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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평전9     제9편  대한정의단


9편 대한정의단


서일의 상해행


1

   서일과 조성환이 림시정부문제를 놓고 뜨거운화제로할때마침 상해의 법조계보창로(法租界寶昌路) 있는 림시정부 주비사무소로부터 림시정부수립에 관한 회의가 열릴것이니 속히 출두하라는 통지가 왔다. 이리하여 서일과 조성환는 4월을 잡자 갑자기 서둘러 상해행을 하게되였다. 계화도 함께갔다. 이들 세사람 림시정부에 들어가 주역할을 사람은 물론 조성환이였다.

   무장인원 10명이 그들을 장춘까지 호송했다.

   장춘역에서 세사람은 관내로 향발하는 렬차에 올랐고 호송해간 사람들은 그들이 타고 말을 갖고 돌아섰다.  그들 일행은 렬차로 봉천, 안동이르고  안동에서배편으로상해행에올랐다. 이때의 일행은 서일, 조성환, 계화, 황학수 네사람이였다.

   황학수(黃學秀)는 안동 압록강어구에서 배를 만난동포사나이다. 나이는 당년 41살이였다. 한배에 올라 같이가면서 여러말이 오가는 사이 어느덧 친해졌고 그러다보니 서로 믿어워보였던지 그는 자진하여 자기를 자세하게 소개하는것이였다.    

   《본신을 놓고 보면 본관은 창원이오나 태여나기는 충북도 제천군 본제입니다. 8살때부터 한문서숙에서 15년간을 수업하고는 경자(庚子), 그러니까 나이 22 무관학교에 입학해서 졸업을 후에는 56년간을 육군참위로 복무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미(丁未) 군대가 해산되니 털털이 신세가 되여 그만 사직귀성(辭職歸省) 하고만거지요.》

그도상해림시정부일로가는걸음, 이들 네사람이 타고가는 배는 《이륭양행호(怡洋行號)》였는데 배의 주인은 영국사람이였다. 그들은 배에 오른지 꼬박 4일만에야 마침내 상해포동부두(上海浦洞碼頭) 도착했다. 떠나올 만주는 아직 땅도 녹지 않았지만 여기는 록음이 짙어 완연 다른절기같았다.

  조성환일행은 먼저 주숙부터 잡아놓고나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보창로에 있다는 독립림시사무소에 가보니 사람들이 가득차서 벅작거렸다. 겨우 현순이라는 총무를 만나서 만주 왕청에서 오는 사람들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등기부에 등록한 다음 자리를떴다.

   이젠 신규식을 찾아가야했다. 상해로 그들이 여기와서 면목알고 가까운 사람은 오직 그뿐이였다. 무오독립선언서 서명 신규식은 원명을 쓰지 않고 신성(申聖)이라 교명(敎名) 썼다.

   그는 서일보다 나이가 많거니와 대종교가 중광하자 맨먼저 입교한 사람이다. 그러니 교령(敎齡) 놓고 봐도 서일보다 3년이나 더많은 것이다. 신규식은 서일이 입교하기 전인 신해년에 벌써 지교(知敎) (秩) 초승(超陞)되여 대종교본사 경리부장과 종리부장을 력임하였었고 그해의 겨울에 상해로 이주하면서 해외의 시교(施敎) 스스로 책임진 것이다. 1914 5월에는 상교(尙敎) 승질(陞秩)하여 시교사(施敎師) 되였다. 지금 대종교의 서도본사를 책임지고있는 그는 상해에서 포교로써 교포사회를 묶어 세우는데 성공했거니와 대종교사업의 일환으로 상해에다 박달학원(博達學院) 설립하여 교포 청년들이 중국과 구미 각급학교에 진학할 있는 예비교육을 시키는 한편 또한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그는 중국 각지의 실력자들인 리열균(烈均), 당계요(唐繼堯), 정잠(程潛), 로영상(永祥), 왕탁부(王卓夫) 등과 련락하여 우수한 청년을 뽑아 보정군관학교, 오성상선학교, 호북강무당, 운남강무당, 운남군관학교 등에 보내여 장차 독립군의 주력이 되여 그를 이끌고 나아갈 군사인재를 배양하고있었다.

2

   조성환, 서일 네사람은 박달학원을 찾아가 거기서 마침 신규식을 만났다. 신규식은 여러날을 내내 림시정부수립을 위한 준비공작을 협조하느라 뛰여다니다가 쯤이 생기니 박달학원에 전에 교수로 초빙해온 농죽(農竹), 모대위(毛大衛) 사람과 만나 교학문제를  놓고 담화하고있는중이였던것이다. 온다는 전보도 치지 않고 문득 나타난지라 저으기 놀라면서 일어나 반기였다. 신규식은 량쪽을 인사시키면서 농죽은 중국국민혁명의 선구자(先驅者) 모대위는 미국화교(美國華僑)라고 이쪽에 소개했다.

   신규식이 주숙문제를 꺼냈다. 숙소를 자체로 잡았다는 계화의 말에 신규식은 낯색까지 변했다. 이 동생이 아무리 못난들 잠자리 하나 드리지 못할까봐 그러는가며야단을 떠는통에 그들 네사람은 조용한골목의《몽래춘(夢來春)》려관에다 잡았던 주숙예약을 당장 물리고 신규식의 집에서 류숙하게 되였다.      

   신규식은 이번 림시정부를 성립하는 일로 로씨야와 일본과 구미 등지에서 왔거나 이미전부터 와있는 사람을 합치면 거의 1천명은 잘될것이라면서 이제 개회를 하면 뜻대로 순리롭게 진척될지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어느모로 보나 믿음직하게 초창기 림시정부를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맡아하고있는 그는 림시정부의 기둥이였다.

