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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32] 무궁화 붉고 흰뫼 높아 / 둥글어한 우리들의 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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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강추위가 연 며칠 이어지듯 우리는 답사의 어려움을 이어갔다. 끊을 수 없는 행보였다.

역시 룡정을 찾았다. 첫 코스는 룡정실험소학교이다. 이곳에 룡정 동흥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었던 심련수시비가 세워졌다.  

일찍 1913년 함경남도 영흥군의 천도교 신도인 백사원(白士元), 고상률(高尚律) 등이 룡정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였다. 1919년 3월, 조선 33인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룡정 일대의 천도세력은 점차 확장되어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설립했다. 최익룡(崔翊龙)의 학교설립은 천도교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최익룡은 조선 애국지사로서 1919년 봄 3.1운동 후 간도로 망명했고 후엔 간도국민회 사법부장에 취임했다. 1921년 4월, 천도교 종리원의 명의로 동흥소학교를 설립했고 동시에 중학강습소를 꾸렸다. 그해 10월 1일에 중학교로 승격시켰고 원 소학교는 동흥중학교 부속학교로 되었다. 1923년 4월에 시공하여 9월 29일에 동흥중학교 새 청사를 준공, 해란강 서쪽으로 이사했다. 현 룡정 제3중학교 자리이다. 청사는 검은 벽돌집으로 세 개의 교실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최초의 동흥중학교 옛터를 그닥 기억하지 않고 있다. 동흥중학교를 말하면 우선 현 룡정시 3중을 떠올리군 한다.

동흥소학교 옛터, 즉 원 동흥중학교 옛터에 대하여 현재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룡정3중 길 건너 북쪽 켠, 지금의 룡정직업기술학교 자리를 동흥소학교 옛터라고 하지만 최근갑 옹에 따르면 그곳은 옛 룡정 비행장 자리이고 동흥소학교 옛터는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약 200미터 상거한 곳이라 한다. 문화혁명 전 그곳에  룡정농업기술학교가 자리하고 한다.

한국의 관련 서적은 심련수시비가 세워진 룡정실험소학교를 심련수가 다니었던 동흥소학교 옛터라고 적고 있지만 이는 엄청난 오해이다. 우리로서는 심련수 시비가 왜서 룡정실험소학교 즉 이전의 서전서숙 자리, 훗날 일본인이 경영한 간도보통학교 자리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동흥중학교는 대성중학교와 더불어 공산주의 성향이 짙었다. 1920년대에는 신문화운동과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민족독립과 반일투쟁을 선전하는 주요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고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을 많이 받으면서 파란만장의 력사를 써왔다.

현 룡정3중 교정에는 얼핏 보아도 수령이 백년을 넘기는 수양버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답사팀 일행은 지난 용주사 답사 귀로에 동흥중학교 옛터인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그윽한 고풍이 풍겨왔고 해란강을 등진 교정은 유난히 넓어 보이었고 맑았다. 북쪽에 작은 출입구가 하나 있었고 지금도 학생들이 그곳으로 드나들었다. 양편 수양버들이 출구를 중심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문학인 강경애는 1930년대 동흥중학교 교원숙사에 기숙하고 있었다. 당시 남편 장하일이 학교 교무장으로 취직하고 있었고 강경애는 여느 간도의 아낙네와 다름없이 뒤편 해란강에 나가 방치 빨래를 했다고 한다. 아마 그녀가 저 출입구로 빨래대야를 머리에 이고 해란강가에 나갔을 것이고 겨울에는 만주의 찬바람을 맞이하면서 글짓기 구상을 무르익혔을 것이다.

동흥중학교는 창립 초기 3명의 교원과 4개 반급, 113명 학생이 있었다. 학생들은 천도교 자녀들이 위주였고 간도를 위주로 소련 연해주와 조선, 남북만 등지에서 모여왔다. 수업과목에는 천도교에 대한 강의도 포함되었다.

1920년 중반부터 룡정에는 각종 정치세력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과 영향력을 넓혔으며 이는 학교운영과 학생들의 의식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26년 8월, 조선공산당 중앙에서 룡정에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구 위원회를 내왔고 그 산하 지부 4개가 동흥, 대성 두 중학교에 설립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고려 공산청년회 동만도 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동흥중학교에 그 산하조직인 “세포”가 2개 설립되었다. 이러한 고로 동흥중학교의 천도교 색채는 퇴색되어 가는 반면 사회주의 색채가 짙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는 학교운영의 분규로 점화되었으며 학교경영이 어려움에 부딪치자 진보세력과 조선 총독부를 뒷심으로 하는 친일세력간의 쟁탈로 번지었다.

1926년 윤익선(尹益善)이 제3대 교장으로 부임했고 학교는 조선총독부에서 제기한 3가지 조건을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 교원을 무조건 다수로 채용할 것, 조선총독부에서 규정한 교과서를 사용할 것, 원래의 경영자 및 교원을 해고할 것 등이 그것이다.

