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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평전 4      몸은 초야에 묻혀 있어도

4편   1908년 이해


몸은 초야에 묻혀 있어도


 

   1908년ㅡ이해는 조선의 력사상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한해였다. 한것은 전해의 뒤를 이어서 한층 발랄해지고있는 의병항쟁이 점차 절정으로 치달아오르면서 이 한해를 장식하고있기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수 없는 열혈의 젊은이들, 우국우민의 애국지사들이 당장 멸망하고말것 같은 나라의 비참한 처지를 놓고 개탄하고 울며 속을 태웠고 그중 많은 이들은 류혈과 희생이 약속된 최후의 결전장으로 달려나가 자기의 청춘과 귀중한 생명을 선듯이 바치고있었다.

   이럴 때 서일은 일개 평범한 교원으로서 몸은 비록 학생들 속에 묻혀있지만 의병항쟁을 자기가 하고있는 계몽사업보다 더 직접적인 구국행동으로 간주하고 남달리 관심하면서 그것을 계속 꾸준히 연구하며 변화많은 국세를 면밀히 주시하고있었다.

   1908년 5월부터 일본은 의병들을 전멸하려고 각 지방에 배치하였던 수비대를 다시 배치하면서 주둔지역을 늘이였다.

   전라도지방 하나만으로도 그 정도가 어떠한가를 알수가 있다.

   8월하순 남부수비관구 사령관 와다나베소장은 전라남북도에 림시토벌대를 무어 보내는 한편 여기에 제6사단 공병소대, 헌병, 경찰관들을 더 증가시키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을 경비부대와 행동대로 나누어 경비부대는 포위선을 형성하고 중요거점을 지키게 하였고 행동부대는 포위선안에 있는 백성들에 대하여 수사와 검거 및 학살을 하게 하였다. 또한 전라남북도의 연해에는 해군을 배치하고 의병들이 해안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게했다.

   하다면 함경도쪽은 어떠한가? 북부수비관구의 책임자는 오까사끼소장이였다. 그의 휘하 동부수비구 마루이소장이 지휘하는 2개련대의 일본군이 함흥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분산배비되였는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보병 제49련대의 주력은 경성에 주둔하고 회녕에 보병 1대대와 공병대대를. 길주, 청진, 무산에는 각각 보병중대를. 웅기, 경흥, 신아산... 등 24곳에다는 각각 보병 1개소대 혹은 1개분대를.

   서일이 있는 경원에 진주한 수비대는 1개분대였다.

   보병 제50련대는 주력을 북청에 두고 원산, 함흥에 각각 보병 2개중대를. 장전점, 장진, 성진, 갑산, 혜산진에 각각 보병 1개중대를. 고성, 양덕, 호도... 등 29곳에다는 각각 보병 1개소대 혹은 1개분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도 영흥, 초원... 등 8곳에는 각각 기병대가 배치되였으니 모두 합치면 함경남북도에 침략군이 주둔한 곳이 무려 77개소나 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수비대분견대에는 극상해야 10여명 내외였다.

   (지금 적병은 서울을 본 소굴로 삼고 각 지방을 수비대장소로 삼으며 그중 큰도시에 진을치고 련읍을 나와 헤매고 있다. 저렇게 흩어져 헤매는 자들을 잡아버리는건 쉬울 것이다. 나오는 족족 처단할 것이며 놈들이 주둔한 곳은 공허한 틈을 타서 취할 것이다. 조급히 놈들의 주둔장소를 공격하려 말아야 한다. 그러면 실패할수 있으니까. 공격하려면 성공의 가망이 완전무결한 경우 할것이지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강력한 무장도 없이, 주도면밀한 작전도 없이 적의 본 소굴을 직접 공격한다는건 득책이 아니다.)  

   서일은 일본군 6명이 짝지어 경원거리를 나도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어디엔가 도망가서 숨어있었던 오사기교감과 이와데교원은 함경도에 저들의 군대가 이같이 많아지니 그제야 어느정도 안심이 되는지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왔어도 학교에서 학생들이 글읽는 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학생들이 말도 없이 동맹휴학을 한것이다.

   《누가 수업을 선포하면 누가 목숨을 잃을것이다! 》

   얼마전에 학교벽에 이런 위협적인 표어가 나붙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그 표어는 일본문(日文)으로 쓴 것이였다.

   《교장선생! 이젠 개학을 해야지. 학생들이 등교하도록 조치하시오.》

   오사기교감은 학교로 오자마자 서일을 향해 독촉했다.

   《오사기교감! 의병이 붙인 표어를 보지 않은 모양이군요?》

   서일은 그를 데리고 나가 서쪽으로 갔다.

   오사기 겐다로는 거기 벽에 붙어있는 표어를 보더니 찔끔 놀랬다.

   《오사기교감은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이 납니까? 난 목숨을 잃고싶지 않습니다. 교감선생님도 아마 그렇겠지요. 사람은 목숨이 하나뿐이니까.》

   서일은 그의 얼굴표정을 넌짓이 살피면서 완곡한 투로 거절했다.

   오사기 겐다로는 의병들이 이제는 학교 선생들의 목숨까지 노린다면서 두덜거렸다. 서일은 속으로 웃였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벽에 그런 표어가 나붙은건 그의 작간이였다. 고구려옛도읍지를 돌아보고와서부터 서일은 마음을 안정할수 없었다. 유사이래 함북도가 이같이 복잡하고 긴장해 보기는 처음인지라 학생들도 마찬가지여서 공부같은건 뒤전으로 치게되였다. 서일은 이런 때 차라리 연해주(로씨야)까지 한번 피끗돌아보고 올 궁리를 했다. 하여 그는 박기호와 짜고서 이런 표어를 써붙임으로써 학교에서 무기한으로 방학을 하게되는 리유를 만들었던것이다.

8월 29일자 황성신문

   8월 29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이 도착했다. 그 신문에 소식 한편이 실려서 선생들은 그걸 보고 또 한번 옥신각신하게 되였다. 내용인즉 전인홍, 김중환, 홍유철, 리순하가 선유사(宣諭使)로 되여 경기도, 경상북도, 강원도, 충청남북도 등 각 도에 파견되여 자기가 맡은 지방들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의병들을 보고 이제는 손에 든 무기를 놓고 집으로 돌아가라 선전했다는 것이였다.

   《친일매국노들!》

    누군가의 증오에 뒤이어 너도 나도 입을 열었다.

