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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29]  정의의 분출은 한줌 재를 날리고 / 수치심 없이 력사는 생생하고 퇴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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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에서 일제의 가장 큰 유물은 아마도 간도 일본총령사관 건물일거다. 현 룡정시정부 청사이다. 다 아시듯이 1922년 11월 27일 령사관 관사에 화재가 발생하여 몽땅 타버렸고 방화 혐의자는 조선인 한 청년으로 전해지지만 확실한 신분은 지금도 알길 없다. 그리고 “소가죽 한 장” 전설이 전해짐은 이야기로 스쳐 지나면 족할 것이다.  

룡정 일본총령사관 전신은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이다. 1907년 8월 23일 세워졌고, 바로 4일 전 일본륙군중좌 사이또 스에지로가 두만강을 건너가서 20여 명 군경과 54명 관리들을 이끌고 룡정에 들이닥쳤던 것이다.

사이또는 국자가 어느 약방의 주인으로 있으면서 오랫동안 간도에서 간첩활동에 종사했다.

룡정 일본총령사관 청사는 3년의 시공을 거쳐 1926년 5월에 준공되었다. 부지는 4만 2944㎡, 주건물은 2397㎡, 부속건물은 4300㎡이다. 당시 일본 외무성에 귀속되었다가 1932년 위 만주국이 세워지면서부터 위만 주재 일본대사관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연길, 화룡, 훈춘과 왕청 그리고 당시 봉천성에 귀속되었던 안도와 돈화, 액목이 그 관할 범위에 속했다.

현재 양 켠 2층 건물, 중간이 4층으로 된 청사건물의 모양과 색상은 변함없고 앞 타원형 화단도 그대로 이다. 다만 옛적 고려시대의 돌사자 2개는 사라졌다. 토성과 토치카는 세월을 비켜 서 있듯이 태연하고 다만 햇빛에 바라진 벽면을 더 진한 붉은 색으로 칠하여 마치 경극 속 화난 분장을 연상시킨다.

90년 수명을 이어온 건물, 일제가 간도 나아가 만주 조선인을 감시하고 감금하고 진압하고 살해하는 전문기구의 상징적인 건물이 1945년 광복을 맞은 오늘에도 변함없이 그대로 사용되고, 중국 기층정부의 사무청사로 그대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청사 지하는 일제 때 물감옥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애국주의 교양기지로 탈바꿈했다. 몇 개로 된 전시실에는 옛적의 사진자료들이 주로 걸려 있다.

1937년 11월 5일, 일본은 위만주국과 「만주국의 치외법권을 취소할 데 관한 조약」을 체결했고 같은 해 12월 령사관을 철페했다. 당시 간도 일본총령사관 편제는 총영사 1명, 사법영사 2명, 부영사 2명, 통역 1명, 문서 5명, 무전기사 3명, 경찰 100명, 령사관내에 영사실, 경리실(회계실), 무전실, 법정, 경찰서, 감옥 등이 있었다.

령사관의 주요업무는 중국 관계; 일본, 조선교민에 대한 지도와 감독, 교육관계; 통상무역관계; 영사재판사무; 경찰행정; 각종 정보 수집이다.

룡정 일본총령사관은 1938년 3월 31일 폐관되었다. 그후 옛터에는 “개척 의학원”이 들어섰다. 개척의학원은 1940년 7월 2일에 세워졌고 일제의 패망과 함께 폐원되었다. 5년 사이 개척의학원에서는 157명 학생을 모집하고 107명을 졸업시켰다.  

총령사관이 폐관되자 당시 광명학원의 일본인 고도시게오는 그 자리에 학교를 꾸릴 생각이었다. 1935년 일본외무성에 의견서를 제기, “여순에는 공업대학이 있고 봉천에는 의과대학이 있다. ... 위만주국이 성립된 오늘 농업과 임업을 위주로 하는 농임대학을 세우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양자보다 더 욱 가지가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간도의 룡정이 제일 적합한 곳이다.”고 주장했다.

1938년 8월, 오사까에서 출발한 일본군은 룡정에 진출, 25일, 령사관청사에 “훈춘육군병원”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리하여 동만주에 의과대학을 창설하는 문제가 논의되게 되었다.

10월 26일, 룡정가 가장 오노야마가 긴급회의를 소집, “동만의과대학설립기성회”를 내오고 일, 조, 만 세 개 민족이 각 3명의 집행위원을 추대하였다.