   이틑날 오전에 리동녕과 리시영이 상해로 왔고 저녁켠이 되여서는 신채호도 도착했다. 신채호는 서일을 만나자 기뻐서 포옹했다. 종사께서는 회의에 내놓을 어떤 좋은 의안을 갖고오셨는가고 신채호가 묻자 서일은 회의에 불참할 생각이라고 했다.

   《조선생도 나와 함께 오시였소. 이제 김동삼선생도 리시영선생도 올거구 조완구, 박찬익이도 올건데 거기에 신성하고 단재선생까지 하면 대종교인으로 참가수가 적은 축이 아니잖소. 교리연구나 깊이하면서 어서 무장준비나 생각뿐이요.》

   《아니 그래 림정창립에는 아예 참여를 않으시렵니까?》

   《나의 의사를 형제분들이 반영해주구려. 그러면야 참여한것과 다를바뭐겠소. 온김에 여러 지사들을 만나 독립진의 실태나 자세히 알아보고 돌아갈가하오.》      

    담음날 김동삼과 조소앙이 함께 왔고조완구도 도착했다.

   서일은 독립운동에 선줄을 끌고있는 인사들 가운데서 손꼽히는 거물급인물들을 하나하나 거진만나보고 담화도 나누어 보았는데 림시정부를 조속히 세워 유일한 민족정부로 만들자는데는 주장이 일치하나 림시정부가 복벽() 되느냐 공화(共和) 되느냐에는 견해나 립장이 조금씩 엇갈렸다. 그러나 그것은 큰문제 없이 해결될 같았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은 물론 중국에서 이미 일어났던 신해혁명이나 로씨야의 10월혁명이 앞으로의 방향이 무엇임을 시사해주고있었으니말이다.

   며칠안되여 4 10일이 돌아왔다. 서일과 계화는 상해시의 야경을 구경할 프랑스조계의 김신부로(神父路)에서 림시정부수립을 위한 림시의정원(臨時議政院) 개회된다니 회장의 외모라도 한번 구경하고 돌아가자면서 나섰다. 이때는 대지에 이미 어둠이 깔리는 밤이였는데 출입문가에서 외인의 출입을 막느라 파수를 서는 사람들 하나가 집안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하는 말이 회의장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다는것이였다.

   한데 이틑날 정오가 거의 되여 무렵 그들은 먼저 집에 돌아온 신규식으로부터 험악한 소리를 듣게되였다. 간밤 29명의 의원이 참석하에 시작된 회의가 진행중 평정관(評定官) 신채호가 의견충돌로 청년들에게 감금당하는 변을 당했다는것이였다. 알고보니 리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하는 문제를 놓고 론쟁이 벌어졌는데 신채호가 절대 안된다, 미국 월슨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하였던 사람을 어떻게 수반으로 앉힌단말인가, 2천만의 국민중에 그의 령도를 바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들고일어났다.

  했으나결국은리승만이선출되고말았다. 분노한 신채호는 퇴장을 한다며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가 소동을 피운다며 당한 모양이다. 이때 신채호가 조성환이와 같이 돌아왔다.

   서일은 나오는 웃음을 거두고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나와 계화형은 회의상황을 다소들었소. 밸을 부렸다며. 옳았소. 주장이 옳다면야 끝까지 내뻗혀야지. 남에게 통치권을 맡기자는 사람이 민족자결심이 있으면 얼마있겠소. 리승만이 정녕 그런 사람이라면 나도 못믿겠소.》

   소동을 일으키면서도 회의는 밤을 지새우면서까지 계속진행되여 이날 오전 10시에 이르러 끝맞히였는데 림시헌장을 의결하고 정강을 공포하여 이로써 대한민국림서정부 수립을 보게 것이다.    

 

남만을거치다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탄생이다. 서일이 왜서 말타고 기차가고 배타고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수천리 머나먼 길을 허우적이며 왔던가? 바로 결실을 눈으로 보기위함이 아니였는가. 림시정부는 무력적인 독립항쟁을 주장한다고 하니 욕망과 맞아서 기뻤다. 허나 그것이 아직은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아서 정부로서의 구실을 여하히 하겠는지가 의문이였다.

   서일과계화는 만주로 돌아가기로했다. 조소앙이 황학수를 따라서 그들을 보러왔다. 그는 서일을 만나자마자 상해까지 와갖고 왜서 회의장에는 나타나지 않았냐며 섭섭함을 표명했다. 서일은 자기는 계화와 같이 림정이 세워지는 과정을 보러왔지 직접적으로 관여하려는 마음은 없었노라 짤막히 해석할 다른말은 삼갔다.

   황학수가 대한정의단에가입하겠다고따라나섰다. 일행 셋은 상해 포동부두에서 배에 올랐고 안동에서 렬차편을 리용했다. 그때 남만에는 박장호(朴長浩)을 총재로하여 갓 창립된,  남만 조선인 각 단체들의 단일기관대한독립단이활동하고있었는데그들의립장이나방향이서일이주장하는바와같았다.

   남만의 류하현 일대에는우리동포들이많이살고있었다. 리회영 형제들이 개척한 삼원포는 지어 조선사람들의 독점거리마냥번화하기까지 했다. 가계와 점포들이 제법 갖추어졌다. 그럼에도 독립단총재부는 상상외로 이영을 일개 평범한 가옥이여서 간판만 내걸지 않았더라면 찾아내기조차 어려울지경 초라한 모습이였다. 하지만 이런 속에서도 사업은 자못 활기를 띄고있음을 느낄 있었다.

