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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31]  참스럽다 착하다 아름다워라 / 정신은 자유요, 이상은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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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는 갈수록 사나왔다. 매운 추위가 발목에 감기고 일행은 급급히 골목에 접어들어 와룡동으로 향했다. 올 들어 가장 큰 눈보라인가 싶다. 1시간 넘게 걸어서 길옆 상점에 들려 잠간의 커피타임을 가진 후 원 원예농장 본부 청사를 지나 와룡동으로 이어지는 “민흥” 표지패쪽을 따라 섰다.

북으로 뻗은 작은 개울을 끼고 마을이 들어앉았는데 소영향 민흥촌 소재지인 상발원祥发源이다. 옛적에 이곳에 성이 한 씨라는 사람이 술을 고았는데 그 술공장 이름이 상발원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상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올 가을에 한번 다녀간 적이 있었다. 꽤나 먼 거리라 짐작되면서 눈보라 길이 일행에게는 조금 근심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2-3명이 떼를 지으면서 쉼 없이 길을 재촉했다. 골 안에 들어갈수록 별장들이 늘어섰다. 주인이 부재인 듯 고요하기만 했다. 양어장도 있고 잔디밭도 가꾸었다. 개들도 많이 기르고 부자들이 동네 같았다. 생각하면 1920년대 이곳은 지금 느끼는 것보다 더 깊은 산골이었을 거다.

와룡동 지명석을 지났다. 와룡동은 민흥촌 제3, 4촌민소조를 일러하는 말인데 부락마을 서쪽에 구불구불 뻗은 산들이 기다란 용이 누워있는 모양 같다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마을 뒤 길 오른편 눈 덮인 산언덕을 눈이 아프게 살폈다. 하얀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금 눈 여겨 살펴보면 바로 비탈 아래 작은 비석이 가물거린다. “사은기념비”가 보이는 상 싶었다. 고된 행군 길에 다가오는 약간의 희열이 감돌았다.

1935년 일제에 의해 소각된 옛터에 새 교사를 짓고 9월 12일 창동중학교 출신 정제환등이사은기념비谢恩纪念碑"를세웠다. 기념비는총높이 1.87m, 비석은멘트 기초에세워졌다. 롱대석은화강암으로되었으며길이 2250px, 너비 1475px, 높이 375px이다. 비석몸체와개두석은흰돌로만들었다. 비석 뒷면에는 "사립창동중학원  원장 오상근吴祥根, 이병휘李炳徽 남성우南性佑”라고  새겨진 머리 글 아래 아래와 같은 비문이 있다.


은사 신흥남, 김종만, 홍우만, 리진호, 김리택, 송창회, 서성권, 문경 등, 창동학원은 기원 1907년에 창립되였다. 즉 우리 민족이 간도에 이주해온지 약 40년이 되는 때에 뜻 있는 와룡의 여러 지사들이 처음으로 소학교를 창립하였는바 이는 본 원의 기원이다. 3년후  여러 교원들이 협력하여 새로 중학부를 설치하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온갖 심혈을 몰부어 우리들을 교양하였다. 위대하도다, 선생님들의 은혜, 아름다워라 창동이여, 이 원의 출신인 20여명은 그들의 은공을 잊지 못하여 비석을 세워 칭송하노라


15만원 탈취사건 주인공인 임국정, 한상호가 이 학교 출신이고 최봉설은 한때 이 학교 부속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사은기념비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길 건너 아래 둔덕에 붉은 기와의 아파트가 보인다. 창동중학교 옛터이다.  

민흥촌은 19세기 중엽 함북 회령에서 최종석崔宗锡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여 상발원에서 소작농으로 있다가 와룡동에 들어와 화전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1883년에 이르러 화룡동에는 8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을 형성하였다. 최종석은 15만원탈취사건 주인공인 최봉설의 조부이다.

마을이 이뤄지자 한겨울 글방을 차렸고 서당교육을 이어가던 중 신식교육을 목표로 학교후원회가 설립되었다. 최병균, 최종환 등 12명으로 이루어 졌으며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새 교사를 세우고 1908년 와룡동에 "창동소학교"를 창립했다.

4년 후에는 중학교를 설립하고 교명을 "창동학원"으로 개명하고 독립과 자유에 기반을 한 후대양성에 취지를 두었다.

초기 7명의 교원, 중학생은 80여 명, 간도와 남북만, 그리고 러시야 연해주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중학부는 군사과목을 설치하였으며 1925년까지 중학부는 200명이 훨씬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왕청현 나자구 사관학교에 전학했다.

