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평전10     제10편  십리평 잣덕에서


10편 십리평 잣덕에서


이름 북로군정서


  19193·1운동은 국내는 물론 중국 만주와 로씨야 연해주 등지를 망라한 전 민족적인 위대한 운동으로 평가된다. 3·1운동에서 각지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선독하며 독립을 선언하였으므로 정부가 수립되여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였다.

   림시정부가가장먼저수립된곳은로씨야연해주, 즉 로령의 울라지보스또크이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전로한족중앙총회가 3·1운동 후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선참 대한국민의회를 선포하면서 정부의 형태로 나왔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상해에서는 1919411, 상해 프랑스 조계지 보창로 32번지에서 각도 대의원 30명이 회합하여 림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림시헌장 10개 조를 반포하였다. 417일에 대한민국 림시정부를 정식 조직하고 선서문, 정강 등을 선포하게 되였다. 국내에서는 이에 뒤질세라 423일 서울에서 역시 13도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리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하는 한성림시정부를 선포하였다. 그후 이 3개 림시정부는 새로 통일된 모습으로 나타나니 상해에 기관을 둔 상해림시정부, 즉 대한민국 림시정부이다.

   대한민국림시정부의수립은, 유구한력사를통하여형성된민족정신의발로가 3·1운동이었으며 이 정신의 결정(结晶)이 림시정부(50)임을알리고있다. 따라서림시정부는한편으로는한민족의주권을대표하는기관이었으며다른한편으로는한민족의주권을  되찾기위한최고의독립운동기관이기도하였다.(51) 학자출신이고독립운동가인백암박은식(朴殷植, 18591925일찍림시정부수립의의의를두고직접자기의견해를피력한적이있다.

 

  우리민족은일본의기반을이탈하기위하여혁명운동을하고독립을세계에선포하였으며자결주의(自决主义)를 발표한 바 있다. 혁명사업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지 결과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고로 반드시 림시정부라는 최고기관이 잇어 국민의 표준이 되며 국교상의 지위를 갖도록 하여야 함은 세계혁명사의 관례이기도 하다. (52)

   1942년 이후 대한민국 림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선생은 3·1운동의 의의를 론하면서 3·1운동이 한국독립운동의 정신적 기초였음을 서술한 바 있다.

3·1운동은 한국민족의 부흥과 재생의 운동이였다. 바꾸어 말하면, 이 운동은 단순한 반일-복국운동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이 오천년 이래로 연마하고 양성해 온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이 이 운동을 통하여 다시 한번 발양됨으로서 민족부흥과 국가재생의 정신적 기초가 정립되는 운동이였다.(53)

상해대한민국림시정부가이같이 19193·1운동의 계승이고,  3·1운동의 결과물이고 현실의 최고기관이기에 서간도와 북간도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대체로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지도를 받아 들인다. 19191117, 서간도—남만의 여러 반일독립단체들은 류하현 삼원포에 모여 새로운 단체—《대한군정서》조직하고통일된행동을펼치게된다. 상해의 대한민국 림시정부에서는 북간도 왕청에 같은 명칭으로 된 대한군정서가 있기에 남만의 대한군정서를《서로군정서》부르도록하였다.(54)

1919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수립된 후 서일은 이 림시정부의 지도를 받기로 하고 191912국무원 205정신에따라중광단으로부터발족된대한정의단과대한군정회를통합하여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지령에 의해 그 명칭을《대한군정서》즉각개칭, 서간도의대한군정서를《서로군정서》명명한데비추어서일장군의대한군정서는《북로군정서》별칭을가지였다. 북로군정서의 탄생이다.

   신생한북로군정서는중앙조직체계를총재부와사령부로나누었다. 총재부가 주로 대한정의단의 중심인물들로 구성될 때 사령부는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였다. 사령부는 총재부의 절대적 지도를 받았으며 총재부와 사령부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대종교 교도들이였다.

   북로군정서의간부진영은아래와같다.

       

    부총재현천묵

    참모장리장녕

    사단장김규식

    려단장  

    련대장  

    련성대장리범석

    사관련성소장김좌진

   당시북로군정서는동북의조선인반일독립단체들가운데서가장정규적이고,  가장 많은 유력한 무장단체로서 500~600명 병력에 보총 500여 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무장단체의기전사가보면이들반일무장단체가일제놈들에대해무비의증오심을갖고있다는것을있다.

   하늘은미워한다배달족의

    자유를억탈하는왜적들을

    삼천리강산에열혈이끓어

    분연히일어나는우리독립군

    백두의찬바람은불어거칠고

    압록강얼음우에은월이맑아

    고국에서불어오는피비린바람

    갚고야말리라골수에  맺힌한을(55)

    ……

                            북로군정서는어디?