   박장호총재는 서일일행을 뜨거이환영했다. 그는 호가 화남(華南)으로서 황해도사람인데 서일이 세상에 태여나던 1881년에 조신(朝臣) 왜적과 수호(修好)하는 것을 류린석, 홍임홍, 유기일 등과 함께 상소하여 항쟁하였고 1905년에 홍천에서 기의하여 관동의병의 령도자로 전과가 혁혁한 로장이였다.            

   그는 초면인사가끝나자박장호는지난해중광단이주축이선언서를보았다면 무오독립선언이 이룩한 공적을 긍정하여나섰다. 그와는 상반대로 비폭력을 주장하고 나선 독립운동가들의 립장에 의심을 품으면서 지어는 어디 주먹만들고 싸워 나라가 독립이 되는가 두고 보라면서 격분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왔건만 홍범도는 보이지 않았다. 서일은 박장호가 홍범도와도 사이가 좋고 밀접하며 함께 협력하면서 싸워왔음을 알고있는지라 물어보니박장호의대답또한로장답다.

   《 사람의 뒤를 뉘가쫓겠소. 금방 곁에서 자는 같다가도 어느새 산너머가서 불질을 해대는 사람인데. 맹랑하네. 하루만 일찍와도 만났지. 어제오전까지 여기 있다가 조맹선이랑 윤세복이랑 무송으루 간다면서 떠났지.》

   서일은 이번에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격강(隔江) 천리라, 같이 만주땅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니 아득히 먼거나 뭐가 다른가 하면서 몹시섭섭해했다. 홍범도역시 나젊은 서일이 그리워 외우더라고 박장호가 알려주었다.  

 

   새로운생각

대종교와 기독교간에 점차 종교적모순과 갈등이 생겨 그것이 수면에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현상은 주로 기독교도와 대종교도가 혼합해서 살고있는 마을에서 표현되였다. 대종교도들이 자기들은 시교회에다 군자금을 내고있으니 2중으로 낼수는 없지 않으냐며 국민회의 모금에는 거절한 것이다. 그런다고 국민회는 그렇다면 좋다, 너희들이 자치권내에 들어있다해도 보호를 책임질수 없다며 무관하거니와 어떤데서는 지어 대종교도의 땅을 빼앗고 마을에서 쫓아내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심정이 불쾌한 서일은 혼자소리로 뇌이면서 김성이 방금 가져다 놓은  《한족신보(韓族新報)》 펼치였다. 그것은 남만 한족회의 기관지로서 만주에 있는 여러 독립기관에까지 배달되고있었다. 4월말에 상해림시정부에서 문서를 보내여 단독행동을 취하지 말고 림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이 좋겠으니 대표를 파견하여 협의하자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일이 기억난다. 이에 한족회에서는 윤기섭을 상해에 보내여 협의한 결과 국제외교상 망명정부의 위치는 상해로 하는것이 좋겠다는것과 만주는 무장독립운동의 적격지이므로 여기에다 림시정부직할의 군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론되였다.

   남만에서 군정부가 조직되면서 동시에 교포의 자치기관으로 발족한 한족회는 교민 1천호마다 총관(總管) 1, 1백호마다 백가장(百家長) 1, 10호마다 십실장 1명을 두였다. 한민회는 부민회의 제도와 사업을 확충한 개조체로서 중앙에 총장을 두고 지방에 총관을 두었는바 중앙기관은 삼원보에 두고있다. 정무총장은 리탁()이였고 기관지로 《한족신보》 발행하고있었다.    

   《따라배워야지, 민생을 위하는 자치기관으로 조직체계가 구전하니까!》

   서일은 은연중 부르짖으면서 중광단때보다 훨씬 확장된 정의단을 그저 일반적인 반일민중단체로만 그칠것이 아니라 차라리 군단(軍團) 갖춘 독립적인 교민자치기관으로 만드는 것이 좋지 않을가 생각했다.

   이때 조성환이 씩씩한 젊은이 하나를 데리고 느닷없이 나타났다. 지난해 11월에 여기서 독립선언서 서명할 보고 다시보는안중근의 동생 안정근(安定根)이였다. 그는 상해림시정부의 순시원이.

   《내가 안의사를 다시만나는 같구만. 이렇게 와주니 반갑소!》

   서일은 그의 손을 굳게 잡고나서 조성환쪽으로 다시돌아섰다.  

   《저는 선생님께서 림정요원이 되였으니 이젠 못만날줄로 알았는데요.》

   그가 상해림시정부 군무차장이 된것을 서일은 요즘에 알았다.

   《림정간부가 됐다고 들어앉아있겠소. 나는 더구나 군무차장이 된지라 만주에서 조직되고있는 여러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의 실태를 누구보다 알아야할것이요. 그래 정근이와 함께 순회를 나선거요.》

계화가 조성환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보러왔고 현천묵이와 리홍래도 그를 보러 단장실에 왔다. 계화는 조성환 등과 우스개소리를 주고받다가 서일과 백포 스무필을 먼저 사왔는데 무슨 색깔을 들이면 좋을가고 청시하였다. 서일이는 떡갈나무색이 자연에도 어울리고 좋을것 같다고 하고 조성환은 군복을 만드는가고 물어온다. 서일은 그렇다고 말하면서 천방백계를 다해서 우리의 군단을 정규균으로 꾸리겠다고 터놓는다.

10대의 오누이

 

   산촌마을의 아침 대기는 참으로 맑기도하다. 서일의 안해 채희연은 롱짝에서 차곡히 개여진 광목적삼을 꺼내여 남편앞에 내놓으면서 갈아입게 하고는 식솔들이 입던 옷가지들을 거두어 함께 함지에 담아가지고 빨래하러 앞내가로 나갔다.  

