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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33]  크나큰 집도 보고 넓은 거리도 보았건만 / 내게는 못할세라 맨 땅인 룡정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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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팀 김정섭 선생이 학교 문지기와 교섭한 끝에 우린 실험소학교 마당에 들어서게 되었다.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외부인사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운동장 동쪽 끝에 기념비석 몇 개가 눈에 뜨인다. 워낙 크지 않아 살펴보지 않으면 쉽게 스쳐버릴 수도 있었다. 중간의 큰 돌멩이가 서전서숙 옛터 기념석이고 그 오른편 낮은 비석은 동북해방기념비이다. 앞면 중앙 직사각형 모양으로 패여 있는 부분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모양새를 보면 우리가 흔히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최근에 세워진 것 같지 않았다. 광명중학교 기념비와 모양새가 같은 것을 보아 1940년대로 추정된다.

사료에 따르면 이곳에 원래는 홍중초등학교 제5대 교장 일본인 森新助의 기념비가 세워졌었다. 서전서숙이 폐교되자 일본인은 학교를 인수하여 간도보통학교로 개명하고 운영하였으며 나중에는 간도보통학교, 간도중앙학교, 룡정 홍중초등학교로 개명, 광복 후에는 3.1학교로 되었다. 광복을 맞아 1946년 3월 1일 원 홍중초등학교 제6대 부교장 강현삼姜显三의 창의 하에 룡정 3.1학교(현 룡정실험소학교) 장형운(张炯云)교장, 배원진(裴垣镇) 교도주임, 주영찬朱永赞 총무주임 등의 협상을 거쳐 일본인 기념비를 밀어버리고 “동북해방기념비”을 세웠다. 비문은 황경희黄京熙가 쓰고 석장 지화용池和龙이 새겼다. 5개 월 뒤인 8월 초에 완공했다.

1946년 8월 15일, 1천여 명 사생과 각계 인사들은 교장 장형운张炯云주최로 성대한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비배에는 중한 문자로 아래와 같은 원문이 새겨졌다.

一九四五年八月十五日弱小民族의救星-苏联红军의威力으로东北과祖国은解放을얻었다。一周年纪念날 세움)

서전서숙 옛터기념비 왼편에 또 하나 돌비석이 있다. 오늘 답사의 주인공 심련수 시비이다. 심련수 56주기를 맞아 2001년 8월 8일 세워졌다. 시인이 작고하기 전 수년 전에 고른 48편 자선시편을 묶어 제목을 달았던 표제시 「지평선」이 새겨져 있다.

우연이라 할까?! 룡정이 낳은 시인 윤동주와 한국 강릉 출생인 심련수는 많은 점에서 인연이 있는 듯하다.

심련수는 윤동주 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났고 또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광명중학교를 거쳐 나중에 일본유학에 올랐고 심련수는 흑룡강성 신안진소학교를 거쳐 룡정 동흥소학교 5학년에 편입, 동흥중학교 졸업 뒤 일본유학을 했다. 명동소학교는 김약연 등 반일투사들이 세운 간도지역 대표적인 학교이고 신안진소학교는 김좌진 독립군사령관이 세운 학교이다. 윤동주는 외삼촌 김약연 등 유명인사 집안 배경이 있고 심련수의 삼촌 우택雨泽 역시 독립운동가로서 이동휘 등과 함께 활동했다. 심련수의 큰 남동생 학수学洙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이종4촌인 항일투사 박관순과 동서지간이다. 또 심련수와 윤동주 둘은 룡정을 배경으로 소년기를 보냈고 만주의 거친 눈보라 속에서 시상을 무르익이였다. 심련수의 막내 동생 해수海洙와 윤동주의 막내 동생 광주光柱는 막연한 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는 해수에게 윤동주의 스크랩을 넘겨주었다. 지금 윤동주의 유일한 유물로 된 이 스크랩을 심호수씨가 보관하고 있다.  

답사팀 일행은 심련수시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다음 코스인 심련수 묘비를 향해 떠났다.

심련수는 1943년 7월, 3년제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를 2년 6개월에 졸업, 그해 겨울 나진항을 거쳐 룡정으로 귀환, 학병을 피해 영안현 신안진 등지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2월 룡정 시가지 예배당에서 백보배 씨와 결혼, 8월 8일, 6명과 함께 영안현에서 룡정으로 오던 중 왕청현 춘양진 기차역 부근에서 의문사를 당했다. 1946년 3월, 시신을 수습해 룡정 토기동 뒷산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답사팀 일행 중 김창희 시인이 지난 여름에 승용차 편으로 심련수 묘소를 찾은 바 있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일행은 묘소를 향한 길을 찾고 있었다. 한 여름 초록은 사라지고 주위는 흰 설뿐, 김 시인과 김정섭 선배님이 앞장서 인도하였다. 눈 덮인 산길을 따라 한가닥 희망을 품고 가노라니 앞에 패쪽하나 보이었다. 이쪽으로 300미터이면 윤동주 묘소라는 것이었다. 일행이 너무나 멀리 올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로 인하여 새로운 관광코스를 발견하기도 했다. 두 시인의 묘소는 워낙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오던 길로 다시 내려오면서 일행은 들판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피곤함도 몰려왔다. 심호수씨의 막내딸과 통화했다. 알려주는 참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떼를 나누어 잡초 속을 행진했다. 아무리 보아도 심씨 능원은 보이지 않고 빈들뿐이었다. 우리가 오던 큰 길도 보이지 않았다. 들판 아래로 멀리 내려와 있었다. 조금 지나면 어두움이 찾아 들 듯 했다.

