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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익]  조선전쟁의나날을 회억하여 (11)

微信图片_20210729145609s.jpg 1957년 청화대학교 졸업시 저자.



11.   암탉에 관한 이야기  


연변은 오랜 해방구로서 1948년, 많은 고중졸업생들이 승학입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족중학교에는 한어과목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중국어 수준이 대학에서수강할 수 있는 그러한 수준에 미달하였다. 。


연변에도 대학교 수준에 달하는 간부학교가 있었다. 연길시사범학교에 2년제 고급반이 설치되어 있었고, 연변공업학교에도 2년제 고급반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급반에서는 조선어로만 수업하였다.


1946년 9월, 길림성정부에서 위 두개 학교를 접수하여 윈 기초에서 길림성민주학원을 설립, 교육, 공업, 행정과 재정 4개 학부를 설치하였다. 원장은 주보중周保中 성장이 겸했고 하 석린何锡麟, 진운한晋云汉이 교무장과   부교무장을 담임하였다.


당시 교육계 지도자들은 당국에 건의하여 우수한 고중 졸업생을 선발하여   조선에 유학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변공서 임춘추林春秋 전원은 위 건의를 동의하였고 38명을 선발하여   1948년 7월 조선의 각 대학에 유학을 보낸 것이다. 나와 김광원金广源은   이렇게 조선 유학생으로 되었던 것이다.


나와 김광원은 길림성민주학원 공업학과, 교육학과 학생이며 조선 평양에   가서는 한 학교, 한 학과, 한 기숙사에 있었다.


나와 광원 동창은 중학교 시절 모두 전과학교를 다녔기에 대학에 입학하여 수업에서 고중생처럼 쉽게 수업을 소화할 수 없었다. 대1 때 우린 보충수업을 많이 하였으며 힘써 노력하였다.


고향을 멀리 떠나 타향에서 공부하기에 정부에서는 우리에게 생활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우리는 휴가를 이용하여 알바를 해야 했고 생활용품을 자체로 해결하였다. 유학생활에서 우린 어려움의 쓴맛을 만끽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김광원 동창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숙사의 위생을 전부   도맡았다. 체육장 노동 등 공익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어지럼고 무거운 일을 골라서 하는 것이 황소 같았다. 사후에는 과로로 인하여 늘 코피를 흘리는 것이였다.  


우리의 숙소는 대학 울안의 온돌이 있는 단층집으로 옮겨갔다. 광원 동창은 온도가 가장 낮은 쪽을 차지하고 따스한 곳은 타인에게 양보하였다. 그는 솔선수범하는 모범생이다.


조선전쟁 발발 후, 나는 6월 27일 참군을 신청하였고, 학교측의 비준을 거쳐 40명과 함께 맨 처음으로 포병군관학교에 입대하였다. 그후, 학교에서   두번째로 되는 학생입대가 있었는데 광원이도 그속에 있었다.


참군하여 반 년이 지나서 나는 전선에서 부상 입어 조선 자강도慈江道 전천前川야전병원 시중时中분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1950년 11월 중순 쯤, 홀로 후퇴하던 광원이가 이곳을 지나다가 물 마시러 우연하게 나의 병실에 들어왔다.


광원이는 과도 유혈하여 얼굴이 창백한 나를 보고 너무도 놀랐다. 반 년전에 학교에서 너를 군대에 보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광원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문을 닫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곤 큰 암탉 한마리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암탉을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맡기면서 꼭 닭곰을 하여 이 부상병에게 대접하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광원이는 나더러 꼭 병치료를 잘하고 건강을 회복하여 학교에서 다시 만나자면서 말을 마치고는 총망히 길을 재촉하는 것이였다.


그 어려운 나날에 암탉 한마리는 얼마나 귀하고 얻기 힘든지 우린 알고 있다. 광원 동창이 가져다 준 것은 우리의 우정이며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었다.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2년 군대에서 제대 후 광원이가 중학교 때 나에게 쓴 편지의 훈춘 주소대로 편지 3통을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70여 년 세월이 흘렀으니 생사도 알수 없게 되었다. 그날의 갑작스러운 만남이 내 일생에서 그와의 마지막이였으니, 그리고 그가 가져다준 암탉이 나에 대한 그 동창의 마지막 관심으로 되었으나....,


위에서 지면을 할애하면서 길림성민주학원의 하석린何锡麟 교무장을 언급한 것은 그이가 1953년 초, 베이징사범대학교 부교장으로 된 사연 때문이다. 훗날 나는 베이징사범대학교에서 청화대학으로 전학하였는데 하석린   부교장의 도움이 많았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