어제까지 정의단무장대원들의 옷을 빨래해준 그녀다. 마을에는 지난해 가을부터 계화와 정해식이 로씨야에 가서 좁쌀 5마대를 주고 바꾸어 재봉기 다섯틀로 피복공장을 세워 전문 대원들이 입을 복장을 만드는 20여명의 부녀로 조직된 자원봉사대가 따로 있어서 그들의 빨래까지 전문 담당하고 있었다. 채희연이는 제집의 농사일을 비롯하여 가무를 혼자 떠메다시피 하면서도 짬만 나지면 자원봉사에 나서군했다.  

   나이가 어느덧 11살이 아들 윤제는 네살 우인 누나 죽청이와 여러해동안 마을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보살핌을 받았다. 한데 죽청이가 중학반을 졸업했으니 이젠 누나의 보살핌을 전처럼 받을수 없게 되였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건 없다. 이제는 소학교 5학년생이 됐으니까. 윤제는 총명한 애였다. 명동학교에도 한문과(漢文課) 설치되여 학생들이 넙적글을 배우고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차지 않은지 윤제는 옥편을 펼쳐가면서 기타의 서적들을 즐겨보았다.

   이날은 방학첫날이였다. 학교로 가지 않고 집에서 놀게 윤제는 아버지가 손수 지은《회삼경》 눈에 띠이자 그것을 쥐여 펼치였다.

       

    夫施不適量非仁也, 裁不中度 非智也, 行不稱權 非勇也.
부시불적량 비인야, 재불중도 비지야, 행불칭권 비용야.

 

윤제는 한글자 한글자 뜯어 읽었다. 소경이 담벼락을 만지는 격이였다.  죽청이가 옆에 있다가 귀담아 들어보니 구절구절을 생생하게 되새겨지는지라 아버지가 번역해준 그대로 뇌이였다.

   《대저 베풀되 되질에 맞지 않으면 어진 것이 아니요 자로 재되 되질에 맞지 않으면 지혜로운 것이 아니며 행하되 저울질에 맞지 않으면 날램이 아니네라.》

   《누나야, 건데 이건 어떻게 번역하나?》

   죽청이는 동생이 손가락으로 짚는 글자들을 읽으면서 번역한다.

   《《是故 推小及大 恕之至也 시고 추소급대 서지야>
   그러므로 작은 것을 미루어 큰것에 미침은 용서함이 지극한 것이오,
   《矯枉質直 識之審也 교왕질직 식지심야>
   굽은 것을 바루어 곧게 함은 분별함이 자세한것이오,
   《舍輕持重 義之決也 사경지중 의지결야>
    가벼운 것을 버리고 무거운 것을 가짐은 옳음의 결단이니라.》

    그는 아래에 이어진 문구마저 계속읽으면서 번역했다.

   《되질함은 범위가 있고 잣대질함은 거리가 있고 저울질함은 표준이 있나니 범위를 정함은 중심을 세움에 있고 거리를 미루어 아는 것은 위아래 사방을 맞춤에 있고 표준을 세움은 중간을 잡음에 있느니라.》

   윤제는 두눈을 크게 뜨고 누나를 대견스레 보는 같더니 머리가 엉뚱하게 돌아져 어디 얼마나 아는가 볼까고 등사로 초판된 경서의 전부를 한장 한장 번져가면서 읽고 번역을 외우라고 했다. 그랬다가 그는 되려 괘씸한 애야 모르거든 허심하게 배울 념은 안하고 버릇없이 노는거냐 하고 꾸중을 듣고말았다.

   윤제는 히죽 웃어 무안스러움을 뭉때리면서 물었다.  

   《누나야, 이건 아버지께서 지은거 맞지?》

   《맞잖구, 백포 서일지음이라잖았니.》

   《듣른사람 이걸 제대로 번역하자면 무척 힘들꺼야, 그렇지?》

   《물론이지. 직접 지은이를 내놓고는.》

   어느덧 시간이 가서 어머니가 빨래함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죽청이는 그제야 어머니의 일손을 돕지 안았다는걸 깨닫고는 스스로 미안해하면서 밖으로 달려나가 씻어 빨래를 함께 바줄에 널었다.

                      대한정의단과김좌진초빙

 

1

19194월에 서일장군은 원 중광단의 토대위에서 대종교 교인들을 핵으로 하고 반일의병들과 공교회(孔教会)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대한정의단발족하고단장으로취임하였다. 이 과정에 나아갈 방향과 정체(政体)로 갈등을 빚으며 의견을 달리하던 공교회의 대표적 인물들이 물러서기도 했지만 대한정의단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서일은 정의단 내에 순수 우리 글 신문일민보(一民报)신국보(新国报)를 꾸리고 무장항쟁을 고취하면서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을 이루였다. 이 비밀결사대가 서일이 1919년에 국자가에서 대종교도 중심의 비밀결사—자유공단(自由公团)을 조직했다는 것과 같은 비밀결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일의 이름과 영향은 막강했다.

서일장군은이해 87일에 대한정의단 산하에 순 무장조직—대한군정회를 조직하면서 19181113일 무오독립선언에 이은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위로신성의영광을조정에돌리려거든아래로노예의욕됨을자손에게남겨주지않으려거든때를놓치지말라. 이 몸을 생각하지 말라. 한몸을 순(殉)하여 1백몸이 속죄함은 인도의 원훈(元勳)이니라.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를 살림은 정의의 공덕이니라. 누가 살려고 하지 않으리오만은 노예로 사는 것은 생의 치옥이요. 누가 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리오만은 신성하게 죽는 것은 사(死)의 영광이니라.