또다시 통화했다. 그러고는 계속 찾아 헤매었다. 아래로 내려갔다. 김창희 시인이 먼저 심련수 묘비를 발견했다. 우리가 내려온 바로 위에 작은 골자기를 사이 두고 큰 묘비 하나 보이었다. 천만다행이라! 수포로 되어버릴 듯한 오늘의 답사였다. 끈질긴 노력에 우리 스스로도 찬탄했다.

다음 순으로 술 붙고 묵도 드리고 기념촬영하고, 묘소를 둘러보고 한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 원로시인 리기형은 자신이 쓴 『몽양  여운형』중 151-152페이지에서 일본유학 동창생 심련수와 같이 여운형 선생을 모시던 광경을 적기도 했다.

심련수 작품의 발굴은 그의 동생 심호수의 공적이다. 1990년대도 중엽, 한 늙은이가 원고 뭉치를 들고 중국 연길에 있었던 원 문학과 예술 편집부를 찾아왔다. 노인을 접대한 이는 평론가 김운용이었다. 노인은  55년간 항아리에 보관했던 원고라면서 자신의 형이 쓴 유작이라는 것이었다.


형님의 소중한 유물이고 또 보기에도 귀중한 글들이라 비닐천에 꽁꽁 싸서 오지독에 넣은 후 땅속 깊숙이 파묻었댔지오. 그때 (문화대혁명) 반란파들이 일본 특무물건을 내놓으라고 악착스레 달려들어 두들겨패고 했지만 입만 꾹 다물고 있었지요. 형님의 유복자로 태어난 조카놈은 매를 견디지 못해 조선으로 도망쳐간 것이 지금도 거기서 살고 있었요, 그때 못 참고 내놓았더라면...

                                                                                       -연변일보, 2000년 6월 2일자 3면.


     형은 이름이 심련수, 심련수라는 이름이 연변문인들에게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심련수는 일제시기 윤동주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민족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리기형의 심련수에 대한 짤막한 기록은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심련수는 강릉에서 출생, 6세 때 삼촌을 따라 브라지보스토크로 이주했으나 러시아의 제1차 경제개발에 따라 한국인 이주가 있게 되어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흑룡강성 밀산으로 터전을 옮겼다가 신안진으로 재이주하여 초등학교를 그곳에서 다녔다. 1935년 룡정 길안촌(현 길흥촌)으로 이사했고 룡정시내 옛방거리에 있는 사숙에서 공부하다가 동홍소학교(동흥국민우급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이어 동흥중학교에 입학했고 그때 이 학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장하일과 가까이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하일은 소설 『인간문제』의 작가 강경애의 남편이다.

  심호수는 “책을 사서 읽느라고 돈을 너무 쓰니 어느 날엔가 아버지께서 엉뎅이를 발길로 툭 차면서 책망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최서해의 글이랑 즐겨 읽던 기억이 있다.”고 형을 회억하였다.  

   집안 맏아들을 출세시키기 위하여 온 집안 희생이 뒤따랐다. 농사짓는 집안이라 피땀으로 돈을 모아야 했고 심련수의 동생들은 지금까지도 평생 농부로 지내고 있다.    

    연변에 있는 문인들은 “심련수는 일본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시인이다. 대책 없는 탐미주의나 현실 도피주의는 결코 아니었고, 남성적 강건함과 현실 타개 의지를 담은 시를 썼다. 윤동주와 더불어 암흑기 우리 문학을 지탱한 시인으로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공감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심련수의 작품을 제일 처음 접한 김용운 평론가는 “심련수 시의 특징은 유연성과 거창성”이라며 “간도문학의 경우 향수와 조국에 민족적 정서가 시의 주조였는데, 이번 그이 유작에서는 모더니즘 경향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심련수는 일찍 만선일보에 시 5수를 발표하였으며 수학여행을 선후하여 창작기를 맞으면서 312편에 달하는 시를 포함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윤동주가 모더니즘 중 정지용 계열이었다면 심련수는 김기림 계열이라고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으며 심련수의 시상은 이육사나 청마가 체험했던 북만주의 시세계를 연상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 강원도 강릉에도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2004년 3월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심련수 문학편』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