                                     1

   서일장군은북로군정서본부를왕청현서대파구십리평잣덕에설치하고산하사관련성소도부근에세웠다. 모두가 십리평 쪽으로 밀려가니 덕원리와 그 일대는 텅 비다시피 하였다. 19823월에 그 시절 왕청현성 왕청진에 가서 리만섭 등 로인들을 방문할 때 그들이 이같이 말하였다. 십리평은 지금의 왕청현 소재지 서북쪽인 덕원리에서 동으로 왕청하를 거슬러 100리 상거한 산간지대이고 잣덕은 십리평 마을 뒤 산기슭에 자리하고있었다.    

   헌데북로군정서의본부를두고개별적인저서와자료들은왕청현십리평이라고하고채근식의무장독립운동비사비롯한대부분저서와자료들은왕청현서대파라고하고있다. .

   서대파촌은왕청현성에서동쪽으로 25킬로메터가량 되는 곳에 자리 잡은 산간마을이다. 1989년 여름 필자 리광인의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연구소의 후배 동료 박경재와 같이 서대파 현지답사에 나서 보았다. 현성에서 뻐스를 타고 모래길 신작로 따라 약 한 시간만에 서대파에 이른 우리들은 서대파의 지리적위치에 그만 매혹되고 말았다. 서대파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는데 골짜기는 동서로 유유히 뻗어있었다.

  (군사적요새지로선제격이구나!

   우리는감탄을금치못하였다.

   서대파의산야를둘러보며흘러간력사의갈피갈피를되새기면서마을에이른우리는서대파마을로인들의이야기를듣고그만실망하고말았다. 당지 로인들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십리평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서대파가 본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군사적 요새지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찬탄해마지 않던 우리의 정열은 대번에 사그라졌다. 그래도 내친 걸음이라 우리는 서대파촌에서 20킬로메터 가량 떨어진 십리평 방향으로 가보았으나 안내자를 찾지 못한데서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2

   그후우리는다방면으로각종자료를헤아리며선색을더듬고일면왕청현에서다년현안의력사와교육사연구에전력해문호갑로선배님들을찾아뵙는가운데서북로군정서의본부는서대파가아니라왕청현십리평향잣덕이라는것을알게되였다. 개별적 자료들에서 본부를 십리평에 두었다고 하는 것은 다소 차이가 보이긴 하나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연변력사연구소연구원강룡권선생도관련자료들로보이는서일장군과북로군정서연구에서서대파냐,  십리평 잣덕이냐를 두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는장백산문학지(1990. 6)에 실은 글서일과그의후예들에서일부자료에따르면북로군정서는 ‘왕청현 서대파밀림’에 있었다고 기록되여 있으나 이것은 후세사람들이 알바 없는 몽롱한 제기법이다."고 지적하면서 "가장 준확한 대답이라면 다시 말해 ‘북로군정서 본부의 집터가 어느 곳이냐?’ 하는 물음에 해답한다면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의 북쪽 산기슭’이라고 대답해야 후세의 연구가들도 시름없이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찍어말하였다. 서대파, 십리평을 수차 찾으면서 리성규 등 로인들을 방문하는 가운데서 나온 결론이였다. 이는 필자가 강룡권선생한테서 직접 주고받은 이야기기도 하다.

   이러구러세월은살같이흘러어느덧 3년이 지났다. 1991127우리는십리평을다시찾았다.  먼저 십리평향 십리평촌에서 발길을 멈추였다. 도로켠의 지명패를 보니 "장영촌"이라고 박혀있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이 촌은 워낙 향소재지였는데 몇년전에 향정부를 태평촌으로 옮긴 후 1990년 마을 이름도 장영촌으로 고쳤다.

   장영촌과향소재지와의거리는 1킬로메터 반 정도밖에 안되였다. 우리는 이 구간을 걸으면서 십리평의 이모저모를 익혀두기도 했다. 그날 따라 매서운 칼바람이 일신을 사정없이 들이박았지만 북로군정서의 본영—잣덕을 찾아냈다는 희열은 우리의 걸음을 재우쳐 주었다.

   십리평향소재지에이르러서야우리는향의간부들한테서향안의경작지는 420헥타르로서 인구당 16.7아르 돌아가며 죄다 척박한 모래불 땅이여서 강냉이, , 조이의 아르당 소출은 내내 10킬로그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행정구역은 22개 사로 나뉘어지고 인구는 2887명에 달하는데 조선족은 겨우 20여 호밖에 안되였다. 광복전에 십리평이란 이 버덕안에 조선인 약 200호가 살고 있었다는 것에 비해볼 때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세대수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엔 필경 원인이 있을텐데?)