우리동포대한의남매여! 지모가 있는 자는 지모로, 용기가 있는 자는 용기로, 기예가 있는 자는 기예로 각자 능력을 다하여 나서며 무기가 있는 자는 무기를, 양미가 있는 자는 양미로, 금전이 있는 자는 금전으로 각자 힘을 다 하여 내놓아서 공적(公賊) 일본을 토멸하여 천하의 공분을 씻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을 공고히 하며 만세에 영광을 남기리.

창의문에따라서일장군은선후하여신민회출신들이고남만의신흥무관학교출신들인김좌진, 조성환, 리장녕, 양림, 박찬익, 박성태 등 한 패의 사람들을 남만에서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 보도록 강력한 조치를 대였다. 첫 초빙으로 되는 김좌진의 등장에는 어서 강력한 항일독립군 부대를 편성하려는 서일의 속깊은 전략적 결책이 깃들어있다.

2

   대한정의단의 기세는 대단했다. 정의단에서 순 조선글로 찍어내는 《일민보》와 《신국보》는 애독자가 많아 환영을 받았다. 서일은 정민호가 왕청에 오자 그가 나어린 강위를 데리고 함께 신문사에 들어가 총책(總責)인 김성을 도와 발행을 돕게끔했다. 하여 그 두 신문은 기자, 편집, 발행인을 합해 직원이 어느덧 12명이나 되였다.

   어느날 서일은 김성을 불러 신문발행정황을 알아보았다. 김성은 지장(紙帳)정황이 여의치 않아 발행량이 제한되지만 상해에 있는 림시정부는 물론 북간도지역에 있는 대한정의군정서, 의군부, 광복단, 의민단, 야단(野團), 군비단(軍備團), 태극단, 대진단(大震團) 등에 어김없이 지속적으로 배달되고있으며 지어는 기독계의 북간도국민회에까지도 신문을 첫기부터 빼놓지 않고 여러 부를 받아보게하는 상황이라 했다.

   《그래 반응은 어떠하오, 기독교측의 ?》

   《아직은 없습니다.》

   《달다쓰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 말인가?... 정녕 그렇다면야 좋겠는걸. 속담에 집안이 결단나면 생쥐가 춤을 춘다했소.》

   서일은 이러면서 그쪽에서 방해만하지 않으면 다행이라했다.

   본시 이질적인 종교여서 분기와 마찰이 불가피하고 그럼으로 하여 옹추간이 될수도 있지만 공동의 목적인 독립운동을 선위에 놓아야하는 이때인것만큼 대의를 봐서라도 되도록 서로간에 상(傷)을 주지 말자는게 서일의 원이였다.  

   서일은 신문선전과 발행 정황을 료해하고나서 이어서 어떻게 하면 무기를 조속시 구입해들일수 있을가고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초 중광단부터 단을 무장시킬 궁리였건만 력량을 정의단으로 확대발전시켜 어제까지의 통계를 보면 순 결사대인원수만도 천을 넘겼건만도  총은 한자루도 더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정의단이 무장을 하지 않고서야 그게 허깨비와 다를게 뭔가? 빈주먹을 들고 육탄혈전을 한단 말인가?

   이때의 적측상황을 보면 서일이 짐작한것과 같았다. 조선총독부는 《국경방면의 배일파침입상보》에다 홍범도, 구춘선, 서일, 최진동, 량하청은 배일선인(排日鮮人)들의 두목이라 지적하면서 이들의 세력이 자라지 못하게 두절해야 한다고 적어놓았던 것이다.

   3.1운동이후 급속히 증대되는 만주의 독립군에 대해 일본은 점차 불안하게 되였다. 특히 국경지방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의 활약은 너무나 맹열하여 담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북경에 주재한 일본대사관의 오하라공사는 어느날  낯빛갈이 프르뎅뎅하여 중국측의 외교총장대리를 찾아가 중국정부가 자국내에서 자라나고있는 반일무장력에 대해서 방임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일본을 반대하는거나 다름없다고 항의했다. 현대식무장으로 장비한 일본군이 창피스러운 꼴을 더 보이지 않으려는데서 고안해 낸 꾀스러운 전략ㅡ중국측은 독립군무장을 어서 빨리 취체하라는 위협적인 압력이였다.

   일본제국의 외무대신이였던 그 자신이 입수한 정보로부터 추리해 낸 결론은 홍범도의 무장보다는 더 급속히 자라는 서일의 무장에 의해 일본군은 장차 애를 더 먹으리라는 그것이였다. 하기에 그는 그같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국정부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장대해지는 반일력량을 속히 진압하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일본군은 홍범도에게서 당하는 참패보다 더 큰 규모적인 험한 역습을 당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였다.

3

   한데 독립군을 취체함에 들어가서 만주로 불리우는 여기 동북3성 지방관리들의 태도는 달랐다. 길림성 성장 서정림(徐鼎林)이 말했다.

  《불령선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는 이들을 토벌할 리유가 없다. 또 간도방면의 보고에 의하면 그 지방에서는 큰 소요가 없는 것 같고 특히 여기에 대한 취체는 이미 규정을 만들어 도윤 이하의 관원들이 실시하게 하고있다.》

이렇게되자일본은그를따버리리려고동분서주했다.

 이때 동북의 왕으로 부각되고있었던 토비출신의 장작림(張作霖)과 그의 심복인  포귀경이 일본에 추파를 던지고 있었지만 길림성 독군 장작상(張作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있음을 언녕부터 보아내고 미워했다.

