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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30]  눈보라는 영웅의 기상 날리고 / 세월은 가인의 눈물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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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벽부터 눈보라가 일었다. 아침이 되면서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고 우린 예정된 답사를 "강행"했다. 요즘 들어 꽤나 추운 날씨임이 분명했으나 일행은 연변노동자문화궁 앞에 모이었다. 연길감옥탈옥기념비가 문화궁 정면과 연변가무단 건물 사이에 세워졌다. 2000년 6월에 김명주 가족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당시는 연변예술극장이라 불렀고 1930년대 이곳은 연길감옥 즉 길림성 제4감옥 옛터였다.

감옥은 1924년 수건 되었고 사방 100미터 부지를 점했다. 사변은 벽돌담을 쌓았고 남쪽담장 복판에 대문을 냈다. 탈옥 당시 감옥에는 수백 명 중공당원과 투사들이 갇혀 있었다. 감옥울안 동남쪽 모퉁이에 담장을 치고 여자 감방 여덟 개를 설치했는데 50여 명 여죄수를 감금, 그중에는 김정길 등 8명의 혁명자도 있었다.

1931년 초, 연길감옥에는 중공 연길감옥위원회가 비밀리에 성립되었고 원 중공 왕청현위 서기 김훈이 서기를 맡았다.

김훈金勋(1904-1934.12.16)은 룡정 대성중학교 출신, 1925년 소련 해삼위 한 대학에 입학, 1927년 왕청현 배초구 향공서에서 문서로 일하면서 조선공산당에 가입, 1930년 7월 중공당원으로 되었다. 1931년 1월 21일 천교령에서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옮겨졌다.

김훈 등은 두 차례에 거쳐 파옥을 준비했으나 관건적 시각에 반역자의 밀고로 실패를 보았다. 김훈 등은 주요 영도자들은 피살의 결말을 보게 된다.

세 번째로 되는 파옥투쟁은 간수들이 연휴일을 즐기는 1935년 단오절을 계기로 급속히 진척되었고 김명주를 위수로 하는 17명의 파옥결사대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원래는 5월 6일 오후 3시로 파옥을 결정했으나 의외의 사고가 발생하여 이튿날인 5월 7일 오후 3시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도끼와 목수 도구를 무기로 간수의 총을 빼앗았다. 일본인 지도관 东實과 감옥장 하승림河承林 및 간수 약간 명을 죽이었고 50여 자루의 보총과 몇 자루의 권총, 그리고 수류탄 수십 개로 무장했다.  

파옥하고 탈출한 백 여 명 죄수대오는 세전령과 모아산 고개를 향해 두 패로 나누어 추격하는 일본수비대를 피했다. 며칠 후 후 두 갈래 대오는 또무거우 신선동 유격근거지에 도착하였다. 인원은 탈출할 때의 절반도 못되었다.

1980년대 말, 연변텔레비전방송국에서는 드라마 "동틀무렴"을 제작했다. 시나리오에 전설홍, 연길감옥 탈옥사건을 원형으로 각색한 것이다.

연길감옥 수감 중 김정길이 뜬 뜨개보는 혁명문물로 현재 중국혁명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김정길金贞吉(1910-1933)은 함경북도 출신, 1911년 룡정으로 이주, 영안현宁安县, 목단강 북전자촌北甸子村으로 재 이주했으며 1928년 룡정대성중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5.30폭동에 참가했으며 중공당에 가입,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봉임동 대동소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1931년 5월 재차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그녀는 이불보에 "연길현제4감옥김정길신음고통지결품청년여자해방세계적고창延吉县第四监狱金贞吉呻吟苦痛之结品青年女子解放世界的高唱"이란 27자를 새겼다. 1932년 3월 석방되었고 1933년 겨울, 두 명의 동지와 함께 삼도만으로 가던 도중 일본 토벌대와 맞붙어 박투 중 희생되었다.  

연길감옥은 또 한명의 력사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중국 마지막 황후 완룽婉容이다.

궈뿌뤄 완룽(郭布罗·婉容, 1906.11.13-1946.6.20), 자는 모홍慕鸿, 흑룡강성 눌하시讷河市 용하향龙河乡 사람, 신장 163cm, 다우르족达斡尔族, 후에 만족 정백기에 편입되었다. 「낙신부洛神赋」중 '완여유용宛如游龙"이란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1922년 3월 10일, 16살에 황후로 책봉되고 12월, 17살에 말제 황제 부의와 결혼했으며 1924년 10월 부의와 함께 황궁에서 쫓겨났다. 1932년 3월 9일 부의와 함께 장춘에 도착, 28살인 1934부터 1945년까지 시위와의 스캔들로 인해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점차 아편쟁이로 윤락되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과 함께 위 만주국이 붕괴되자 해방군에 의해 통화, 장춘, 길림, 돈화를 거쳐 1946년 5월 말, 연길에 도착, 연길감옥에 수감되었다. 여자감옥은 콘크리트로 된 창고였다. 완룽은 2층 침대 아래층에 배석되다. 6월 초, 도문을 거쳐 목단강으로 전이하려 했으나 신체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아 감옥 측에 넘겼으며 6월 20일 오전 5시 경에 40세를 일기로 연길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신변에는 지켜주는 아무도 없었다.