   우리의의문은 68살인 백원옥 안로인의 집을 찾은데서 스스로 풀리였다. 우리는 함경도식의 수수한 조선집 가마목에서 이 안로인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원옥은평안도순천군태생으로서그가십리평에들어선것은광복직전이였다. 그해 그는 18살이었는데 한해 먼저 십리평에 와 자리 잡은 시아버지를 따라 이주길에 올랐었다. 시할아버지는 10년대에 벌써 십리평사람이 된데서 백원옥으로 말하면 십리평이 그리 생소한 지대가 아니였다.

   당년십리평의조선사람은 200호에 달했다. 그때 이 일대는 밀림지대였다.  일제놈들은 여기에 큰 목재판을 설치했는데 조선사람 거개가 목재채벌과 가공판에서 막벌이일을 하고있었다. 큰 목재판이라 지금의 장영촌에 일본분주소가 도사리고 앉아 여기(향소재지)에 경찰대대를 세우고 사금구에 경찰소대를 세웠다. 19458·15광복을 맞은 후 조선으로 돌아가고 여기저기 흩어진데서 조선사람 수십호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20여 호로 줄어 들었다고한다.

                                      3

   십리평이란이름은언제부터생긴건지요?

   듣자니독립군때부터라오. 그때는 이 지대가 나무로 꽉 찼는데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소생했다더구만. 십리평이란 것도 이 벌의 길이가 10리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오

   그렇다면잣덕이란어디를가리킵니까?

   그젯날여기(향소재지)를 잣덕이라 했소. 보다싶이 저 북쪽 산기슭은 온통 잣나무로 덮였고 또 이 지대가 저 아래 십리평마을에 비해 언덕진 곳에 자리잡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오. 잣덕이란 지명도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지은 거라오.

   백원옥안로인과의이야기에서우리의시야는훨씬넓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해 전에 향소재지가 들앉기까지 이곳을 태평촌이라 했는데 그것도 광복직후 그의 시할아버지 조병선로인(당시 60여살)이 지은 것이다. 그때까지 이 일대의 사람들중에 중병으로 앓거나 때이르게 죽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해서 시할아버지가 태평촌이란 이름을 제기했는데 당지의 중국인들도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했다고 한다.

   마을가의서쪽언덕에오르니잣덕의북쪽산과펑퍼짐한산기슭, 그 아래 변두리에 자리잡은 향소재지의 전경이 눈앞에 환히 펼쳐졌다. 저기 건너편 북쪽산엔 그젯날의 잣덕유래를 나타내는듯 잣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었다.

북로군정서는바로이곳잣덕의북쪽펑퍼짐한산기슭밭가운데자리잡고있었다. 어느 한 자료에 의하면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 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 집 2개로 이루어졌다. 본부와 조금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사방 100메터 좌우의 련병장 두 개를 건설하였다. 독립군전사들은 이 두 개의 련병장에서 매일 긴장히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창격술을 익히며 실탄훈련에 뛰여들었다.

당년십리평에서잣언덕까지는소수레가다닐만한길이구간있고나머지는한사람이다니기도불편한오솔길이였다, 한데서 북로군정서는 숱한 인부를 동원하여 소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닦았다고 한다. 길을 내야 하는 원인은 주로 식량과 부식(副食) 운반때문이였다. 사관생의 주식은 좁쌀밥이고 부식은 산채와 물고기였는데 때로는 돼지고기와 소고기같은 육류도 있었다. 이같은 운반과 군사보급, 련락관계로 하여 매일 수십명이 이길로 오르내리였다.

  전체적으로, 지리적으로 보아 십리평과 잣덕 이 지역은 압록강, 두만강과 거리가 거리가 멀고   전략전술상 오지(奧地)로서 일제가 침입할 수 없었거니와 적 밀정의 출입도 다른 지역보다 어려웠다. 혹 밀정이 침투했어도 그를 처리함에는 방법이 달랐다. 구춘선(具春先)이 이끄는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등의 독립운동단체와 다른 독립군은 일제의 밀정을 체포하게 되면 흔히 여하불문하고 사형에 처하거나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면서 조선국내로의 진입작전을 전개했다. 그러했기에 일제는 주로 이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북로군정서는 그와는 달리 일제의 공격대상으로 되지 않음으로하여 전략상 후일의 무장독립전쟁을 강력한 근거지를 가질수가 있었다.

북로군정서는 자기 관할범위내에서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했다. 평균 30호를 1구(區)로 하고 18세에서 35세에 이르는 청장년들을 입대시켰는데 매개의 구(區)에서 15~20명을 징병하였으며 년령에 구애없이 능력자는 간부로 채용하였다. 그리하여 연해주는 물로 지어는 국내에서까지 지원자가 나선것인데 그들은 다가 독립군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면서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의 군대라고 자부하였다.