   《애국력량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구 들었네.》

   《이것 보라구. 일본이 나라의 독립을 빼앗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모두 흩어져 고향에 돌아가라구 했다네.》

   《더러운 것들, 입에 침이나 바르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다녀. 저런 량심짝없는것들부터 잡아치워야 하는건데. 의병들이 뭘하는가?》

   《기만에 넘어가 자수하는 자도 있을거야.》

   《있겠지. 헌데 자수한다고 놈들이 시름을 놓을가. 듣자니 사상동향과 그의 일거일동을 감시한다누만. 그러다가 수상하다고 여겨지면 어쩌는지 아오. 즉시 잡아다 취조를 한다오. 악형이지. 그래서는...》

   이때 오사기 겐다로가 이와데 주다로는 교장실에서 일본인 아무개가 한국에 농사지으러 왔다가 봉변당한 일을 놓고 얘기하고 있었다.  

   일본은 전해(1907)의 말부터 각 지방에 농장을 설치하고는 사실상 토지를 비롯한 재산략탈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전라도에 《사구바농장》이라는 것이 생겨나자 그곳의 의병들은 기삼연의 지휘밑에 이 농장을 습격하고 그 재산을 빼앗아냈다. 당시 황성신문은 이 일을 반영하면서 전라도 김제군 공동면 길가에 나붙은 격문도 보도식으로 알린바 있다. 내용은 이러했다.

 

첫째, 지금 의병을 일으키여 단꺼번에 일제침략자들을 처단하려고 하니 우국지사들은 모두 힘을 합쳐 적을 소탕하는데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

   둘째, 일제침략자들에게 미곡을 파는 자는 군법에 따라 죽일 것이니 주의할 것.

   셋째, 일제침략자들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

   그 격문에 주목되는 것은 일본인들을 농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쫓아 버려야한다는것인데 신문은 사건을 보도하면서 격문의 내용을 슬그머니 널리 선전했다. 애국적인 신문들은 이같이 의병들의 활동을 자주 알려줬다.

   황성신문은 올 1월 26일자 신문에도 경상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산간지대에 나가 콩을 걷어들이다가 의병들 손에 무리죽음을 당했노라 보도했다.  

   《연강을 다니는 배들가운데서 쌀포대를 보면 모두 빼앗으며 심지어 배까지 마사버리므로 곡물의 래왕이 끊어지게 하였다.》

   이역시 황성신문의 보도였다.

충청북도청주군조치원에나타난의병들은누구를물론하고쌀을정거장으로날라가면총살한다는《방문》을붙이였다. 그러나 조치원에서 쌀을 정거장으로 실어가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를 알게 된 의병들은 쌀장사군 7명을 붙들어 그 가운데서 6명을 총살하고 1명에게는 동리에 가서 쌀을 한되박이라도 일제침략자들에게 팔거나 정거장으로 실어나르면 죽인다는 것을 알리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 역시 그 신문이 보도한바가 있어서 서일은 지금 장사길에 나서서 돌아치는 죽마고우 최삼용이를 생각하고 걱정했다.

   (제발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워 막짓을 하지 말아다구.)

   전라도의 《사구바농장》을 습격하였던 기삼연의병장은 올 1월경에 일본군에 체포되여 학살당했다. 그가 지휘하였던 의병대의 활동은 저조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병대에 의하여 이 일대의 투쟁은 계속되고있었다. 한데 선유사들은 그같이 목숨을 내걸고 향토를 지켜 싸우는 의병들을 유인해서 투쟁의지를 마비시키고 의병진을 와해하려 든다. 대체 누구의 지시와 얼림에 든거냐?...과연 괘씸한 자들이니 용서없이 잡아죽여야 할것들이다.

경성서찾아온현천묵

    어느날 경성에서 현천묵이 문득 찾아왔다.

   《여기서는 어쩔텐가? 의병대를 조직안할텐가?...속에서 불이 붙는구나. 이대로 그냥 눌러있진 못하겠다. 왜병이 아무리 기승부려도 해봐야잖아.》

    이러면서 현천묵은 그곳의 형편을 알려주였다.

   그지간 경성에는 여러 지방에서 애국청년들이 모집사업에 적극 호응해 나섰길래 많이 집결되였다. 로씨야에서 담사리의병들과 같이 온 지식인 리남기는 이들을 주남면과 주북면일대의 민가에 분숙시키였다.

   의병들은 학생으로 가장된 그들에게 체육을 가르친다면서 대렬짓기로부터 포복전진에 이르기까지의 훈련을 하면서 사격술을 배워주었다. 동시에 학교설비, 경영비를 거둔다고 하면서 수많은 군자금을 모았다. 담사리의병 장석회는 그렇게 장만된 1만 7,000원을 갖고 연해주에 건너가서 무기와 군수품을 비밀리에 사왔고 한편으로는 또한 경성 각지에 널려있는 화승총을 걷어들이기도했다...

  《정 참지 못하겠거든 리기남을 따라가라구, 말리지 않을테니까. 나는 아직도 우리의 임무는 계몽이라 생각하길래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그들을 동원해서 의병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구?... 요즘은 교학을 할 수 없는 정황이니만큼 나는 이 기회에 연해주에 한번 피끗 가보고 돌아올 생각이다. 래일로 당장. 거기는 가서 뭘하냐구?... 연구를 안했나, 형세가 퍽 달라진거야. 적은 지금 수비대니 토벌대니 뭐니해서 각 처에 바둑같이 자리잡고 들어앉아서 진압을 꾀하는 판인데 우리가 의병대를 조직해갖고는 그래 어디다 발을 붙이고 싸운단말인가? 발도 못붙이고 이리저리 쫓긴다면 결국은 멸망을 자초할 뿐이야. 그래서 나는...》

  《연해주에 가보면 해결이 되나?》

  《당장 해결이 돼서가 아니지. 거기로 건너간 전기의병들은 어쩌고있는지? 타산이 무엇인지?... 만일를 대비해서 미리 고찰하고 오자는거다.》

   말을 듣고 보니 서일은 의연히 감정에 들뜨지 않고 침착하거니와 원견성있게 타산하고있는지라 현천묵은 다시 한번 감정을 눅잣히였다.

