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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24]  위풍 당당 글소리 랑랑 / 공功은 어느 것 과過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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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거리를 따라 내려와 일본 총령사관 북쪽 붉은 담장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면 길 오른편에 새로 지은 해란지성소구海蘭之星小區 아파트이다. 최근갑 옹은 우리 일행을 멈춰 세웠다. 아파트 입구 미색 접대실을 가리키며 이곳이 바로 김약연의 옛 집터라고 밝혔다.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하필이면 일본 총령사관 코 밑에 집을 잡아야 했을까? 자의가 아니면 기필코 타의일 것이다.

최근갑(1925) 옹은 은진중학교 23회 출신이다. 1941년 2월에 입학하여 1944년 12월에 졸업했다. 그가 소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부유한 가문이었다. 밭이 있었고 소작농이 있었고 소가 있었으며 일정 저금도 있었다. 부친 최승영(崔承泳, 애명 靑男) 은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화룡현 이도구 서성진으로 이주했으며 1930년 그곳에서 중공당에 가입했다. 말뚝에 매여놓은 제집 소를 가만히 판 돈을 중공당에 바치는 “우공”같은 짓을 했다하여 일명 愚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룡정 일본총령사관 신문기록에는 중국발음 “於公”으로 되어 있다. 1931년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옥고를 치렸고 출옥 후에는 룡정에 와서 7-8년간 야학교를 꾸리며 문맹퇴치에 힘썼다. 일본인에게는 늘 불량인물로 낙인 받아 달마다 총령사관에 불려갔다. 1941년 8월 룡정을 떠나 고향 김책시로 돌아갔고 산골에 묻혀  농사를 지었다. 때는 최근갑 옹이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부모들이 학비와 하숙비를 대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김약연 집 앞에는 일본인 두 집이 있었다. 최근갑 옹은 벌채조합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 (大曲) 숙사에 가서 조석을 "페치카"에 불을 때고 저녁에는 목욕물을 끓였다. 당시 뒤 집에 조선인 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여러 차례 목격도 했지만 김약연 인줄은 몰랐다. 김약연 집은 팔간 집이었고 동향이었으며 서쪽은 룡정 실천녀학교 북쪽마당이 된다.

1920년은 김약연에게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한 해이다. 1919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여운형, 리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 연합전선 구축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상해임시정부의 초청으로 상해로 가던 중 중국 관청에 체포되었다. 1922년까지 3년간 연길감옥에 구금되었다. 많은 문헌들에서는 당시 연길 도윤 도빈이 일본인의 박해를 막기 위한 보호적 조치라고 적고 있다.

출옥 후 김약연의 활동은 크게 변화되어 갔다. 1928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을 마친 후 명동교회로 돌아와 목사로 봉직했다. 1924년 명동중학교가 폐교되었고 재학생 전부가 은진중학교에 편입되었다.

명동학교가 폐교된 후 김약연의 사회활동은 극히 줄었으며 룡정으로 이사 후 그의 사회활동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명동 이주초기 활약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이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김약연은 명동을 떠나 룡정에 이사했고 1938년 2월 은진중학교 이사장에 취임했다. 1942년 10월 29일 룡정 자택에서 자연사했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는 유언을 남기었다.

계속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면 해란지성 단지 아파트 상가들이 늘어섰고 그중에는 백선옥 百膳屋 음식점이 있다. 조금 전에는 룡정시 호텔 자리였고 광복 전에는 룡정 광명실천녀학교 옛자리이다. 1922년 5월에 설립, 당시에는 광명녀학교이며 주로 정규학교에 다닐 수 없는 녀성들을 받아들여 가사과를 포함한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실천여교는 현재의 룡정시5중 전부를 포함하는 큰 부지를 갖고 있었다. 학교에는 농장도 있었고 과수원도 있었다. 백선옥 음식점이 농장 옛터이다. 농장에서는 뽕나무를 재배하기도 했다.  

실천녀학교 서쪽 끝이 옛 룡정시호텔 정문이다. 바로 옆은 길안거리, 북쪽으로 100미터 좌우 올라가면 길 맞은편에 베이징 4중 넷트학교 룡정자문봉사처가 있다. 일본인 히다까 헤이지로 日高內子卽의 옛집이다. 원래는 조선인이 살았는데 히다까가 룡정에 오면서 그 집을 사게 되었다. 하얀 벽, 양철지붕 목조구조이며 동향작, "ㄷ"자 구조, 양편 사랑채에는 아들과 고용인이 들었다. 당시 이 지역은 천도구天圖區 동산로에 속했으며 룡정총령사관 뒤편에 위치,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해 있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다미방도 있었다. 헤이지로 집앞은 당시 실천녀학교 서쪽이 된다.