 

    나아가세 조선나라 독립군사야

     자유독립 광복할 날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기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사 락엽같이 쓰러지리라

   

     보느냐 반만년 피로 지킨 땅

     오랑캐 말발굽에 밟히는 모양

     듣느냐 이천만의 단조의 혈손

     원쑤의 칼아래서 우짖는 소리...

    십리평 산야에서는 매일 《독립군가》의 우렁찬 노래소리가 메아리쳤다.

사관련성소

 북로군정서의주체는반일무장단체이기에무장투쟁을이끌어가자면강력한군사소질을갖춘사관대오를키워야했다. 이 점을 깊이 터득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가 직접 지도하는 산하 사관련성소를 꾸리기로 결심하였다. 원 대한정의단을 위시한 지도계층 대부분은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거친 사람들이 아니기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역할을 잘 발휘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서일장군은 이 점도 잘 알고있었고 새로 모이는 무장단체 모든 장병들은 사관련성소를 거치기로 하였다.

사관련성소는잣덕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동북쪽 계곡에 설립했다고도 하고 잣덕에 설립했다고도 하며 본부 부근에 설립했다고도 하는데 딱히 어느 곳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사학가들은 자료를 놓고 의론할 따름이지 그 누구도 준확한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강룡권선생만이 잣덕에서 동북쪽 계곡따라 약 15리 되는 지점이라고 주장했다.

한동안의긴장한준비를거쳐사관련성소는 192031일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정규적인 군사훈련기지로 발돋음하고저 사관련성소 예비훈련반은 북로군정서 본부와 약 300메터 떨어진 남쪽의 조금 경사진 잣덕 평지에 교사 6(56)짓고운동장을넓게닦았다. 사관련성소 본부는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15(1리는 500미터) 쯤 되는 곳에 두었다.

사관련성소소장은신흥무관학교출신김좌진에게맡기였다. 그외 박녕희가 학도단장을, 리장녕, 리범석, 김규식, 양림, 김홍국, 최상운 등이 교관(57)맡았다. 사관생은 300여 명이었는데 주로 대종교산하의 청년들과 덕원리 명동중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졌다. 나이는 보통 20~40살 사이였다.  이때를 두고 필자가 왕청에 가서 방문한 리만섭 등 로인들은 덕원리 중학부의 학생들 거개가 북로군정서 사관련성소의 학생으로 넘어갔다고 말하였다. 한옹의 이름으로 정리된민국초기왕청현조선인교육개황(58)덕원리중학생들의전이를말하고있다.

  192031,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수요에 의해 (덕원리) 중학부 학생은 거래 북로군정서의 사관련성소 학생으로 편입되여 왕청 십리평으로 갔다. 개별적 학생은 소학부 교원으로 남고 어떤 학생은 무기운반대에 참가하여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재무 계화의 지도밑에 무기운반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였다.

   덕원리중학부중학생들의중요성을말하고있는부분이다. 중학부 주요과목의 하나가 군사훈련일진대  19193·1운동에서 중학생들이 칼을 차고 참가했다는 리만섭 등 로인들의 증언은 무장항쟁에 대비해 군사훈련을 중시한 서일의 위인을 리해하도록 가르치고있다. 사관련성소 과목으로는 군사학, 총검술 등이고 전투훈련을 실시하였다.교재는보명조전(步兵操典),축성교범(筑城教范,군대내무서,《야외요무령등을인쇄하여사용하였다. (59)

   북로군정서사관훈련소는명월구에있는대한국민회사관학교과마찬가지로매일 5시간이상 창격훈련을 보장하면서 배낭에 6관의 흙모래를 넣어 메고 군총으로 완전무장하여 산야 어느곳에서나 구보 혹은 도보행진을 했다. 그것은 실로 고된 군사훈련이였다.

   이 시절 북로군정서 사관련성소에서 사용한 병서(兵書)는 주로 신흥무관학교에서 인입한 것이였다.  하지만 김좌진은 병서에만 의거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 한곳을 공격하고는 후퇴하며 지구전으로써 적에게 손실을 주어냐 한다. ...한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의 무기를 빼앗고 한곳을 습격하여 한곳의 무기를 빼앗아야 한다. 우리의 전쟁의 비결은 지구전으로 적의 사기를 저락시키며 경제적으로 부담을 과중하게하는데 있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런 유격전의 성격을 띤 장기적인 지구전은 강적인 일제와의 싸움에 유용한 것이였다.