   며칠후 리기남은 현천묵이 자기와 같이 움직일 뜻이 아니니 짧은기간 훈련받은 젊은이들을 운동회를 한다면서 학교운동장에 모이게 한 다음 그들로 의병대를 편성하였다. 의병장은 리남기 자기가 되고 참모장은 지창회, 제1중대장은 장석회, 제2중대장은 최덕준이 되여 항쟁에 나섰다. 적의 감시를 깜쪽같이 넘겨버렸던 것이다.      

   함북도 경찰부장 세끼야 이사무라는 이 일을 썩 늦게야 알고서는 경무국장 마쯔이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리였다.

           

   지방인민들은 모두 폭도를 동정하고 우리의 움직임을 일일이 알려주고있는 형편이므로 경찰뿐만아니라 헌병도 대한협회회원에 대해서나 또는 폭도를 음으로 양으로 돕고있는 주민들에 대해서 단서를 얻어낼수 없어서 항상 헛수고를 거듭하고있다.

 

서일은오사기교감과자기는친부모보러함흥에갔다오리라하고는이틑날현천묵이와함께경원을떠났다. 청진까지 가서 현천묵은 경성으로 가고 서일은 부두에 나가 울라지보스또크로 가는 로씨야국적을 가진 최봉준소유의 《준창호》륜선에 올랐다.

전에그는로씨야로자주드나드는리달문과계화로부터거기연추(煙秋)에 한고향사람인 최재형(崔在亨)이란 분이 살고있다는 것을 여러번 들어 머리속에 기억하고있다. 요근년에는 리달문도 계화도 소식이 끊겨 잘 알수는 없지만 그분은 의연히 동포사회를 위해 활약하고있을 것이라 생각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리범윤도 있다. 얼마전에 의병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경원군내에 있는 신아산(新阿山서)에 주둔한 일본수비대를 전멸시키고 돌아간건 참으로 뭇사람을 격동시킨 기쁜일이여서 잊을수 없다. 그 의병대를 조직하고 지휘한 사람이 리범윤과 최재형이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에 앞서 5월초순에 2개소대쯤 되는 의병이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군 로서면에 있는 일본수비대를 야습했는데 때마침 경성주둔 헌병대장이 일본인 경시(警視)이하 수십명을 인솔하여 국경지대 순시중이라 의병의 돌연적인 공격을 받아 2명이 사살되고 수명이 중상을 입어서 소문이 들썽했다. 듣자니 그 의병대는 안중근이 인솔한 것이라 한다. 서일은 그들을 하나하나 다 만나고싶었다.

청진항을출발

   청진항을 출발한 《준창호》는 망망한 대해를 가르면서 전진했다.  

   이 배에 오른 선객 중 대부분이 보부상모양들이였다. 물론 탈주를 하느라 그같이 변장한 사람도 있겠지만 모두들 일인경찰의 수사를 묘하게 벗어났다. 한데 웬 일인지 진짜 보부상들마저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서로 곁눈질하면서 경계하는 빛이였고 지어 어떤 자는 다른 사람과 마주앉는 것조차 꺼리는지 궁둥이를 앵돌려서 선실의 분위기가 랭랭하고 스산했다.

   정부는 근일에 《내지려행권규칙》이라는것을 공포하여 국민들을 자국내에서마저도 《려행권》없이는 제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게 공제했다. 물론 이것은 일제가 반일의병을 봉쇠할 목적에서 저들의 괴뢰정부를 사촉하여 행해지는 검속이였다. 환경이 이러한즉 선객 서로가 꺼리고 경계하는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리해가 되는것이였다.

   중절모를 쓴 지식인타입의 한 중년사나이가 아까부터 은근히 눈길을 자주 이쪽으로 보내군했다.  

   벙어리도 아니면서 내처 입을 꾹 다물고있자니 속이 답답하던 차라 서일은 자기가 먼저 그의 신원을 밝혀 볼 생각이 나기도했다. 그래서 배란간에 두팔을 올려놓은채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그가 가까이로 다가오는 기척이 나자 혼자소리로 한마디 탄식을 뽑았다.  

   《배는 가고 물은 출렁이고 속은 불글부글 끓는데 어쩌면 좋을고? 입이 있어도 벙어리 냉가슴 앓아야 하니 이놈의 세상이 과연 야속하구나!》

   《그럴거있소. 할말이 있거던 나하구하구려. 내가 들어주지.》

   뜻밖에 저쪽에서 남이 하는 혼자소리를 잡아듣고는 말을 먼저 걸어왔다. 그 행동이 시원스러웠다. 그는 대방이 안심하고 자기를 믿어도 된다는 뜻으로 크기가 손바닥만큼한 얍다란 증명을 꺼내 보이기까지 했다. 서일이 받아서 펼쳐보니 기자증인데 사진과 함께 대동공보(大同共報) 편집 유진률(兪鎭律)이라 밝혔다.

   《오,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기자분!》

   서일은 안심하면서 자기는 함일사범을 졸업하고 지금 경원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데 시국이 복잡한 때라 학생도 선생도 마음을 안착할수 없어서 차라리 이 기회에 려행길에 올랐노라했다.

   유진률은 사람을 면바로 봤다면서 껄걸 웃었다. 반일의병운동이 앙양기에 들어서고있는 지금 한국 지식인들의 동향을 알고자하는 그였다.

   대동공보사는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다. 그 신문은 로씨야인 미하일꼬브 사장에다 조선인 차석보(車錫甫)사장을 두고, 유진률을 편집인, 윤필봉(尹弼鳳)을 주필로 하여 창간된것이다.

   《그러니 로씨야에 동포신문 하나 더 불었군요. 해조신문하고 대동공보하고...듣자니 해조신문에서는 장지연선생을 주필로 모셔갔다더군요. 참 잘했습니다. 장지연ㅡ그분은 잠자는 민중을 깨우친 나팔수입니다.》

   서일은 이국땅에서 동포신문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의 장거라고 할수 있다고 축하해주면서 국내에서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독자대중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했다.

   《국내서는 그 두 신문이 동포계몽을 위해서 막대한 공훈을 세웠지요. 많은이들이 그 신문을 보고 각성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충청북도의 리아무개는 자기가 의병을 모집하게 된 것은 당시 정세의 위급성과 함께 신문에 실린 보도기사를 보고 결심한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농민들도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들여다보다가민족의의분을참지못해의병에나섰다고합니다.