이에 학생들은 11월 26일에 동맹휴학을 했고 결과적으로 집체로 대성중학교로 전학했다. 이어 1927년 2월 25일 또 한 차례의 동맹휴학 뒤 다시금 집단적으로 대성중학교로 전학했다.

당시 동흥중학교 학생인 림민호(林民镐)는 특기할만한 인물이다. 훗날 연변대학의 주요 창시자로 된 그는 1922년 진보적 학생들을 조직하여 "동구청년회"(东球青年会), "청년회관"(青年会馆)을 내왔으며 1926년에는 맑스주의 연구단체인 "평우동맹"(萍友同盟)을 무었다.

림민호(林民鎬 1904-1970)는 함북 회령군 출신,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부모들은 두만강을 건너 룡정시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고 1913년에는 다시 화룡시 동성촌 고성툰으로 옮기었다. 1920년 3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1월에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2월초에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비밀리에 소련 연해주로 갔다.

림민호는 1926년 6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동만구역위원회 위원 겸 청년부장을 담임하였다. 1928년 9월, 림민호는 조직의 배치에 따라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으며 1932년 5월 4년이라는 모스크바 동방대학 유학생활을 마쳤고 조선 함흥, 흥남 지구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6년 도형을 받고 서울 남대문감옥에 압송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림민호는 10월에 중공당원이 되었다. 이듬해 3월, 중공 돈화중심현위가 건립되면서 이민호는 부 현장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돈화현 민주대동맹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1946년 10월 연변일보 전신인 길림일보 조선문 책임주필을 맡았고 1948년 12월에는 동북조선인민대학 준비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되어 구체적인 준비사업 중임을 맡았다. 1949년 4월, 림민호는 연변대학(교장은 주덕해 주장이 겸임) 상무부교장으로 임명 된 동시에 연변대학 당지부서기로 당선되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1966년 10월 림민호는 ‘주자파’의 누명을 쓰게 되었으며 1970년 7월 14일, 연길시 허름한 초가에서 세상을 떴다.

1978년 7월 14일 중공연변주위는 림민호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한국정부는 광복절 63주년을 맞아 2008년 고 림민호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전수하였다.

참고로 당시 동흥중학교 교원들의 로임을 적으면 교장 96원, 교감과 학감이 각 70원, 중학부 교원 76원, 소학부 교원 40원, 회계 30원이다.  

1930년 10월, 동흥중학교에 처음으로 중국공산당 비밀지부가 세워졌다. 서기는 최호림(崔虎林)이다. 1934년 일제의 강압에 동흥, 대성 두 중학교는 합병되어 "민성중학교"로 개칭했다가 1년 만에 다시금 두 학교로 분립되었다. 당시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교원으로 재직했다. 교원은 총 6명이고 학생은 202명이었다.

오늘 우리 답사의 주인공 심련수는 1937년에 동흥소학교를 졸업한 뒤 동흥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40년 22살에 졸업(제18회, 211명 졸업)했다. 이해 1년 동안 쓴 작품이 대량 나마 심련수 작품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특히 수학연수는 그의 작품 활동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심련수가 동흥중학교에 입학한 이듬해 대성중학교와 합병하라는 위 만주국 교육부의 지령이 있었고 1년 뒤인 1939년 6월 15일, 두 학교는 재단법인 룡정 국민고등학교(농과)로 분류되었다. 1941년 7월 13일, 학교의 운영권은 위 간도성에 넘겨졌고 학교는 간도성립 제2국민고등학교로 되었다.

1942년 여름 밤, 불명의 화재로 동흥중학교는 엄중한 손실을 보았다. 많은 도서, 교수용품, 악기, 체육기재 등이 소각되었다. 학교교육은 노화교육에 접어들었고 학생들은 밭에서 온종일 일했고 때로는 실외에서 교학을 했다.

일제 노화교육에 불만을 품은 교장 임계학(林启学)이 사직했고 교도주임 장하일도 사직했다. 임계학은 사직 후 룡정에서 북선여관을 경영하다가 광복 후 북한으로 나가 조선중앙도서관 관장으로 일했다. 장하일은 사직 후 조선일보사 총편집으로 일하다가 광복 후에는 조선 황해도 위원장으로 사업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동흥중학교는 옛 교명을 회복했고 1946년 9월 16일 원 동흥, 대성, 은진, 명신, 영신, 근화(槿花) 등 6개소 중학교는 합병, 룡정중학교로 되었다.

현재, 동흥중학교 청사의 확실한 옛터와 강경애가 하숙했던 학교 교원 기숙사 옛터는 확인하지 못한 상황, 다만 세월과 함께 버티고 있는 수없이 늙은 버드나무가 긴긴 력사가 고이 잠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