15만원 탈취거사 이야기

                                      1

   알다시피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은 적들의 무장탄압으로 끝나고 박문호 등 17(혹은 19 독립투사들이피못에쓰려졌다. 집회참가자들은 손에 무기를 잡지 못한것을 통탄했다. 그가운데서도철혈광복단단원으로이날의충혈대 결사대에참가한최봉설, 림국정,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이 더욱 그러했다.

   태극기하나만들고만세를불러서독립을한다는것은통분한죽음이다! 총을 들고 나서라! 총을 들고 나서서 원쑤도 갚고 독립도 하자!

   이들 6명 철혈광복단 단원들의 심장에서 터져나온 부르짖음은 인차 행동으로 번져갔다. 1920년 초에 연변을 들썽하고 그후에는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15만원탈취거사이렇게일어났다.

    15만원 탈취거사 이야기는 서일장군이 익히 알고 경험으로, 거울로 삼는 사실로서 이야기를 말하자면 당년의 연길현 와룡동으로부터 말해야 한다. 와룡동은 연길시안에서 10여 리 떨어진 서쪽의 한 골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동, , 서 삼면이 언덕에 둘러막히고 남쪽이 조금 열리여 그 길이는 어구부터 막바지까지 거의 5킬로메터는 실히 되는것으로 보인다. 골안지형은 룡이 서리고 누워있는 것 같았다. 이리하여 와룡동이라는 지명도 나왔겠다고 생각되여 한창 콩마당질을 하고 있는 마을 뒤집의 한 로인과 물어보니 과연 그렇다고 했다.

   로인은민흥4(와룡동)의 윤희섭(90년도에 55)로인이다. 로인네는 와룡동 개척때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할아버지때부터 따져도 100년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와룡동의 개척은 100년이 넘는다는 말이다. 윤희섭로인의 조상들은 조선서 와룡동골안에 이주한 후 그 자리에 귀틀집을 짓고 살았다고한다. 후에 한호, 두호 모여들면서 100여 호로 늘어나고 창동소학교(1908)까지 일어서게 되였다. 중학부까지 설치되여창동학원이라고부른것은 1912년이였다. 학원 옛터자리를 물으니 비석 건너편 언덕의 펑퍼짐한 밭가운데이고 15만원 탈취거사의 주동자인 최봉설의 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리는놀라움을금치못했다. 15만원탈취거사가 1920년초라 할 때 1990년으로 보면 장장 70년 세월인데 100년 력사를 기록한다는 커다란 집이 여전하다. 다만 옛날 바깥 퇴마루가 없어졌을 뿐 집안팎구조는 옛날 그대로였다.

   최봉설투사의옛집, 바로 이집에서 최봉설이 건너편 창동학원에 다니였고 바로 이집에서 최봉설이 피로써 나라독립을 찾기 위한철혈광복단(1914)에 참가했다. 15만원 탈취거사의 주동자 림국정도 이집에 유숙하면서 창동학원에 다니였다.

   림국정은워낙함흥사람이고그의어머니는예수교전도사이다. 국정의 어머니는 반일의 뜻을 품은 분인데 간도 룡정에 조선인반일지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 국정을 반일정신으로 키우고저 반일독립열이 가장 크다는 와룡동 창동학원에 아들을 류학시키였다.

   19155월 단오에 국자가에서 열리었던전간도조선학생운동회(부르하통하와 연집하가 모이는 합수목의 모래밭)에서 장래의 독립운동가들을 똑똑히 본 일본놈들은 창동학원과 소영자 광성중학교 등 학교의 진보적교원과 학생들을 박해,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이 이렇게 번지자 창동, 명동, 광성, 정동 등 4개 중학교의 철혈광복단원들은 분분히 왕청현 라자구에 설치된 사관학교로 달려갔다. 창동학원의 최봉설, 림국정, 한상호, 라일 등도 례외가 아니였다.

   이듬해(1916) 여름에 최봉설, 한상호, 라일은 제고장으로 돌아오고 림국정은 돈을 벌어 공부를 계속하겠다며 로씨야로 일하러 갔다. 최봉설은 집에 돌아온 후 와룡동에서 몇 리 되는 부르하통하 건너편 적안평촌 학교에서 체육교원질을 하며 아이들에게 체육과를 가르치는 한편 군사조련까지 시키려고 은근히 왼심을 썼다. 그때 독립정신을 키우기 위한 간도조선인교육의 골짜는 체육운동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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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봉설이림국정이를자기집에서다시만난것은 19193월 초였다. 그런 국정이와 같이 60~70리 길을 걸어 명동학교로 가니 수십 명 철혈광복단 단원들이 모이였다. 그번 비밀회의에서 최봉설이는 림국정 그리고 룡정의 윤준희, 명동중학의 박웅세 등과 더불어 룡정의 3·13 독립만세를 위한 충혈대에 가담했다.