아아국가의운명이불행하여나라의형편은닭알을쌓아놓은것과같은위험속에놓여있고인민들은죽을지경에이르렀다. 우리 동포들아, 한마음 한뜻으로 자수자강하여 외국의 모욕을 받지 말게 하자애급의근세사와조선의최악이란두편대한매일신보실리였던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경상북도 청도군의 60세에 나는 최한용이란 분은 자기는 바로 그 글들을 읽고서 의병에 나섰노라 했습니다. 어디 그이 한사람뿐입니까. 우리 경원군 리동호군수님도 그 신문들을 보고 각성하여 의병에 나가신 겁니다.》

   애국문화운동가들이 각지 의병들의 활동정형을 소개선전한 신문보도기사를 비롯한 글들은 그들의 의도여하를 불문하고 의병들을 모집하기 위하여 의병장이 힘써 발표하던 《격문》의 역할을 담당수행한 것으로 되는바 결과적으로 그들이 적극적으로 의병모집사업을 지지성원하고 거들어준 것으로 된다고 서일은 자기의 평까지 겯들어 말했다. 그랬더니 유진률은 초면의 젊은이가 신문을 알고있을뿐만아니라 남다른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갖고있는지라 서일이라,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더 접근했다.

  《그 다 옳은 말씀이구만. 신문의 작용을 놓고 이같이 통쾌하게 평을 해주는 소리를 내가 오늘 처음 듣습니다. 속이 개운해지는군요.》

   유진률은 이러면서 대동공보는 일본의 어떠한 방해가 있더라도 제 기능껏 재로동포들의 계몽과 민족의식과 항일열의를 고취해 나아가리라했다.    

   두사람은 조선에서 선동력이 강한 대한매일신보가 통감부의 작간으로 하여 지금 처해있는 위기에 대해서도 운운했다.

   지난 5월 27일에 통감부는 또다시 영국인 사장 배설을 고소한 것이다. 통감부는 그 신문이 4월과 5월중순에 발표한 《須知分 砲殺의 詳報》와 《百梅特捏의 不足以壓ㅡ伊太利라》 그리고 《學界의 花》라는 등 세편의 기사와 논설이 일본의 조선보호제도를 전복하며 일본인배척을 선동했다고 트집잡으면서 교사선동(敎唆煽動)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배설은 또다시 재판을 받게 되였다.

   지나간 6월중순에 주한 영국 총령사관에서 열린 재판결과는 배설에게 3주간 금고형(禁錮刑)과 당국의 소환에 응한다는 보증금으로 배설자신과 보증인이 각각 1천불씩 도합 2천불을 납부하라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니 이또 히로부미의 계획은 영국측의 협조를 받아 일단 성공한 셈이였다.

   이 판결에 따라 배설은 상해로 호송되여 3주간의 금고생활을 한 후 7월 12일에 만기석방되여 서울로 돌아왔으나 대한매일신보는 이전처럼 강경한 논조를 펼수 없게 되였다.

   《통감은 악착하기를 그지없는 놈이지. 요즘 또 량기탁선생마저 해치려구 당치도 않는 보상금횡령죄꾸며갖구무함하려들고있다오.》

   유진률은 자기가 며칠전인, 바로 8월 31일에 서울재판소에서 열리였던 제1공판을 보고오는 길이라 했다.

   《이또통감은 과연 언론인탄압에 혈안이 되여 날뛰는군요. 일본의 원훈이니 세계의 위인이니 하느님같이 높이높이 떠받들기는 해도 제깟게 다 뭡니까. 거짓말만 하는 령감쟁이지요. 악행으로 빚은 죄 무엇으로 다 갚을가. 이또 그자는 아무때든 천벌이 내려 좋은 끝장이 없을겁니다.》

   서일은 마에마 교오사꾸가 영국인 배설이 꾸리는 대한매일신보가 통감부의 두통거리라고 알려주던 일이 새삼스레 상기되여 이렇게 말했다.

연추가는

   울라지보스또크에서 하선(下船)한 서일은 유진률기자가 이끄는대로 대동공보사옥을 가보고 거기서 하루밤을 지낸 후 이튿날 그와 함께  연추로 향했다.

   서일을 동무하고 길잡이를 해주느라 일부러 함께 떠난 유진률기자는 가면서 연해주를 비롯한 로씨야지역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의 상황을 소개했다.

   《현유 재로동포가 대략 14만가량 됩니다. 1884년 한로간에 한성조약이 체결되여 연해주진출이 합법화되면서부터 이주민이 쓸어들기 시작해서 로씨야정부는 한국인을 귀화인으로 취급했고 로씨야국적에도 편입하여 가족당 15데샤티의 토지를 분배하여 주었고 산업에도 종사하게 했던겁니다. 법적 지위상에서 로씨야인과 동등한 대우를 보장해 준것이지요. 그러던 것이 지난해부터는 조선인과 중국인에게 토지차입금지조치를 취하면서 이민정책에는 일대 변혁이 생긴 겁니다.》

   《변혁이라니? 축출합니까?》

   《아니지. 축출이야 안하지만 조선인을 미개간지로 몰아 개간해 놓으면 저들 로씨야인이 그걸 차지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그겁니다. 그래서 로씨야인의 이주민은 해마다 부쩍 늘고있는 추세입니다.》

   《제 땅에서는 살수가 없어서 이국으로 쫓겨 오고... 뼈빠지게 일해 개척해서는 빼앗기고... 왜 우리 민족은 이러고 살아야만 하는가?... 군주귀족이 권세로 평민의 권리를 유린하는 것이 처참하고 고통스럽다지만 강국이 무력으로 약소국가를 유린해 제 고향마저 잃게 하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럽고 처참한 것이 어디있으랴! 아아...》

   서일은 탄식을 뽑았다.              

   유진률은 맞는 소리라면서 그것을 신문에 그대로 실어 정세에 암매하고 무지하고 무감각한 사람들을 교육하리라했다.

   《무명소졸도 안되는 나같은 사람의 말 한마디를 가슴에 새겨넣고 음미할 자가 몇이나 될가요. 관두시오.》

   말하면서 오다나니 그들은 어느덧 연추 가까이에 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보이지요. 세여보시오. 모두 다섯호. 하리(下里)라는 동포마을입니다.》

   유진률기자는 알려주면서 들리여 다리쉼도 할 겸 마른목을 추겨가자고 했다. 그래서 걸음맥을 다시 올려 걸음을 재우치고있는데 이때 그 다섯호마을쪽으로부터 갑작스레 신경을 긁어 내리는 처량한 괴성이 들려왔다.

  《나는 아니오! 아니오! 사람살리오!...》

   절망적인 그 웨침은 긴박한 위기속에 구원을 바라는것이였다.