히다까 헤이지로는 일본 두만강 계통의 낭인이며 흑룡회가 룡정에 파견한 거물이다. 룡정에 광명학원을 설립했고 만주국 군정에 많은 조선인을 길러낸 장본인이다. 룡정에 있으면서도 일본에 자주 내왕했으며 동경에서는 총리대신을 만나고 베이징에 들러서는 당시 원세개 대통령을 만나고 봉천에서는 동북군벌 장작림을 만나고 신경에서는 관동군 사령관을 만났다. 일본 구주 구마모도 출신, 혼자 만주에 와서 천보산 오지 산속에 암자를 짓고 혼자 살면서 "도"를 닦았다고 한다. 머리까지 길러 신선이나 도사처럼 명상과 기도도 지냈으나 이면으로는 토비와 내통하기도 했다. 훗날 룡정에 와서는 일본총령사관과는 관계가 나쁜 듯 하면서  총령사관 정책을 비난도 하면서 중국 상부국 국장, 중국 육군 연대장들과 친교를 맺었다. 하지만 일본총령사관에 잡혀간 조선인이나 독립군 사건도 그에게 청탁하면 이상하게도 다 풀려나왔다.


일본인 치고는 폭이 넓은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선일융화를 주장했고 "광명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재류금지법에 걸려든 많은 독립지사를 돌보아 준 일도 있다. (임호준, 은진 22회, 「히다까 헤이지로」)


1945년 광복이 되어 룡정에서 소련 홍군에 체포되었다.

"히다까 헤이지로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작은 키에 통통하고 늘 마토를 쓰고 다녔다. 팔자걸음이다. 차나 말은 타지 않고 늘 걸어 다녔다. 헤이지로라면 당시 룡정에서는 큰 인물이다. 룡정총령사관 령사 따위는 아예 눈에 들지도 않았다. 광복이 날 때 룡정에서 소련 홍군에 체포되었다. 신경에서 분노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믿을 수 없다. 나는 줄곧 헤이지로의 소식을 찾고 있으나 거의 행방불명이다. 그의 아들 히다까 겐조(日호건삼)이 제3고등학교 초대교장이었다. 즉 은진중학교이다. 미술가였는데 미술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몰랐다. 아버지 헤이지로와 한 집에서 살았다."

최근갑 옹의 말이다.

룡정 5중 담장을 따라 다시 동쪽으로 올라가면 룡정5중 정문, 옛 룡정실천여교 정문 자리이기도 하다. 바로 맞은 편은 중국인 학교인 현 룡정안민소학교이다. 광명녀학교 옛터이다. 히다까 헤이지로와 관련이 있는 학교이다.

1925년 광명회 히다까 헤이지로는 영신중학교 운영권을 이양, 조선총독부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보조금을 받게 된다. 1926년 4월 20일, 광명녀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하면서 개교했고 1929년에는 4개 학급에 110명 학생이 재적하였으며 일본 문무성 지정 교과서를 사용했다. 과목으로는 일본어, 대수, 가사학, 기하, 물리, 일본력사, 일본지리, 음악, 체조, 교육학 등이다. 년 경비는 3300원, 광명회에서 지불하였다. 윤극영이 당시 음악교원으로 있었다. (연변문사자료 제6집, 이봉구,「광명학원 산하의 몇 개 학교」80페이지)

1934년 10월 광명회를 재단법인 광명학원으로 바꾸고 이사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광명여자고등학교로 개명했다. 1935년 1월 광명학원 고등여학부는 일본 외무성 및 문무성의 해외지정학교로 되었으며 매주 수업은 34시간이다. 당시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부장: 구또(구마모도, 53) 월급 200원; 겸임부장대리:가다구라(미야모도, 59), 전임교원: 안용호(함남, 47세) 월급 85원, 야마가와(나가사끼, 29) 월급 90원, 히구찌(야마가다, 34) 월급95원, 황병덕(평양, 36) 월급 70원, 시미즈(짜바, 28) 월급 60원, 이찌야미, 28) 월급 60원,윤여항(윤여항, 함흥, 31) 월급 60원, 사감에 조현숙(황해도, 26) 월급 35원이다. 이외 교원, 겸임교원 5명이 있었다. (위 책, 81페이지)

1938년 1월 간도 성립 광명여자고등학교로 위 만주국 관할로 되었다. 1943년에는 명신여자고등학교와 합병하여 룡정 여자국민고등학교로 개명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그해 9월 옛 고등녀학교 교사로 복교하고 근화槿花녀자중학교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