서일은그에대해좀더깊히알아봄으로써파악이있게되였다. 당년에 40세에 나는 장작상은 동삼성륙군강무당 제1기졸업생으로서 대가 곧은 사람이였다. 그는 구식의 군사훈련을 받았어도 신식을 접수함이 빠르거니와 열정이 충만되여 자기의 직분을 훌륭히 지켜낸다고 평가가 좋았다. 그가 전에 군사기술을 배웠던 그 강무당은 학제를 여러번 바꾸어 오다가 장작림이 1918년에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로 되여 동북의 군대를 정돈하면서부터 그의 장악하에 전문 륙군군관을 배양하는 학교로 되여버렸다.

   서일은 장작림은 믿을 수 없지만 장작상은 믿을 수 있다고 여겨 그의 손에서 무기를 구해볼 궁리를 하게 되였다. 그러자면 그와 교섭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나서야 하는가? 서일이 선참 떠올린 사람은 자그마한 키에 차돌같이 단단하게 생긴데다 동그란 검은테 안경을 코등에 건 지식인타입의 사나이ㅡ 중국말을 할라치면 얼음판에 표주박밑듯이 줄줄인 날파람있는 사나이였다.

   박찬익(朴贊翊)이다.

   서일은 전부터 그에 대한 인상이 각별했다. 1884년도생이니 서일보다 3살이 아래인 그는 경기도 장단군 태생이다. 1906년에 신민회에 가입했던 그는 서일보다 한해먼저 만주로 망명하였는바 북간도에서 리상설, 라철, 백순 등의 지도로 대종교에 투신했다. 그는 1912년에 화룡현 삼도구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1916년까지 애국사상을 고취했고 동년 상해에 있는 신규식의 지령으로 북간도와 로령의 동지들과 련락을 취했으며 그해의 2월 27일에는 길림에서 조소앙, 려준, 김좌진 등과 손잡고 대한독립의용군을 세운 것이다. 그 이듬해에는 북경에서 리시영, 리동녕, 신규식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들 모두가 독실한 대종교도들이였다.

   박찬익은 대종교가 중광할 때 공업학교 동교생을 전부 인솔하고 대종교를 신봉한 기적을 창출하였다. 대종교를 위한 그의 공적을 보면 그뿐만이 아니였다. 홍암 대종사가 청파호에서 포교할 때 일본총령사의 교섭으로 말미암아 간도일대에서 신설교당 10여처가 일시에 봉페되는 화를 입게 되였는데 당시 룡정에 살고있었던 그는 대종사의 명의를 받들어 동변도대(東邊道臺) 도빈(陶彬), 길림성장 진소상(陳昭常)과 동삼성주변사 장병린을 교섭한 결과 봉쇄되였던 교문을 다시 열게끔 하였다.  

   서일의 파견을 받고 간 박찬익은 장작상을 만나 협상한 결과 뜻대로 무기를 얻어왔다. 보총 300자루, 권총 10자루. 수류탄 150개, 탄환 5000발이였다.

  《찬익이는 천성이 외교감이야!》

   서일은 흡족하여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이였다.  

   무기가 안전하게 도착하여 기쁘기가 한량없는지라 그날 학교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온마을 사람들이 밤늦도록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동포들아일어나자용감하게

   적수공권 뿐이라도 두려울소냐

   정의 인도 광명이 비치는 곳에

   원쑤의 천군만마 능히 이기리

   독립 만만세...

   (림정 제23호로 갓 지정된 7.5조의 《독립운동가》였다.)

4

   어느새 새벽이 가까왔다.

   모닥불이 다 꺼지고 사위가 조용한데 체대가 좀 메마르고 단단하게 생긴 어른이 계화, 채오와 같이 이날밤 우등불놀이 뒤수습이 제대로 되였는가를 검사하고있는 서일을 찾아왔다. 로씨야를 드나들며 재봉기 여러틀을 구해옴으로하여 단(團)의 옷공장을 훌륭하게 꾸려놓은 김기철(金基喆)이였다.

   《곤하실텐데 주무시지요.》

   《그놈아가 생각나 잠이 오지를 않네그려.》

   김기철어른이 하는 말이였다. 그는 전날에도 한번 이같이 뇌인 적이 있다.  서일은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그러는지를 알고있었다. 김좌진(金佐鎭)이였다.

   그는 김좌진의 아버지 김형구(일명 형균)와는 자치동갑이거니와 소시적부터 유별한 사이라 좌진이를 친자식같이 여기는데서 여직 한번도 잊은적이 없다. 항상 가까이서 함께 지내고푼 마음이였는데 여지것 손에 목각총을 잡고 도수련습이나 해오던 수백명 정의단 단원들이 오늘 이같이 손에 진짜총을 잡으니 그 의용이 름름해 보이는지라 좌진이를 새삼스례 사무치게 그리게 되였다.

   《걔가 글쎄 그 엄동 이른새벽에 웃동을 벗어메치고 칼을 휘두르며 웨치지를 았겠수. 왜놈아, 나를 보라! 왜놈아 나를 보라! 하고말이요. 어떻게 보내는지?...》

   《지금 봉황성에 있다지요?》

   서일은 이시각 지나간 일을 새삼스레 머리속에 떠올렸다. 무오년이던 지난 1918년 11월, 그날 모여온 이들이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만방에 성명을 발표할 때 그 서명자가운데서도 그는 유표했기에 인상이 깊었다. 숱많은 하이칼라에 검은 팔자수염의 장대한 체구에 기강이 름름한 그는 일견하여 장군감이였다. 서일은 그가 전에 로백린이 요구하는 군자금에서 부족금을 마저마련하느라하다가 백주창탈 강도로 몰려 옥살이를 한것이고 만기석방이 돼서는 광복단 박상진(朴相鎭)의 지령으로 만주로 건너와 거기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고는 군사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있었다.

