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他账号登录: 注册 登录

[답사기 22]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1942년 일본유학 간 윤동주는 1944년 2월 22일 일본에서 "사상범"으로 기소되었고 3월 31일 2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45년 2월 16일 사망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3월 6일, 눈보라 치던 날 룡정에 있는 자택 앞뜰에서 치려졌다.

오늘 2010년 11월 13일, 답사팀의 첫 코스는 윤동주 장례가 치려졌던 룡정 자택 옛터이다. 우리는 “룡정의 산증인”으로 존대 받는 향토사학자, 룡정 3.13기념사업회 회장 최근갑(85, 은진중학교 23기)옹을 모시고 현장답사를 시작했다. 우리가 닿은 곳은 제창병원 옛터가 자리한 대륙동산가원 아파트 서쪽 동산거리, 남쪽 내리막으로 2-3분 정도 도보로 내려가면 길 서쪽 편은 원 룡정 일본총영사관 동쪽 검붉은 담장, 담장과 동산거리 사이는 자그마한 빈 공터가 있다. 이 공터가 바로 서대숙의 옛 집터, 지금은 천도 거민위원회 지역이다.

서대숙은 1931년 룡정 태생이며 현재는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조선문제 석학으로 받들리고 있다. 그의 형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은 윤동주와 은진중학교 동기생이다.

서대숙 집 옛터 길 맞은 편 “효성 개장집” 북쪽을 에돌아 들어가면 아파트 사이에 작은 공터가 나타난다. 룡정 기계수리공장 옛터이다. 룡정 민정국(정부 행정부처)에서 지체장애인을 위해 세운 자그마한 공장인데 한족 조 씨가 경영했었다. 지금은 그 옛터에 차고가 들어섰고 차고 남쪽은 룡정시 5중 인쇄공장이다. 바로 이곳이 윤동주 장례식을 치렀던 룡정 옛 집터이다. 당시 집 주소는 룡정 정안구 제창로 1-20호이다. 시인이 한줌의 재가 되어 아버지의 품에 안겨 돌아온 곳이 바로 이곳이다. 지금은 찬  바람만 맴돌아 치는 낯선 한 줌의 공간.

윤동주 증조부 윤재옥은 1886년 함북 종성에서 북간도 자동(현 룡정 개산툰)으로 이민왔다. 북간도의 최초 이민이라 할 수 있다. 윤동주 부친 윤영석은 1905년에 출생했다. 1900년 조부 윤하연 때 명동촌에 재 이주했다. 바로 전 해 김약연 등 4대 가문이 명동에 정착했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명동서 출생, 그 당시 조부는 기독교 장로였으며 동주는 유아세례를 받았다. 윤동주 집은 소지주로서 생활이 넉넉했다. 부친은 명동중학교 출신으로 처남 김약연의 주선으로 북경에 유학했고 동주가 출생 무렵에는 명동소학교 교원으로 있었고 1923년을 전후하여 도꾜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다.

윤동주는 1931년 3월 25일 명동학교를 마치고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 중국인 학교 달라자소학교 6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2년 4월 16살에 룡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입학을 계기로 1932년 집은 룡정으로 이사 왔다. 룡정가 제2구 1동 36호, 20평 남짓한 초가였다. 이 시기 윤동주는 수학과 기하학에 특히 재미를 느낀 듯했고 손수 재봉틀을 돌려 기성복을 고쳐 입거나 나팔바지를 곧잘 만들어 입기도 했다.

윤동주는 룡정에 이사 온 첫 집에서 『삶과 죽음』, 『초 한 대』,『래일은 없다』등 세편의 시를 쓰면서 창작 일자를 기록하였으며 광명중학교 시절 "동주"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 3학년에 편입하여 2학기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1936년 다시 룡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고 1938년 2월 21세 나이로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같은 해 4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했었다.

1939년 가을 윤동주네는 룡정 정안구 제창로 1-20호로 이사했다. 즉 우리 답사팀이 확인했던 윤동주 장례를 치른 집이다.

1942년 윤동주는 일본 도꼬립꾜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입학수속 편리를 위하여 히로우마로 창씨개명했다. 같은 해 여름방학에 룡정 집을 마지막으로 다녀왔다.

동주는 동생들에게 "우리 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 사서 모으라"고 당부했다고 전광하는 『세월속의 룡정』63페이지에 적었다.

이듬해 7월 여름방학을 기다리지 못하고 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둘은 23일을 사이 두고 죽음을 맞이했다.

동주는 옥중에서 고향집에 부탁하여 차입한 『신약성경』을 읽었고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을 고향집으로 보내도록 허용되었다.

1945년 2월 중순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는 전보가 도착하여 동주 옥사 소식을 알았고 부음을 듣고 부친 윤영석과 족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를 방문한 것은 그가 사망한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임종 시 알 수 없는 격렬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면서 담당 간수 한 사람이 동정을 표시했다.

윤동주 부친 등이 도꾜로 떠난 뒤 우편으로 먼저 보냈다는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불연이면 규슈제대에다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을 기다림."이란 내용의 통지서가 뒤늦게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1945년 3월 6일, 유족과 친지들이 모여 윤동주 집-룡정에 와서 두 번째로 이사한 집에 모여 첫 추도회를 했었다. 동주의 절친이자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동창생 인 문익환의 아버지이자 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의 가장 믿는 후배 문재린이 집례했다. 장례식에서 윤동주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었다.

그해 단오에 가족들은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을 세웠고 비문은 김석관이 썼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정음사에서『하늘과 바람과 시』를 출간했다.

1968년 연희전문시절 윤동주가 있던 기숙사 앞에 동생 윤일주가 설계한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1985년 서대숙 일행이 룡정을 찾았고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 최근갑 옹에게 윤동주 자택옛터를 확인해 주었다. 서대숙은 2008년『김약연 간도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책을 역사공간에서 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