 덮인 밭이었다. 바람은 잠자던 눈보라를 일으켰고 눈보라는 바다 위 안개같이 흩어져 밀려갔다. 뒤 따르던 눈보라는 어느새 허공에서 연기처럼 흩어지기도 했다. 추위보다 어느 정도는 신기한 뜻밖의 느낌이 서먹했다.

우리의 생각보다 기념비는 멀리 있었다. 난 아무런 파악도 없이 다만 지체 없이 가노라면 허탕은 안치겠지 하는 일념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1시간은 넘어 되는 것 같았다. 가던 길이 막혔다. 길림성 00회사 간판이 걸려있었고 주변은 담장으로 둘렀다. 개들이 낯선 우리를 보고 지어댔다. 정문 옆 접수실  남자가 전화로 상사에 청시하고 나서야 우리의 출입을 허락했다.

걸어서 조금 가노라니 앞에 “봉오동 5구구간대주둔지”라는 기념석이 길 옆 작은 언덕위에 보였다. 우리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봉오동이 항일유적지라는 또 하나의 방증인 셈이다.

얼마 안 가서 왼편 먼 곳에 기념비 모양이 희미하게 보였다. 기념비는 계단위에 세워졌고 양편에는 푸른 소나무가 름름했다. 기념비 정면은 “봉오동 반일전적지”라는 제목의 한글 비문이고 뒷면에는 중국어 비문이었다.

비문은 작고한 조선족 언론인 이수길 씨가 작성한 것이다. 당시 이수길 씨는 도문시문화관 관장으로 근무했고 훗날에는 연변일보 기자로 일생을 마감했다. 기념비는 도문시위 통전부, 도문시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가 연명으로 세웠다. 일자는 1993년 6월 7일이다.

봉오동은 어구로부터 25리 정도 되는 좁은 골짜기로서 삿갓을 엎어놓은 것 같이 움푹 들어간 분지였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기록은 여러 책에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봉오동 전투라고 하지만 그곳의 땅 이름은 원래 봉우동 鳳羽洞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자연의 이로움을 철저히 활용했지요. 봉황새 양 날개에 해당하는 곳에 일본군이 양쪽으로 나눠있고, 골짜기의 몸체에 해당하는 곳에 독립군이 있었다. 독립군이 양쪽에다 총을 쏘며 일본군을 유인해 놓고서 조용히 빠져나가니까 저희들끼리 싸우면서 일본군이 수두룩히 죽은 것이죠”

『신흥무관학교』안천, 교육과학사. 2007.10. 298페이지


1920년 6월 22일자 “길장일보”는 「일, 한 군대의 대격전」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적었다.


산길을 잘 알고 있는 독립군이 사면에 잠복하고 있다가 습격하니 일군은 대패하였는바 당장 150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강을 건너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독립군은 보총 60여 자루, 기관총 3정, 권총 여러 자루를 노획하였다.

『홍범도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156-157쪽


이 보도는 6월 27일자 “상해신문보”에 전재되었다.

연길도윤공서는 봉오동전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7일 새벽 3시경에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병 130여명은 도강한 후 왕청현 고려령 초모정자 지방에 진격하여 무릇 한인 부락이면 집집마다 수색하고 총을 쏘았다. 그리하여 독립군 1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일본군은 병사 19명, 장교 3명이 죽었다.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김철수, 연변인민출판사, 373쪽


또 일본군은 아래와 같은 보고기록을 남겼다.  


적은 교묘하게 지형을 이용하여 그 위치가 명확치 않고 탄환은 사방에서 날아와 전황이 매우 불리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때마침 천둥이 치고 엄지 손가락만한 우박이 폭풍과 함께 떨어져 피부가 찢어지고 옷이 다 젖어 추위가 살을 깎는 듯 했다.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코람데오, 2009. 109쪽


봉오동전투는 삼둔자와 근처의 후안산後安山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로 발단되었다.

두만강을 건넌 일본군은 침공해왔고 양민 학살을 자행하고 귀환하는 것을 6월 5일 밤 10시경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이 궤멸시켰다. 이것이 삼자툰 전투인데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영토로 침범한 최초의 일이다.

이렇게 되어 일본군은 독립군 본부인 봉오동을 전멸시켜려고 대세 공격한다. 6월 6일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 사이에 두만강을 건넜고 7일 새벽 3시 반 경에 봉오동을 공격하기로 했다.

후안산 전투는 6월 6일 밤 12시 경부터 7일 새벽 2시 반까지 추격대대의 일부 일본군과 약 25명 독립군 모 연대가 뜻하지 않게 충동하여 벌린 총격전이다. 양측은 소수의 사상자를 보았다.

한편, 홍범도는 최진동과 상의하고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맞기로 결심했다.새벽 3시 30분부터 여명의 5시까지 일본군에 대한 유인은 끝났다. 적막한 봉오골을 일본군은 오후 1시까지 분탕질했다. 오후 1시 독립군은 무차별사격을 퍼부었고 월강추격대대는 약 3시간 동안 버티고는 비파동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오후 4시 20분 경, 천동번개가 치고 우박이 퍼붓고 폭풍이 일었고 일본군은 이 틈에 패주하였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에 대한 요약이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의 유격전술과 최진동의 물자지원, 안무 국민군의 헌신적인 협조가 뭉쳐 이루어낸 항일독립전쟁사상 빛나는 승첩이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은 당연 홍범도(1868.8.27(음력)-1943.10.25) 장군이다. 홍범도는 1920년대 초 의병전쟁과 1920년대 초반의 간도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이다.일본군에 의해 ‘비장군’이라 불러질 정도로 홍범도는 유격전술의 대가이며 일본군을 연파시키며 그 명성을 당시 함경도, 북간도, 연해주에 길이 떨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독립군하면 가장 많이 듣던 이름이 홍범도이요,그는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우리의 머리에 인상 깊었다.

안중근은 후일 일제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홍범도를 만난 사실이 있다고 고백했으며 홍범도를 ‘함경도 의병의 거물’이라고 술회하였다.

봉오동 대첩에 이어 홍범도 부대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 냈다. 그후 홍범도는 1920년 12월 하순에 북만주 밀산에 도착했고 대오를 정비한 뒤 호림, 요하를 거쳐 1921년 1월에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 이만으로 들어갔다. 이로서 홍범도의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은 마무리단계에 이르렀다.

홍범도는 75세를 일기로 크즐오르다 쓰쩨쁘나야 거리 제2번지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3월 1일 한국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84년 11월 초에는 크즐오르다의 묘지에 반신동상이 세워졌으며 1989년 5월 26일에는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명명되었다.

답사를 마치고 일행은 귀로에 올랐다.산간의 겨울바람은 더욱 세찼고 우린 바람

을 거슬러 걸어야 했다.다행히 택시 한 대를 만나 4명을 태워 보내고 나머지 인원은 도보를 계속해야 했다.도문불고기점에서 여류시인 김경희 양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기분 좋은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