   한데 김기철어른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쪽은 지금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여기로 오라 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바로 그같은 인재가 수요됩니다. 군사를 통솔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겁니다. 당장!》

   《그래볼가. 내가 갔다오지!》

   김기철은 무등 기뻐하면서 자진해 나섰다.

5

그때남만에는남만지역에서제일반일무장단체—서로군정서가 활약하고 있었다. 서로군정서는 독립군 양성, 국내 및 서간도(즉 남만) 지역 친일세력제거, 조선 경내의 일본경찰서와 관공서에 대한 습격, 파괴 등 활동을 벌림을 취지로 하다가 산하에 신흥무관학교를 꾸리였다.

   신흥무관학교는지금의통화현성쾌대무진에서동북쪽으로 36킬로메터 떨어진 광화향 소재지에서 다시 하니하(哈泥河)를 따라 서남쪽으로 2.5킬로메터 떨어진 고려관자 맞은켠 하니하 물건너(지금 옛터에 인가가 없음)에 있었다.

신흥무관학교전신은《경학사》에서꾸린《신흥강습소분교》 알려진다.  신흥강습소 분교는 서일과 인연을 가진 리회영, 리시영 형제와 관련되는데 이들 6형제는 이른바 한일합방후인 1911년 초에 전 가산을 팔아 가지고 가족 40여 명이 집단이주로 유하현 삼원포로 지대를 옮기게 되였다. (47)

당지의중국인들반대로현아문에서추방령을내리니불복한리회영은일찍부친(리조말년의 판서 리유승)과 친분이 두터웠던 북양정부 총리 원세개를 찾아 도움을 바랐다. 원세개는 비서 호명신에게 리회영과 함께 동3성 총독 조이선을 찾아 갈 것과 조이선이 조선 망명자들을 잘 안치할 것을 지시하였다. 조이선 총독은 또 자기의 비서를 류하, 통화, 환인 등지에 보내 조선사람들을 잘 안치하고 그들의 실제문제를 풀어주며 원주민들과 의좋게 지낼것을 명령하였다. 리회영네는 이런 든든한 배경에 힘입어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를 세우고 신흥강습소를 세울 수 있었다.

   1919년 조선반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이 운동이 일본침략자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게 되자 반일독립운동은 서일처럼 분분히 무장투쟁에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였다. 이같은 시대조류 앞에서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본부를 횡도천에 두고 류하현의 고산자(孤山子), 7도구(七道沟) 등지에분교를설치하였다. (48) 일본륙군사관학교를졸업하고일본군장교까지지냈던리청천과신팔규독립운동가들이고산자분교에와서교장이나교관으로부임하고운남강무학당출신리범석도와서교관으로나서니신흥무관학교는희망으로넘치였다.

이를전후하여대한정의단은덕원리와일대를떠나본영을왕청현서대파구십리평에두고연변각지에 5개 분단, 70여 지단을 설치하였으단지(断指)결사대 1000여 명을 두었였다.(49)

6

서일과김기철사이얘기가있은이틑날서일이써준《초청장》을갖고봉천쪽봉황성을향해떠난김기철이닷새만에왕청으로돌아온건데과연사람을데리고왔다. 서일은 믿음직한 그를 다시보면서 손을 굳게 잡았다.

    김좌진이 오자 서일은  정의단을 군정부로 개편하고 그를 군단의 총사령으로 임명했으니 때는 8월 7일, 이때로부터 무장단은 림전태세로 돌입하게 되였다.

 ...우로 신성의 영광을 조정에 돌리려거든 아래로 노예의 욕됨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으려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이 몸을 생각하지 말라. 한몸을 순(殉)하여 1백몸이 속죄함은 인도의 원훈(元勳)이니라.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를 살림은 정의의 공덕이니라. 누가 살려고 하지 않으리오만은 노예로 사는 것은 생의 치욕이요. 누가 죽을것을 싫어하지 않으리오만은 신성하게 죽는 것은 사(死)의 영광이니라.  

   ... 우리 동포 대한의 남매여! 지모가 있는 자는 지모로, 용기가 있는 자는 용기로, 기예가 있는 자는 기예로 각자 능력을 다하여 나서며 무기가 있는 자는 무기를, 량미가 있는 자는 량미로, 금전이 있는 자는 금전으로 각자 힘을 다하여 내놓아서 공적(公賊) 일본을 토멸하여 천하의 공분을 씻으며 우리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며 만세에 영광을 남기리...

   이는 정의단이 독립무장단체인 군정회를 조직하면서 발표한 창의문이였다. 열열하고 절절하며 따라서 매력적인 강한 호소력을 갖고있는 이 창의문은 피끓는 젊은이들을 정의로운 항일구국성전에로 불러일으키면서 그네들을 자기의 두리에다 굳게 묶어세웠다.  서일이 지난해에 연길현 국자가에서 대종교를 중심으로 세운 비밀결사단체--자유공단(自由公團)의 그 15000여명 중 끌끌한 젊은이들이 손에 무장을 잡자고 용약나섰다. 이때의 서일 수하 중심인물로는 玄天, 金佐鎭, 桂和, 李章寧, 金奎植, 李範奭, 曺成煥, 朴性泰, 鄭信, 金燦洙, 朴斗熙, 洪忠熹, 李鴻來, 尹昌鉉, 羅仲昭, 金星 등이였다.

강우규와 리홍래

김좌진이서일의부름을받고왕청에온지한달이안되여어느날한가지놀라운소식이왕청골에퍼졌다. 강우규(姜宇奎)가 새 총독으로 오는 사이또의 목숨을 끊어 버리려했다는 새 신문이였다.