1919년 초,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 참가 경비를 간도지방에서도 모금하게 되었고 1월 말 모금위원회가 성립되었다. 와룡동위원에 창동학교 교원 정기선郑基善,정기영郑基英 형제와 최이봉崔以鹏 즉 최봉설이 당선되어 모금에 전력했다.

1919년 3.13반일시위에 창동학교 사생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대오 제일 앞장에 섰다가 희생된 박문호는 창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3.13반일시위 후 와룡동과 적암평赤岩坪 (현 인평촌 동쪽)이 반일운동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김약연은 와룡동 창동학교에 은폐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조선족민보"를 출간했다. 그리고 3월 31일, 김약연은 와룡동에서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간도지역의 가장 큰 반일단체 간도국민회의 외곽조직인 간도대한청년회는 본부를 창동학교에 두었으며 최회장은 창동학교 교원 서성권, 부회장은 강백규였다. 간도청년회는 창동학교를 거점으로 적극 활동했다.

철혈광복단의 많은 골간들이 창동학교 교원과 학생출신들이다. 최봉설, 서성권, 정기선, 정기영, 림국정, 한상호 등이다.

1920년대 초, 맑스주의가 룡정을 중심으로 퍼졌고 1930년 와룡동에 중국공산당 지부가 설립, 창동학원 교원 지봉하池凤河가 서기를 담임했다. 이들은 당의 외곽단체인 "반제동맹"을 내오고 야학교를 꾸려 문맹퇴치에 힘썼다. 1931년 학생들은 추수투쟁에 나섰고 1932년 춘황투쟁에 뛰어들었다.

창동학원은 일제의 탄압을 면치 못 했다. 지봉하 등 8명이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었고 지붕하는 혀를 깨물어 끊고 단식투쟁 끝에 1935년 옥사했다.

일제는 이정희李正熙를 앞세워 와룡동에 무장자위단을 성립한 뒤 장총 16자루로 무장했다. 와룡동 사람들은 자위단 단원과 배합하여 그 장총을 몽땅 훔쳐 땅속에 묻어버렸다.

이  사건으로 창동학원과 와룡동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날로 심해졌다. 일제가 창동학원 교사를 강점하고 군경을 주둔시키려고 하자 와룡동 주민은 학교에 불을 질러 소각해버렸다.

1935년 마을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새 초가집을 짓고 창동학교를 다시 복원, 9월 12일 "사은기념비"를 세웠다. 학교는 2개 학급에 109명 학생, 2명 교원이 있었다.

창동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폐교되었고 1945년 광복을 맞아 지상봉, 김명화 등의 노력으로 10월 동사회를 설립하고 창동학교를 다시 회복했다.

창동학원을 적으면 자연히 한 사람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정기선이다.

사은기념비 동남쪽 장대에 올라 서쪽 비탈 남단에 서향 비석 하나 있다. "석천거사 정기선추모비石泉居士郑基善追慕碑"비문이 새겨져 있다. 정기선은 김약연과 함께 러시아로 갔던 정기영의 둘째 형이다. 창동학교 졸업생이며  철혈광복단 성원이다. 조난 당시 구수하 신흥동에 자리 잡은 봉명鳳鳴학교 교원이다.

일본군의 경신년대토벌에 와룡동도 재앙을 입었다. 피체된 정기선을 구수하(현 룡정시 태양 횡도하자)로 끌고 간 후 얼굴 가죽을 벗기고 두 눈알을 뽑아냈고 주민 서인봉의 가족 2명과 화룡 창동에서 피신하여 온 마룡해의 부인, 며느리, 어린애 도합 6명과 함께 집어 가두어넣고 불을 질렀다.

소식을 접한 정기천이 구수하로 갔으나 동생의 시체는 끝내 찾지 못했다. 1940년 4월, 일가  친지들은 와룡동 동산 서쪽비탈에 정기선의 비석을 세웠다. 시체를 못 찾았기에 비석에 추모비라 적었다. 비석 뒷면에 중문으로 된 비문이 있다. 정기선 추모비는 지금 찾는 사람이 거의 없이 산속에 묻혀있다.

사은기념비 남쪽 산비탈 첫 마을이 의외로 우리에게는 흡인력이 있었다. 최봉설 집 옛터가 있었다. 지난 수년 전까지 쓰러지듯 옛집이 지탱하고 있었고 연변일보 등 언론매체들이 옛집 수건을 건의했으나 우리가 찾았을 때는 빈 터만 확인될 뿐이었다. 하얀 눈 덮인 기초가 이곳이 분명 집터자리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깨끗이 지워지고 있었다. 우리의 무감각과 세월의 세제는 느슨하면서도 그 무서움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하얀 눈 속에 답사팀 일행은 귀로에 들어섰다. 명과 암이 교착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