집행위원들의 적극적인 활동 끝에 만주국 개척의학원을 치치하얼, 하얼빈, 길림 세 곳에 설치되게 된 것을 수정하여 길림에 설립하기로 한 개척의학원을 룡정에 옮기도록 했다. 그리고 일본 외무성을 통하여 50만 일화로 령사관 터의 모든 건물을 사게 되었다.    

1940년 7월 2일, 개척의학원이 창설되었고 9월 25일 개학식을 마쳤다. 초대원장은 의학박사 기시다후꾸마였다.

룡정개척의학원은 일본의학전문학교 2학년 정도의 학생을 모집하여 2년간을 거쳐 의사로 양성, 동북 3성 각지 개척단에 보건원으로 파견하는 것이다. 초창기 교직원은 17명, 그중 일본인이 11명이다. 교원 중 의학박사 6명, 의학석사 8명, 약학사 1명, 법의학사 1명이다.

개척의학원은 간도성 병원을 부속병원으로 했다. 1942년 3월 21일, 제1기 졸업식을 거행했다.

개척의학원은 또 반공반독半工半读하는 간호부학교를 꾸리고 한 학기에 20여 명 학생을 모집, 총 4개 학기를 꾸렸다.

1945년 3, 4월, 개척의학원은 동만의과대학으로 승격하고 학제를 6년(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과 함께 동만의과대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9월 12일, 위만 동만의과대학을 기초로 룡정의과대학을 설립, 90여 명 학생을 모집했다. 이듬해 10월 3일, 인민정부에서 접수하면서 길림성립룡정의과대학으로 개칭, 1947년 4월, 길림성위, 성정부와 성 군구에서는 룡정의과대학을 길림성분교에 귀속,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으로 개명했고 2학기를 보냈다. 당시 의학원 학제는 1년으로 수정했고 외과와 전지구호를 주요내용으로 했다.

1948년 1월, 길림분교 의학원은 중국의과대학 룡정제1분교로 다시금 개칭, 룡정 일본총령사관 청사에 입주했다. 중국의과대학은 중공당이 창건한 첫 의과학원으로서 전신은 중국 공농홍군 군의학교와 중국공농홍군위생학교로서 1931년 강서 서금에서 창립되었고 홍군을 따라 섬북에 도착했다. 1948년 동북에 4개의 분교를 설치하였다.

1948년 10월 1일, 룡정의과대학의 교사를 골간으로, 원 의대 교학설비를 기초로 연길에 연변의과전문학교를 창설, 로기순 박사가 교장에 임했다. 연변의과전문학교는 연변의학원의 전신으로 되었다.

1953년부터 오늘 이때까지 룡정 일본총령사관 청사는 중공룡정시(연길현)당위 청사, 룡정시정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룡정 일본총령사관 옛터를 마감으로 오늘의 답사코스는 마무리되었다. 옛터의 동서남북 주변에는 잊혀져가고 있는 력사문화 유적들이 수두룩하다. 동쪽 담장 밖 멀지 않은 곳에는 윤동주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룡정 옛터가 있고 동북쪽은 영국덕, 제창병원, 동산교회, 은진중학교, 성서학원, 영국세관, 명신여교 등 유적들이 있다. 좀 더 멀리에는 윤동주 묘소, 송몽주 묘소, 심련수 묘소가 있다. 북쪽 담장 근처에는 김약연이 운명한 옛터, 광명실천여학교, 광명여학교, 일본인 집거구 등 유적이 있다. 서쪽 담장 부근에는 조선은행 룡정출장소 건물, 5층대 건물, 더 나아가면 룡정중앙교회, 룡정 성결교회, 3.13 집회지, 룡정 천주교회당 등 유적지가 있다. 일본 총령사관 서북쪽에는 대성중학교, 광명중학교, 서전서숙 옛터 등 유적지가 있다. 남쪽에는 통감부 간도파출소 옛터가 있다.  

일본인이 유구한 력사와 전통을 담긴 건물이라 자랑스럽게 말하는 룡정 일본총령사관 건물, 우리들에게는 항쟁의 력사가 숨 쉬고 피와 눈물이 배어있는 건물. 이 건물 담장에 지금 우리들은 퇴색되어 가는 원 색상을 재현(보존)하려고 더 진한 색상의 페인트를 칠했다. 하지만 감각적으로나 미관으로도 자연스럽지 못함은 여전보다도 못 했다.

토치카는 주인을 잃었을 뿐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