   3173·13 수난자 장례식이 룡정 합성리 동산묘지에서 있은 후 최봉설은 국정, 상호, 라일 등 여럿과 함께 룡정의 윤준희네 집에 모여 무기 없는 자기네를 통탄하였다. 이날 그들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총을 잡고 독립의 길에 나서야 되는 현실을 더욱 절감하였다. 그러면서 총문제를 놓고 골몰하다가 룡정의 일본은행을 털자는 의견에 합치되였다. 하여 일부는 일본은행시탐에 나서고 일부는 돈을 모아 권총 등을 마련하기에 동분서주했다. 이 시기 그들은 여러 번 모여앉는 가운데서 은행을 터는 것은 현실적이 아님을 보아냈다. 왜냐하면 터는날 은행에 돈이 딱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조선은행회령지행룡정출장소직원으로근무하는지하공작원전홍섭한테서일본놈들이길회선부설경비로회령서룡정에일본돈 15만 원을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람을 띄워 룡정에 가서 시탐해보니 사실이 옳았다. 윤준희, 림국정, 최봉설,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 6명의 습격조가 무어진 후 와룡동의 최봉설의 집에서 15만원탈취거사를 주밀히 짜고들였다. 달라자 명동촌의 김하규댁은 그들의 비밀련락장소로 되였다. 김하규는 최봉설의 장인으로서 명동례배당을 거점으로 반일비밀련락사업에 나서고있었다.

   15만 원탈취계획이 무르익은 후 최봉설과 한상호는 와룡동에 있으면서 룡정에서 대기하는 윤준희와 림국정의 통지를 기다렸다. 192014일에 회령에서 룡정으로 떠난다는 전홍섭의 비밀통지가 전해지자 이들은 기타 4명과 함께 14일 점심 때쯤에 중국 학생복에 중국신을 신고 하승리(룡정시 광신향 승지1) 부근의 강변신작로에 나타났다.

   거사지점에서보면룡정에서남으로펼쳐진륙도하벌은여기서좁아지면서갈지자로향하다가동으로굽어들면서달라자명동촌과승지촌사이관문으로되는선바위가환히안겨온다. 거리는 하승리에서 약 5킬로메터는 된다고 한다. 승지촌은 물건너 동쪽 2킬로메터 지점에 있다. 이때에야 우리는 당년 투사들이 선택한 지리적 위치가 독특하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거사 후 와룡동, 의란구를 걸쳐 로씨야 땅으로 가야 했으니 동쪽의 달라자나 서남쪽으로 뻗은 동양 하승리 건너편 부처골쪽은 취할 바가 못 되었고 룡정쪽은 더구나 말도 말아야 했다. 4개 방향은 일본놈들이나 중국 측 군경 경계가 삼엄하고 불리한 생소땅이어서 제일 좋기는 하승리 아래마을 재암촌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재암골로 빠지다가 동성참, 해란강을 거쳐 와룡동, 의란구로 가는 것이였다. 이점을 그네들은 똑똑히 보아내고 사전에 길들을 모두 익혀두기까지 했었다.

   장소를택한것은우에서와같이사전에밀모하였다. 습격지로는 오랑캐령이 좋지만 놈들이 오랑캐령에 이를 때는 낮이여서 행동하기 불편하고 멀리 전이하기도 불리했다. 가장 좋기는 해질 무렵이나 어두운 때이다. 이때면 놈들이 승지촌을 지나 여기에 이를 것이고 또 주위에 10여 호 되는 조선인 산재호들이 있고 길가에 주막집도 있어 술을 마시는 척하며 행동하기도 좋을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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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승리부근에서이들 6명은 두패로 나뉘어 길에서 무질서하게 오가는 척하면서 습격자세를 취해보았다. 자신이 있을 때 그들은 부처골어구에서 5킬로메터 밖에 있는 합성리공동묘지로 향했다.

   해질무렵박웅세와김준청년이하승리부근주막집의한방으로들어갔다. 그들 둘은 자기 패들을 기다리는 척하면서 자주 바깥에 나가 회령쪽 길을 살피였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긴장한 속에서 마음이 한결 죄어드니 곁방에서 술군들이 떠들며 놀아대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들린다면 심장에서 울려나오는 뜨거운 숨결소리 뿐이였다.

   얼마김준이밖에나갔다가급히들어서며나지막히웅세와말했다.

   온다!

   온다구?!

   일면긴장하기도하고일변반갑기도시각이였다.