   《이거, 무슨 변고가 나는구만! 빨리 가봅시다!》

   서일은 앞장서 걸음을 날렸다.                  

   그들앞에 과연 위태로운 사건이 벌어지고있었다. 총가진 자 둘이 민둥머리의 청년을 가지만 무성했지 삭풍에 제멋대로 못나게 자라 모양다리없는 아름드리 백양나무 아래에 끌어다놓고 막 총살하려고 서두는 판이였다.

   《잠간만, 잠간만!》

   《대, 대체 무슨 짓이오?...》

    서일도 유진률도 손을 홰홰 저어 우선 제지시켜 놓으면서 다가갔다.  

    총을 휴대한 자들은 주춤하고 눈길을 이쪽으로 돌렸다.  

   《이 자식은 일진회 놈이야. 머리깎은 꼴만 보지.》

   나이 지긋한 상투머리의 사나이가 들었던 총을 내려 말해놓고 보니 생면의 행인들이 간섭해 나서는지라 언잖으니 아니꼽게 찔 갈겨보는것이였다.

   《그리구 이걸 좀 보란 말이요. 저 자식의 몸에서 이런게 나왔어.》

    나이가 젊어보이는 의병이 보따리를 헤치였다. 그가 거기서 꺼내는걸 보니 그건 서일이한테도 한권있는 도꾸도미의 저작 《길전송음(吉田松陰)》이였다.

    버드나무가에 끌려간 청년은 넋이 나간지라 낯이 흙빛이 되여 내처 떨기만했다. 서일은 눈길을 돌려 총가진 자들을 번갈아 매섭게 쏘아 보았다.  

   《헌데 당신들은 누군데 이럽니까? 저 사람을 어쩌자는 겁니까?》

    유진률이 낯색을 굳힌채 질문했다.

   《우린 의병이야. 한데 임자는 대체 뭔데 남의 일에 갈개질인가?》

    상투머리의 사나이가 다시 한번 눈을 사납게 흘기였다.

   《대동공보사 기자 유진률입니다. 당신들은 여기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있느냐구 내가 물었습니다.》

   《보다싶이 일진회 놈을 처단하고있지요. 이자는 왜놈의 주구니까.》

   모양없는 상투를 아직도 고집스레 꼭대기에 얹은 그자는 청년이 일진회원이 아니니 제발 죽이지 말라고 비두발괄을 했건만 당치않은 괴변이다, 일진회놈 아니면 네가 머리를 쪽박으로 만들었냐하면서 기어히 죽이려했다.

   알고보니 한심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민머리를 했다해서, 일본글서적을 가지고 다닌다해서 왜놈의 앞잡이로 판정하고 남의 생명을 함부로 앗아내다니?...

   《여보시오, 이 책은 내한테도 한권 있습니다. 도꾸도미가 쓴게 아닙니까. 나도 중머리를 했더면 죽음을 당하겠구먼? 남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다니 원! 누가 당신들께 그런 권리를 주었습니까? 무지한 악한이 되렵니까?...》

   서일은 청년을 죽음에서 구원했다. 그는 원산학교 일본어선생 김성이였다.

새로사귄친구김성

김성(金星)은 강기있고 총명한 청년이였다. 천만다행으로 살아난 그는 두 은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을가 이루다 말할수 없이 감지덕지해 하였다. 하리마을을 떠나  연추쪽으로걸음을놓기시작하자김성은자기가연해주로오게리유를알려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교편을 더 잡고있을 형편이 못되여 차라리 의병으로나 되여 싸우리라 맘먹고 집을 나온 사람입니다. 본래는 조용히 글이나 가르치며 세월을 보낼수도 있었습니다만 내라는 사람이 명줄을 어떻게 타고났는지 그렇게 돼주지를 않는단말입니다. 올봄에 있은 일입니다. 한 의병대가 대전과 송약사이의 철길을 파괴했지요.》

   《가만있자, 올봄이라했지? 대전과 송약사이라 했지?...그게 그럼 리강년의 의병대가 한 일이 아닌가.》

   서일은 무망간에 그의 말을 중둥잘라놓았다. 신문지상에서 그 사건을 보도한적이 있는데 면바로 생각난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리강년이 령솔하는 의병대가 한 일이였습니다. 신문에도 났지요. 그 일로 인해 우리 학교에서는 선생들지간에 한바탕 변론이 붙었던겁니다. 철길을 파괴하는게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놓고서. 그때 저는 말했던겁니다. 의병이 철길을 끊은것이 뭐가 잘못됐느냐, 일본은 경부선을 비롯해서 우리 나라의 철도를 모두 독점관리하고 있다, 대체 무슨 심보냐, 무슨 리유로 남의 나라에 들어와 제 맘대로 독재를 부리는거냐, 제 나라의 철길을 그래 그자들이 그냥 독점하게 내쳐야 하는가고말입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고 반박하며 나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일진회에 가입한 교원들이였지요. 그후부터 저는 암암리에 경찰당국의 요시찰인으로 되고만것이지요.》

   《오, 알았어! 그래서 꼬리를 빼는 판이군!》

   유진률이 롱담조로 말하고는 웃었다.

   《그렇습니다. 어느때 곤욕을 치를지 모르는 일이라 에라 하고 떠난겁니다.》

   김성은 학교내에서 제 사상을 버리면서까지 그따위 일진회의 녀석들과 그냥 어우렁더우렁 지내고싶지는 않아서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의병쟁의길을택했노라했다.

   《건데 머리는 왜 그 모양으로 만들었나?》

   서일은 나이가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거니와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다는 그의 선택에 찬동은 하나 리해가 안되여 물었다.

   《저는 국내서는 의병을 찾을길 없어서 이리로 오자고 맘을 먹은겁니다. 한데 오자고 보니 아시다싶이 지금은 통행증없이는 나다니기가 어렵단 말입니다. 다행히 저한테는 감영에서 발급한 교원증이 있었지요. 려권은 없어도. 듣자니 일진회의 사람은 통행이 좀 자유롭다더군요. 그래 생각해 봤습니다. 그자들의 확인하는 신분증이 뭐겠습니까. 남달리 뺀뺀골을 하는게지요. 오라, 그렇지! 나도 한번 그 모양새를 내보자! 나는머리를이모양을깎아버렸지요. 그리구나서는 서점에 가 일본문 서적까지 한권 사서 분장을 한거지요...했더니 확실히 감시가 적은 것 같습디다.》

   김성은 원산해관의 감시를 피해 밀항한 것을 자랑삼아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양으로 로씨야땅을 밟으면 위험하다는것 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그래 여게 와서는 어느 의병대를 찾아 갈거요?》

   서일이 물어봤다.