   일본은 3.1운동에 대해서 이번 조선민의 행동은 현총독 하세가와 개인을 반대하는 것이지 결코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양언(揚言)하면서 사이또를 총독에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사이또는 문화정책이라는 간판을 내세우고 1919년 9월 2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오후 5시정각, 19발의 례포가 울리는 가운데 해군대장의 제복을 입은 사이또가 제 부인을 데리고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내리였다. 프랫트홈에 내린 사이또는 자기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은 각계요인과 인사를 나눈 후 귀빈실로 들어갔다.

귀빈실밖에는총독부에서마련하여대기시켜놓은마차와자동차가기다리고있었다. 이윽고 귀빈실에서 나온 사이또 일행이 각기 차에 나뉘여 오른 후 총독과 부인이 탄 마차가 출발하려고 몇발짝 띄였을 때 그 마치와 7보앞에 폭탄이 투적되여 요란한 폭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주위에 있었던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 중 3개의 파편만이 마차뒤를 관통하여 사이또의 혁대와 군복을 조금씩 태웠을 뿐 목숨을 빼앗기는 새려 상도 입지 않았다.

   놀란 왜경들은 즉시 흩어져 범인을 잡자고 혈안이 되였지만 놀란 인파가 우왕좌왕 하는데다 너무나 돌발적인 사건이라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채 헛물만 켜고말았다. 모두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여 알고는 거 참 시원한 일을 했다고들 하는데 유독 한사람만은 머리를 달달 털면서 아주 맹랑해 하였다.

   《젠장, 또 실팬가! 그게 누구여? 내같은 바보였군. 한발짝만 좀 더 뿌릴게지! 에에에... 쯔쯔쯔!》

   월경의병장 리홍래(李鴻來)였다.  라철과 함께 5적을 죽이려다가 실수를 하여 하나도 없애지 못한 통분함이 아직도 가끔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괴이고 있었던 것이다.

   두주일이 지나자 불행한 소식이 날아왔다. 서울역에서 거사를 했던 강우규가 왜경의 손에 붙잡혔다는 것이다. 《범인나이 65세나 된 턱수염과 머리가 하얀 백발로인이였다.

   이 소식에 자극을 제일 심하게 받은 사람역시 리홍래였다. 가끔 저돌적인 행위가 버릇처럼 돼버린 그는 자기도 살아서 한번이라도 세상을 놀래울만한 일을 해야겠노라하더니만 새해 즉 1920년을 잡자 간다온다는 말없이 훌쩍 사라졌다.

   동행자 하나 없었다. 단지 김규식과 자기는 할빈에 한번 피끗 가봐야 할 일이 있다면서 홀홀단신으로 왕청을 떠나갔다. 폭탄을 구하지 못해 거기에 있는 일본총령사관을 폭파는 못할망정 수류탄으로라도 한번 되게 소란을 피워 놔야겠다고 맘먹은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송화강 남안이요 중동철로의 중심이자 북만주의 수부로서 이때 벌써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우기 시작한 할빈은 번창했다. 각국의 령사관이 들어앉으면서 서로 주인행세를 했다. 일본이라고 그저 얌전히 구경꾼노릇을 할리 없었다. 철길이 서에서 동으로 도시중심을 꿰질렀는데 일본총령사관은 도시를 꿰지르는 그 철길우에 가로놓인 제홍교(霽虹橋) 이남인 남강(南崗)구역에 있었다. 검스레한 아담진 2층건물이였다. 남향하여 출입문이 중간에 있고 량켠에 꼭같은 크기의 창문이 3개씩 모두 12개였다. 창턱이 높아서 밖에서는 웬간한 꺽다리아니고는 안을 근본 들여다볼 수 없다.

   바야흐로 어둠이 깃드는 어슬녘, 리홍래는 그런데다 품에 감추고 간 수류탄 두 개를 꺼내여 련거퍼 뿌리였다. 그런데 첫개는 유리창을 깨며 들어가 터졌지만 두 번째 뿌린것은 창문살에 맞아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밖에서 멋없이 터지고 말았다.

   그통에 소동이 생겼다. 경찰들이 그를 붙잡자고 동원하였다.

   리홍래는 북쪽을 향해서 냅다뛰였다. 제홍교를 건너면 중앙대가를 경계로 해서 서쪽이 도리(道里)고 동쪽이 도외(道外)였는데 그 철길다리를 건넌 리홍래는 도외의 17도구 빈민거리에 들어서면서 자기를 바싹 추격해 온 일본형사 국길정(國吉正)을 사살하고는 추격해 온 다른 경찰이 쏜 권총에 맞아 불행히 목숨을 잃고말았다. 이날이 3월 6일이였다.

   이쪽이서는 여러날이 지나서야 지방 신문에 난 소식보도를 보고 시체를 찾아다 장례를 지냈는데 그가 희생되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특히 의병출신의 젊은이들이 눈물을 더 많이 흘리였는데 그 누구보다 비통하여 절규(絶叫)한 사람은 김규식이였다. 그는 같이 손잡고 싸우자 약속하고 데려다놓고는 전쟁 한번도 못해보고 어쩌면 그렇게 멋없이 혼자 먼저 가느냐면서 통곡했다.

   

    대절의미진멸한치말어라

     최후의 성공을 우리 담당해

     용진무퇴한 대한 남아야

     광복할 그 날이 멀지 않았네

 

     신령이 재천에 감응하소서

     용사의 충혼을 위로하소서

     영웅의 위훈을 竹面에 옮겨

     빛나는 이름을 기리전하리.

 

    군정부는 추도식을 거행하고 그의 산소를 가까운 북산에다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