   때는오후 6시경, 어둠의 장막이 대지를 포근히 감싼 뒤였다. 전날 새벽 5, 룡정주재 간도일본총령사관 순사 나까도모와 조선인 순사 박연흠은 길회철도부설 전용경비 15만 원 수송임무를 맡고 룡정을 떠났고 그날 오후 6시에 회령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오전 8시반에 귀로에 오를 떄 은행 직원 하루구찌와 김용억, 회령의 조선인 상인 진길풍이 동행하였다. 15만 원 현금꾸레미와 기타 물건은 말에 실었다.

   오후 2시에 신흥평에 이르러 다리쉼을 하고 다시 길을 조이던 중 룡정에로 우편물을 수송하는 한 일본인이 행렬에 끼이였다. 현금을 실은 말이 앞서고 우편물을 실은 말이 뒤따랐다. 은행직원 김용억과 진길풍, 나까도모가 말을 따랐고 우편물수송원 가지하라와 은행직원 하루구찌, 조선인순사 박연흠이 각기 그 뒤를 따랐다.

   박웅세와김준이술집에서나와비청걸음을해댈마지막말이그들을지나쳤다. 두 사람이 말뒤를 따르며 중국어로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는데 저 만치에 최봉설, 림국정, 윤준희, 한상호 네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역시 중국어로 이대로 가다간 언제 룡정에 들어서겠느냐며 말행렬의 왼쪽 옆에 다가섰다. 이때 네사람이 서로 길을 피하며 코말에 접근했다. 멀쩡한 놈들은 룡정쪽에서 오던 패와 룡정쪽으로 가던 패들이 술을 거나하게 마이고 다투겠거니만 생각했다.

   찰나코말에다가선넷이제꺽손을쓰며말탄놈들을사격했다. 나까도모가 가슴과 왼손관절에 관통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지자 그들은 총탁으로 놈의 이마를 부셔놓았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조선인 상인 진길풍은 길손의 도움을 받아 그날 저녁으로 룡정에 호송(구급치료중 이튿날 오전 11시에 죽음)되였다. 김용억은 강을 건너 승지촌에 숨어버리고 가지하라는 내꼴봐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하루구찌와박연흠순사가동량어구촌에달려가중국순경들에게알려현지에다달았을때는나까도모가이미절명하고현금과우편물을실은말들이자취를감춘  뒤였다. 뒤미처 룡정 총영사관의 10여 명 순사가 다달아 현지를 샅샅이 수색하니 자루가 부러진 구식렵총 한자루와 우편물 네 개가 눈에 띄일 뿐이였다.

   사건이벌어진웅세와준이는즉각명동촌으로떠나갔다. 새날이 밝으면 웅세는 장가를 들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여 있었다. 이들 둘의 과업은 거사가 실현된 후 모집중에 있는 종군간호부 처녀들을 데리고 연해주로 가는 것이였다.

   준희와봉설이는하승리굽이를지나말을지체없이재암골로몰아갔다. 재암골치기 동성참 산속에서 다급히 짐짝을 헤치니 일화 15만원이 옳았다. 순간 그들은 심장이 툭 멎는 것만 같았다. 이 시각을 위해 그들은 그 얼마나 많은 나날들을 긴장히 보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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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은각일각깊어갔다. 헌데 와야 할 국정이와 상호가 나타나질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두사람의 마음을 휩쌌다. 방정맞게도 말들이 이따금 소리를 지르는데 웬일인지 그 소리가 몸서리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말들을 쏴죽이자느니 죽이지 말자느니 하며 옥신각신하는데 삭정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국정이와 상호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 둘은 말을 놓치고 줄창 걸어왔던 것이다.

   이들넷은말들을나무에매어둔채각기돈짐을나누어지고다시길을떠났다. 여기서 와룡동까지 돌아서 약 80(40킬로메터) 길인데 기어이 날밝기 전에 와룡동에 가 닿아야 했다. 그들은 거의 달다싶이 하였다. 목에서는 겨불내가 콱콱 나고 땀이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들은 내처 길을 조이기만 했다.

   이러구러해란강을넘고삼봉동을지났다. 조양천 부근에 이르니 뉘집에선가 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부터 5킬로메터 되는 길을 기다시피 하면서 걸어 끝내 부르하통하를 건너 동틀 무렵에 와룡동마을 서산너머에 가 닿았다. 상호의 아버지와 봉설의 아버지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약속한지점에서쉬고난그들은다시길을다그쳐저물녘에의란구의산속귀틀집에들어섰다. 거사를 목적으로 이미 전부터 이 산속에 와 집을 짓고 대기하고 있던 한 철혈광복단 단원이 그들을 뜨거이 맞아주었다. 이 단원은 그 사이 이미 로씨야 뽀씨예트의 조선마을 지신허까지 다녀오며 길을 익혀 두었었다. 검거선풍을 피하여 두어 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돈을 가지고 연해주 울라지보스뜨크로 가는 것이였다.

