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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익]  조선전쟁의 나날을 회억하여(2)

微信图片_20210729145651s04.jpg 미국을 위수로 하는 19개 참전인원 조각상과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인 저자 기념사진.



2. 순천전투에서 부상 당하면서


10월 20일, 우리가 평안남도 순천顺川 부근까지 후퇴하였을 때 미공군의바둑판식 밀집폭격과 공지대 기관총 소사를 당하였다. 행진하던 도로와길 양켠에는 일시에 사상자와 가축들로 메워졌다. 세계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정지된듯 했고 지상에는 움직이는 어떠한 생물로 없는듯 했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가로막기 위하여 미군은 살육을 서슴치 않았으며 평민과 가축도 예외가 아니였다.   


당시 미군 총사령부는 일본 오키나와 섬에 있었고, 미군 제187낙하산퇀을   지휘하여 서울 부근의 김포공항에서 이육하여 조선 순천顺川과 숙천肃川   지역에 투하하였으며 낙하산 정예부대를 이용하여, 그리고 정교한 선진장비와 강대한 화력으로 평양에서 철되하는 조선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훗날 동료가 알려준데 따르면, 동료가 본 자료에 따르면 10월 20일 저녁,   우리가 순천에서 후퇴하여 나올 떄 순천대교에서 조우한 부대가 바로 미군 낙하산 정예부대였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순천 북안을 고수한 적군이 어느 부대인줄 몰랐고 다만 대방이 장비가 선진적이고 전술자질이 대단한 것임을 느끼였을 뿐이였다.


전세를 넓펴가며 흉악스럽게 달려들어 우리를 죽음에로 몰아가는 적군에   비하여 보면 우리 부대들은 후퇴하면서 대부분이 건제가 불완전했으며 효과적인 전투력을 형성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북으로 후퇴하는   한무리 대오가 보였고, 오직 내가 거느리는 대오만이 완전한 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황은 극히 불리했다. 앞에는 적군이 가로막고 있었고 뒤에는 추격병이   바싹 다가오고 있었다. 후퇴하는 부대는 전반적으로 정서가 말이 아니었고 대부분은 액운이 곧 닥칠거고, 살아남기 힘들거라면서 절망에 잡혀있었다.


준엄한 국면에 마주하여 나는 자신의 의무를 심심히 느끼고 있었으며, 나는 어깨에 내려진 짐을 짊어져야 했다. 나는 주저없이 아래와 같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건제를 잃은 흩어진 병사들에 대하여 재편성을 단행하였다. 내가 이끄는 부대(30여 명)를 주력으로 임시돌격대를 조직하였다. 나는 임시로 무어진 돌격대를 지휘하여 적군의 저격을 격파해야 했다.   


당시 순천대교를 건느지 못하고 묶여 있던 인원은 약 1만 명이었고 산병과 비군사인원이 혼잡해있었다. 나는 백성들 속에 섞어 있는, 계급장이 나 보다 높은 군관들이 평민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여러 명 보았다. 나는 이러한비겁쟁이들을 한없이 멸시하지만 그자들을 적발하고 꾸짖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가장 짧은 시간에 산병들을 모아서 편대를 완수했고 그들에게 작전임무를 나누어 주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공격을 시작하여 강 북안의 적군 저격을 무찌르고   포위를 꿰뚫고 나가야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나의 명령과 함께 부대는 포위권을 향해 돌격하여 나아갔다.


아군의 준비가 너무 창촐하고 장비가 적군을 따르지 못하며 우리의 돌격노선이 단조롭고 쉽게 알아볼 수 있었기에(순천대교를 반드시 지나야 함) 적군은 매우 쉽게 목표를 선정하고 반격해 왔다. 우리가 대교의 진입교 부근의 올리막 길에 닿았을 때 즉시에 적군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기실, 나의 계획안에는 적을 유인하여 먼저 사격하게 되어 있었다. 적들이   숨어 있기에 적이 먼저 총을 쏘아야 우리는 적의 병력포치와 화력 강도를   알수 있는 것이다. 그후에야 우리는 효과적이고 목표가 있는 강력한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대부대는 끝내는 적군의 저격을 힘겨웁게 물리치면서 성공적으로 포위를   뚫었다.이번 포위탈출에서 최전방에 서서 싸우던 나는 적군이 제일 처음으로 사격을 개시할 때 어깨와 왼쪽 귀에 각각 탄알 한 발을 맞으면서 땅에   쓰러졌다. 나는 옆에 있던 한 명 전사가 탄알을 맞고 죽어가는 것을 보았었다.


부상을 입은 나는 혼미해졌고 20여 시간이 지난 이튿날 오후에서 천천히   소생하였다. 나는 내가 순천의 북안에 있음을 발견했다. 부상을 입은 후 어떻게 강 대교를 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두 명의 전사가 나를   부축하여 짚차에 태워 차와 함께 다리를 건닌것 같이 어슴프레 생각날 뿐이다.   


나는 이제야 뱃가죽에 덩어리 같은 물건이 있는 것을 느꼈다. 혁띠를 풀고   자세히 살폈다. 흘러내린 피가 굳어져 배가죽에 피덩어리 되어 붙어있었다. 혁띠를 풀자 피는 금방 또 흘러내렸다. 나는 혁띠를 다시 졸라매고 몸에 지니고 있던 구급용 붕대로 간단한 싸맸다. 지혈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전사는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다시 부축키며 북안을 떠났다. 그들 중 한명은 나의 고향친구 김학준金学俊이다.


제대 후, 나는 그가 살았던 세린하향细麟河乡에 가서 그의 소식을 알아보았으나 지금까지 그 친구를 찾지 못하였다. (2)


황남익黄南翼 약력

1929 1   연변용정출생.

1948        국비로조선평양유학.

1950 6월 26일,   조선인민군에 편입, 참전.

1950 10월 20일, 순천 포위돌파전투 지휘, 1만 여명이 돌파에 성공, 황남익 부상당함.

1950 11월-1951년 3월까지. 군병원에서 치료 함.

19 51 4,   전쟁터로 복귀.

1952 3월 5일, 신체 원인으로 제대 함.

1952 5월, 용정현정부에서 제대군인 수속을 함.

1952 9월, 베이징사범대학교 물리학부에서 공부.

1953 3월-1958년 6월,   청화대학교 토목학부에서 공부, 졸업 함.

1958- 1990년   베징시건축설계원(현 베이징시건축설계연구원) 사업, 퇴직함.

선후하여3, 제6, 제1설계실과 전문가작업실 부주임, 서기, 서기 겸 부주임 역임.

1990 - 2010 베이징시건축설계연구원전문가작업실부주임으로초빙.

공동저서适老住宅设计” 등 편집, 번역, 저서 다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