감옥측은 유상을 남기고 6명이 나무문짝에 시체를 실어 평평한 곳을 찾아 매장했다. 묘소는 작은 봉을 만들었고 지점은 예술극장 남쪽, 모아산 비탈 이북의 산비탈 아래로 알려졌다.

완룽의 기구한 운명,  중국고유의 문화와 서양문화를 융합했다던 완룽은 황후가 되는 그 순간, 비운의 씨를 심게 되었고, 오늘날 사라진 묘소와 함께 황후의 존엄과 영광은 그 누구도 기념해주는 이가 없었다.

눈은 점차 세게 내렸다. 모든 땅위를 덮었고 우리들의 시선을 가리고 있었다. 연변노동자문화궁 정면 앞 큰 길을 건너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원 연변주인대 청사 뒤편 아파트에 둘러싸인 건국 전 연변의 최고 행정부 건물 수변루가 있다. 우리가 다녀올 두 번째 코스이다.

수변루戍边楼는 연길시 하남가 광화로 서광골목 7-17번지에 위치, 길림변무독판 판공청사이다. 일명 도윤루 라고도 한다. 

청조는 광서 28년(1902년)에 연길청을 두었고 선통원년(1909년)2월에는 길림변무독판공서 동남로 병비도를 연길에 두었다. 수변루가 선통2년 정월에 준공되자 수변루에서 사무를 보게 되였다. 청조는 이해에 연길청을 연길부로 승급,동남로에 소속시켰으며 같은 해 연길부를 연길현으로 고쳤다. 민국 3년(1914년)6월에 동남로관찰서를 연길도윤공서로 고쳤다. 수변루가 도윤루라고도 불리우게 된 이유이다. 

수변루는 동서길이 20.8미터, 남북너비 18.6미터이며 정남향 2층 누각이다. 광서 34년(1908년)에 착공하여 선통원년(1909년)에 준공되었고 선통2년 정월에 사용에 교부되었다.  

기재에 의하면 이곳에 수변루를 비롯하여 비교적 큰 건축 군이 있었다. 총 221칸, 둘레 담장의 동서너비는 108미터, 남북길이는 220미터였다. 담장 안은 남쪽 뜰과 북쪽 뜰로 나뉘었으며 남북담장에 각기 큰 대문이 하나씩, 동서담장에 작은 대문이 각기 하나씩 있었다. 수변루는 남쪽 큰 대문 정면 건물이다.

수변루는 만청시기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서 1983년 12월 제3기로 주급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되었다.이듬해에 주정부는 자금을 투자하여 수변루를 원 모양대로 수건했다.그 후  리퇴직 노간부활동장소로 사용되다가 연변 주 사지판공실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1990년 성급중점보호문물로 승급했다.

연변주정부에서는 1997년 자금을 투자하여 원래의 기와를 벗겨서 다시 잘 이어놓았다. 또 처마와 기둥에 기름칠도 하였다.

현재 수변루 남쪽 정문 위에"연변에서의 애국장령 오록정"이란 간판이 걸려있다. 오록정은 연변을 위해 업적을 남기신 중국인이다.

오록정吴錄祯(1880-1911)은 호북성 운몽현 사람, 1897년에 호북 무비(武备)학당에서 공부하다가 이듬해 중국인으로서 일본의 제1기 사관생으로 되었다. 그해 기병과에서 공부하였다. 1900년 비밀리에 귀국하여 당재상과 반청봉기를 급급히 조직하다가 실패하고 상하이로 피신한 뒤 이내 일본사관학교로 돌아왔다. 1901년 겨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1907년 7월 동삼성총독인 서세창을 따라 봉천에 와 군사참의로 있었다. 이때 일본은 ‘간도문제’를 조작하였고 오록정은 서세창의 명을 받고 길림변무조사에 나섰다. 그는 돈화, 연길, 훈춘을 다녀왔으며 훈춘에서 두만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와 강을 따라 백두산까지 올라갔다. 그는 연길지구의 첫 지도-1/50만 계무전용지도를 그려냈고 4개월의 품을 들여 10여만 자의 「조사연길변무보고서调查延吉边务报告书」를 집필하였다.

1907년 9월, 연길변무방판으로 부임되고 1909년에는 연길변무독판으로 승임되었으며 또 육군도통의 군직을 수여받았다. 1910년 12월 베이징에서 육군 제6진통제镇统制로 승진되었다.

1907년 7월, 오록정은 변무독판공서의 명의로 천보산탄광을 차업하고 일제의 약탈을 제지하였으며 일제가 간도에 비법적으로 설치한 도사장都社长 및 행정구역을 취소하고 농민토지를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대중의 요구에 의해 일본 측이 비법 설립한 총사장 이의영李羲英을 체포하고 ‘일진회’의 두목 김해용을 구축하였으며 일제가 강박적으로 내쫓은 조선변민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1908년 겨울, 공저로 「중조계무장문절약中朝界务长文节略」을 써냈다.

오록정은 1911년 11월 16일 원세개에 매수당한 위대장 마보주马步周에 의해 석가장 기차역에서 암살되었다.

1912년 남경림시정부가 성립된 후 손중산은 오록정을 대장으로 추인하였다. 민국 초에 연길시서공원에 ‘오독호록정거사비吴督护禄贞去思碑’를 세웠으나 1938년 일제는 연길신사를 지을 때 비석이 길목에 있다는 구실로 뽑아버렸는데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연길공원 분수 뒤편에는 "오도호록정거사비"가 새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