   15만원 탈취거사 후 간도 전 지역에 걸쳐 대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결과 국자가 관할 내의 와룡동이 거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국자가 령사분관의 주임이 연길도윤과 교섭한 끝에 일제총령사관과 국자가분관의 경부 2명이 지휘하는 순사 37명과 중국 측 군경 57명을 거느리고 와룡동에 달려들었으나 헛물만 켰다. 악이 난 적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60)

   이것이이땅에서의 15만원탈취거사의 전후과정이다. 와룡동과 룡정을 경유하여 하승리부근의 현지답사까지 마친 우리는 내내 흥분 속에서 빠져나나지 못하였다.

   의란구산속에서두어주일머무르다가귀틀집주인의안내하에눈위모닥불곁에서사흘밤을새고나흘만에연해주뽀씨예트의지신허에이르자던그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마을 신한촌에 가자던 그들, 신한촌에서 15만원 돈을 가지고 홍범도장군이 계시는 추풍 덩어재골로 가서 그의 휘하에서 무기를 사고 즉각 군대를 편성하겠다던 그들, 신한촌서 열린 조선인 독립단체회의에서 연해주 수청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연변의 라자구에서 군대를 편성하자는 결정을 지었을 때 그것이 벌써 다 성공된 것처럼 그토록 기쁨에 차있던 그들을 우리는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그네들이 신한촌에서 무장독립과 승전을 약속하면서 불렀던 노래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 했다.

    이천만의동포야일어나거라

    일어나서총을메고칼을잡아라

    잃었던자유와너의권리를

    원쑤의손에서도루찾도록

    나가라싸워라대승의월계관

    네게로오도록나가라싸워라

    … …

                                            5

   서일장군은북로군정서의조직선을  통해 15만원 탈취거사의 전후관계를 자상히 알고있었다. 그는 이를 자기들이 꾸리는일민보신국보싣도록하고우리도 15만원  탈취거사에 참가한 그네들처럼 소속단체는 달라도 모금활동과 무기구입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왕청현의 리만섭 등 로인들이 필자에게 들려준 서일관련 이야기다. 로씨야 연해주의 무기구입과 운반 과정에서 서일장군은 이 이야기를 수차 꺼내며 수하인원들을 독려하였다고 리만섭로인은 말하였다. 연변의 반일투쟁이 적극적인 반일무장투쟁으로 번져갈 때 최봉설 등 6명 철혈광복단원들의 거사는 반일무장단체들의 군자금 모집과 무기구입에 더없이 귀중한 경험을 보여주니 그럴만도 한가부다.

   : 연해주조선인독립단체의배합밑에총구입이란큰일이바야흐로성사될무렵그만최봉설등의비밀이탄로되여음페지점이드러났다. 낌새를 챈 일본놈들은 신한촌의 주숙지를 돌연습격했다. 이 습격에서 적의 시선을 자기한테로 끌며 동지들을 구하겠다며 선참 문을 박차고 나간 최봉설이 구사일생으로 포위를 돌파하고 나머지 셋—윤준희, 림국정, 한상호는 불행히 체포되여 청진감옥에 압송되였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독립투사들이청진감옥에투옥된연변과연해주의반일독립단체들에서자기동지들을구출하고저각기권총과수류탄을휴대한박웅세, 김준, 렴길룡 등 셋을 조선 청진으로 파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연해주울라지보스뜨크일대의독립단체와독립투사들도적들의무자비한탄압을당했다. 팔의 상처를 치료한 후 최봉설이는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 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로씨야 백파군과 싸웠다. 그후 그는 치따당학교에서 레닌의 교시를 직접 들었고 한때(1920년대) 돈화현 액목일대와 왕청일대서 반일투쟁에 종사하기도 했다.

1956년에 최봉설은 고향인 와룡동을 찾아 창동학원 옛터를 돌아보면서 옛 전우들을 그리였다. (후에 그 시절 쏘련서 사망) 19905월에 최봉설투사의 맏아들이며 원 연변총공회 주석 최동현(그때 73)과 그의 부인, 최동현의 친동생이며 쏘련 우즈베크 공화국 따슈껜트시 꼴호즈총공정사인 쏘련공민 최단일(그때 53)과 농예사인 그의 부인 한짜라(그때 50), 최단일의 아들 최리쨔(그때 15) 등이 연변에 친척방문을 왔던 차에 력사부문과 항일 로선배들의 동행하에 15만원 탈취거사지점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