  《난 류린석의 의병진을 찾아가렵니다. 그 의병진이야말로 력사가 오래거니와 명성이 높으이니까요, 안그렇습니까.》

  《류린석의 의병진이라, 거 접대가 대단히 좋았군! 하하하!...》

   유진률이 그 소리를 듣더니만 앙천대소했다.

  《기자선생! 왜 그럽니까?》

   김성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났다.

  《이 멍청이야! 너를 죽이자구한게 바로 그 의병이야.》

  《아니 뭐라!?...》

  유진률의 말에 김성은 물론 서일마저 깜짝 놀랐다.

   유진률은 머리꼭대기에다 아직도 멋없는 상투를 얹고있는 것을 보고서 자기는 그들이 류린석의 의병이라는걸 제꺽 알아맞혔노라했다.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요즘 류린석이 60여명의 수하 의병들을 거느리고 로씨야로 건너온 것이다.

덕망높은최재형어른

연추에도착했다. 바이깔호  너머의 저 머나먼 첼랴빈쓰크까지 한꺼번에 시공을 벌려 완공했다는, 구라파의 로씨야 본토로부터 우랄산맥을 지나 아득히 멀고 먼 이곳 원동까지, 마치도 하나의 혈맥마냥 뻗은 길이 7000킬로메터의 대철로는 그 장관을 자랑이나 하듯이 해빛아래 번들거렸다. 그 철로의 끝이 닿고있는 원동의 항구도시 울라지보스또크에 올라서부터 내내 짙게 느껴지던 로씨야식의 독특한 이국적풍채가 북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더 다분히 느껴지고있었다.

   무비광대한 로씨야의 대지로 놓고 보면 하나의 작디 작은 표점에 불과할  연추ㅡ이곳에도 우리 동포들이 살고있다. 우선 가옥부터 외모가 완전히 달라서 잘 믿어지질 않는다. 여기서는 함경도처럼 산간에 숨듯이 들어앉은 마을처럼 토벽이니 토담이니 따위는 전혀 볼수 없었다. 만주땅에 사는 중국인(漢族)들의 주거(住居)처럼 진흙물을 묻힌 억새타래로 만든 두터운 타래벽흙집도 볼래야 볼수 없다. 여기는 소문에 듣던바와 같이 모든 건축들이 목제였다. 살림집은 다가 아름드리의 굵은 송목을 잘라 지은 귀틀집인데 그것도 계단을 밟아 오르게끔 모양좋게 지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정원도 널찍널찍 잡아서 마을이 대단히 커보였다.

   교회당이 있고 학교도 있다.

   마을한복판 제일큰 살림집이 바로 최재형의 것이라 했다. 당연히 그럴만도하다. 빈궁에 시달리다가 9살나이에 부모따라서  여기에 온 그역시 개척자의 일원이 아니던가. 그래서 마침내는 로씨야국적을 얻었고 학교를 다니면서는 이름도 베트루쯔오라 고치였다. 이 베트루쯔오가 청년에 이르러서부터는 기지민활한 활동가로 자라났다. 로씨야군대와 교섭하여 우육류(牛肉類)를 납품하는 군대의 용달상(用達商)을 경영하여 거만(巨萬)의 재산을 모았다. 그는 삶을 자체로 영위할 줄아는 억센 사나이였다. 낯선 이역에서 온갖 역풍을 무릅쓰고 이같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는 성실한 인품과 자애로운 덕성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동족에게뿐만 아니라 일반 로씨야인에게까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였다.

   《그분은 제 동포들 속에서는 물론 로씨야인들에게도 인망이 높아 도헌(都憲)으로 되였지요. 그리고 직무를 충실히 집행한 공으로 수도 뻬제르부르그에까지 가서 황제를 알현했던겁니다. 훈장을 5개나 받은 분이지요.》

   유진률이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알려주었다

《최재형선생은이곳연해주에있는동포들을위해서민생안정과민족교육에전념하시지요. 저기 저 커다란 학교를 보시오. 저것 역시  선생께서 사재를 희사하여 지은 겁니다. 어디 그것뿐인가요. 도헌직으로 받는 년봉은 몽땅 동포학생을 류학시키는 학자금으로 내놓은겁니다. 그이는 이곳 한인회장입니다. 그이한테 방조를 받지 않은 교포가 어디있다구요, 신세지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우리 신문사 역시.》    

   전에 이달문이나 계화한테서 듣은바와 같았다.

   리범윤, 안중근, 류린석, 홍범도... 의병의 거두며 망명지사로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던 것이다. 중등키에 단단하게 생긴 50대의 사나이가 구면인 유진률기자를 따라 자기네 집에 온 초면의  두 젊은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르신님의 선성은 제가 고향서부터 들어 알고있습니다만 인제야 찾아뵙게 되여 미안합니다. 그지간 옥체무강하셨습니까?》

   서일이 무릎꿇고 큰절을 올리니 최재형은 되려 송그스러워 하면서 물어보는것이였다.

   《뭐라했더라, 고향서부터 나를 알고 온거라?... 고향이 어디게?》

   《함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동입니다.》

   《어이구, 이거! 그렇다면 한고향친구로구나! 하하하...》

   이렇게 반가와할 변이라구야! 최재형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어서 일어나라며 서일을 두손잡아 일으켰다.

   《성명을 어떻게 쓰느냐?》

《서일이라부름니다. 애명은 기학이구요. 저의 조부님도 그러시구 부친님도 그러시구...로씨야에 가거들랑 선생님을 찾아뵙구 안부 꼭 전하랍디다. 저의 부친은 명함이 서재운입니다.》

   《이런! 하하하... 서재운이면 내 소시적의 딱친굴세! 잊을리 있으리오! 난 뒷마을 이동이구 재운이는 앞마을 금동이구. 한동네는 아니지만 사이가 코앞이라 늘 같이 놀며 자랐지. 반갑구나, 정말루 반가와!》

   최재형은 전에는 가끔 들어서 소식을 알았노라면서 근년들어 조부와 부친의 건강은 어떠한가고 물었다. 서일은 변고없이 다 무사히들 보낸다고 아뢰고나서 느낀바를 말했다.  

  《오늘 와보니 어르신님은 과연 자애심많은 분이거니와 의를 위해 싸우시는 혁명가답습니다.》

  《허허! 칭찬이 과분한걸... 내야 응당해야 할 일을 하고있을 뿐이네.》

   최재형은 겸손한 분이였다.

   서일은 그의 앞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자기가 불시에 집을 떠나 여기로 오게 된 연유를 알려주었다. 최재형은 아 그런가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한번 와서 연해주가 어떤 곳인가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가는것도 나쁘지야 않지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이 땅에서 혁명이 일어남으로 하여 급변하고있는 로씨야의 정세와 그로 인한 사회의 질서 안정상황에 대해서 말했고 이런 속에서 동포들의 의식변화와 상호협력과 난관에 대해서, 망명애국지사와 산발적으로 쓸어드는 의병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을 안둔시킬 문제가 긴박하다는것과 의병대지간에는 지반과 지위쟁탈로 불화와 모순이 생겨 그것이 골치거리로 된다는걸 숨기지 않고 말했다.

  《어디로 가나 그놈의 오그라질 당파심!》

   서일은 기분이 상해서 내뱉았다.

그들은어느덧격세지감(隔世之感)이 없이 속심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연해주조선사람들

   한데 서일은 여기서 이달문도 계화도 만나볼수 없어서 섭섭했다. 그들은 지금 연해주에 있지 않았다. 얼마전에 만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동호군수는 만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는 홍범도의병진에 합치였고 홍범도는 이곳에 있다고 한다.

   최재형은 서일보고 떠날 때까지 맘놓고 자기네 집에서 류숙하라면서 그와 유진률과 밤을 패가면서 과거지사를 얘기했다.

   로씨야가 생각한 것 같이 그렇게 자유롭고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부유해질수 있는 곳은 아니였다. 이만큼이라도 살아나갈수 있게 자리매김을 한 그 력사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였다.

   1864년 봄에 함경도는 민간의 식량이 절핍(絶乏)되여 먹을것이 없었다. 무산사람 최운실(崔雲實)과 경흥사람 양응범(梁應範)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못해 결사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의 훈춘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우쑤리강을 건너 여기 이  연추(煙秋)에 왔다. 언어불통인데다 로씨야인과는 생활풍속도 달라 모두가 생소했다. 그러나 그들은 애로를 극복하고 피땀흘려 개척한 보람으로 첫해에 수확을 거두어 토대를 잡았다.

소문이국내에퍼지자삼수갑산의세궁민(細窮民)들이 결사적으로 도망쳐 왔다. 최운실은 자기의 량식을 모두 내놓아 추위에 떨고 굶주린 그들을 먹이고 살리였을뿐만아니라 빈민 35호를 데리고 추풍(秋風)에 가서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해의 6월에 또 60여호가 부녀자를 거느리고 와서 로씨야군관이 밀을 주어 아사를 겨우 면하게 하였다. 게다가 1867년부터 7년간 이곳도 흉작이 련속 들어 굶어죽는 동포가 속출했다. 로씨야군이 자기들의 군량에서 얼마간씩 갈라주었으나 그래도 살기 어려웠다. 나무뿌리와 풀뿌리를 캐여먹다못하여 하는수 없이 부자가 갈라지고 부부가 헤여져 사방으로 방황하였다.

그러나청나라중국인들은좋은기회라여기고  여기에 와서 량식으로 교포의 처자들을 사갔다. 어떤 자는 지어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함께 사갔으니 그 처참한 광경은 눈을 뜨고는 보지 못할 지경이였다...그러했음에도 고향서는 살수 없어 떠나오는 이들, 굴함을 모르고 억척한 동포들에 의하여 쌍청(雙城)이 개발되고 우운현(烏雲縣)이 개발되였다. 해삼위(海參威)에 생겨난 개척리(開拓里)는 최초 5호가 자리잡고 개척한 마을이였는데 1년이 못되여 신한촌(新韓村)이라 호칭하고 양옥이 즐비하고 교회당과 학교도 서게 되였다. 안씨와 김씨에 의하여 개척된 흑정자(黑頂子)는 라선촌(羅鮮村)이라 불렀는데 몇해를 지나지 않아서 큰 부락으로 변하였다. 거주민이 계속 증가하고 가축은 번성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여나면서 생활은 점점 활기를 띠여갔다...

  《이토록 터를 닥자니 오죽했는가. 어느핸가는 빈민 96인이 배를 타고 추풍으로 가려다가 해삼위에 이르는 해상에서 22인이나 빠져죽고 그 나머지는 겨우 구출되여 만난을 겪으면서 쌍청을 개척한 걸세.》

   최재형의 말이였다.  

   그 말을 서일이 이어받았다.

  《살길을 찾아 헤매다가 그 모양으로 죽음을 당한 자 어찌 한둘이겠습니까. 저 만주쪽 압록강, 두만강물은 그대로 귀신의 호곡성으로 되여 들립니다. 후ㅡ 이러나 저러나 수난을 겪어야 하니 어찌보면 이 민족은 수난의 명을 타고난 것만 같아서 민망스러울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제 손으로 제 명을 건지지 못하는 신세의 민족으로 태여났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리도록 저려나는 서일이였다.

   유진률기자는 지금 로씨야에 거류하는 한국인은 세가지 형태로 분류된다고 알려주었다. 1883년 이전에 이주해 온 이들로서 로씨야에 귀화하여 토지를 자유로이 매매(賣買)하고 로씨야인과 다름없이 영주(永住)하고있는 사람, 로씨야에 귀화와는 관계없이 사유의 토지를 차입하여 몰래 토지를 소유해온 사람, 사유토지를 전혀 가지지 못해 소작생활을 하는 사람.

   《아편장사를 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다. 로씨야에 거류하고있지만도 정당한 노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면서 그 짓을 하고있지요. 이런 현상이 생기니 로씨야정부는 로씨야에 거류하는 조선인이 연해주에 대하여 경제적인 침투를 한다, 목재를 람벌하여 홍수를 일으키게 한다, 산야가 황페되여 생명과 재산마저 탕진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느니뭐니 비난하기 시작하지요.》

   《감탄고토(甘呑苦吐)라 이제는 뱉어내자구 트집잡는거야. 말을 다 해야 알겠는가. 연해주개발이 어느정도 완성됐겠다 이제와서는 우리 사람이 더이상 쓸모가 없겠다구 여겨져서 배척을 하는 판이지.》

   최재형이 격한 음성으로  분석하는 말이였다.

   그의  분석을 듣고보니 서일은 언젠가 자기가 학생들 앞에서 일본이 조선을 완전강점하게 되면 조선민족은 그자들의 노예로 전락되거나 아니면 씨비리나 화태쪽으로 쫓겨가리라 말한 것을 새삼스레 상기했다. 과연 그렇게 되여가는것만같았다. 최재형어른은 벌써 그런 경우를 감촉하고있었다.

리범윤을뵙다

   유진률은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로 돌아가지 않았다. 의병진을 함께 돌아보고 동포사회를 같이 료해하자는 것이였다. 서일은 그러자고 했다.

   두사람은 먼저 리범윤부터 방문하기로 하고 이틑날 하선마구(哈什媽溝)로 갔다. 거기에 의병본부가 있었다. 그것은 리범윤이 최재형, 김익선, 박춘근과 함께 대일항전을 하고자 설치한 것이였다. 또 한편으로는 지난해, 즉 1907년에 한국군이 강제해산을 당하자 그들중 일부는 여러 의병대에 가담하여 혹은 북간도로 가거나 혹은 연해주로 이동한 것인데 그런 의병대중에 홍범도의병대와 차도선의병대가 이곳 연추(煙秋)로 왔기에 경제적인 기반이 있는 최재형은 그들을 도와 의병진을 새로 정비하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 며칠전에 리위종(李偉鍾)이 뻬제르부르그로부터 군자금 1만루불을 지참하고 와서 리범윤은 600명의 의병진을 바탕으로 최재형과 함께 사포대(私砲隊)가 사용하던 무기를 가지고 대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이 메마른 쉰살넘은 사나이가 자기를 찾아 온 두 젊은이를 창너머로 내다보고 있었다.

  《리관리사어른 안녕하십니까?》

   유진률이 허리굽석 인사를 하는데 저쪽은 또 무슨 소식감을 벌려구 분주를 떠느냐고 롱담절반 진담절반했다.

  《오늘은 제가 리관리사어른께 멋진 친구를 사귀라고 복무를 하지요.》

   리범윤 하면 동포들은, 특히 함경도사람이면 누구나 다 거룩한 위인으로 우러러 보고있는데 간도관리사노릇을 할 때의 옛 직함을 서슴치 않고 불러가면서 수작질하는 것을 보면 아주 숙친한 사이라 허물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이는 또한 아량있는 리범윤의 포섭력을 말해주기도 하겠다.

  《함북도에서 온 서일이 선생님께 문안드립니다.》

   서일은 그의 앞에 다가가서 국궁재배했다.

  《오, 그렇소! 함북 어디요?》

  《경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총소리를 들었겠군.》

   리범윤은 다시금 서일을 아래우로 훑어보았다. 그 눈매가 유기자가 나보고 사귀라며 데려온 사람이 바로 너냐묻고는 약국의 약제사가 약처방을 다루듯이 대방이 갖추고있는 인격과 그 분량을 가늠하는것이였다.

   《저는 어른께서 흩어진 군사를 다시모아 건곤일척의 대결을 계획하신다는 소식을 듣고왔습니다. 기쁩니다. 아무튼 수고많이 하시여 전과를 올려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난 소문만 냈지 그닥 유능한 사람은 아닐세. 패전이 수두룩하니.》

   《아니옵니다. 병가일패(兵家一敗)는 인지상사(人之常事)라 99번 패하다가도 최후의 승리가 병가(兵家)의 궁극적 목표이지요. 패전이 수두룩하다고 의기저락할 필요는 없는가봅니다.》

   《오, 그런가!... 헌데 여보게, 젊은이는 대체 뭘하는 사람이오?》

   《소인은 경원학교서 교편을 잡고있습니다.》

   《뭐라! 훈장질을 한다는 말인가?...》

   리범윤은 일개 교원의 입에서 군사리론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놀라는 한편 대견해 하는 기색까지 짓더니 근중을 떠보느라 당면의 의병투쟁을 어떻게 보는가고 넌짓이 물어왔다.

   서일은 그가 그러는것이 좋았다. 바다너머 멀리 여기로 온 목적의 하나가 의병을 통솔하고있는 이런 분들게 한마디 충고를 하자는것이였다. 자진해서 물어보고있으니 어려워말고 제 견해를 기탄없이 피력해야 한다.

   《소인은 글방선생이다보니 실전경험이란 있을수도 없습니다만 그지간 보고 듣고 분석한바가 있어서 장군앞에서 감히 말씀올리려 하오니 소행이 외람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워말고 말하게. 내가 듣자고 귀를 세우지를 않는가. 어서 말해보게. 어서!》

   《그럼 하지요. 첫째는 지금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하나의 힘으로 단합시켜야 한다 그겁니다. 의병장들이 제각기 분산적인 활동에 치중한 나머지 한 구역안에서도 그렇고 린접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의병대와도 그렇고 협동작을 잘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략을 모르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적은 이 약점을 리용하여 강력한 토벌력량으로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쓰고있는겁니다. 이제는 두달이 되였구만요. 7월 2일에 리강년장군이 왜놈손에 체포된걸 아시겠지요. 린접부대들과 얼마든 련합과 협동작전을 실현할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지를 않았지요. 저는 신문지상에 보도된걸 못봤습니다. 협동작전을 한다는 소리를 말입니다. 리인영의 의병대도 그렇고 신돌석의 의병대도 그렇고 리강년의 의병대도 그렇고...통합과 련합작전을 한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러지를 않아서...》

   《말이 맞았어! 과연 옳은 충고일세!》

   리범윤은 서일을 향해 자기는 귀담아들을테니 말을 더 해보라했다.

   《각지 의병들은 새로운, 이를테면 다른 의병대에서 정찰, 위장 등 효과적인 전술을 썼다면 그를 응당 참고해서 적용해야 할것입니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상병벌모(上兵伐謀)라했습니다. 상병(上兵)이란 병사를 쓰는 법(法)이요, 벌모(伐謀)란 모략으로써 적을 공격해 승리한다는게 아닙니까. 모두어 말하면 병사를 씀에 제일 첫째가 모략으로 적을 전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보시오. 통일적인 단합도 없이, 전체를 맡아 지휘하는 통수도 없이, 의병장 개개가 모래알같이 흩어져 제멋대로 싸우고있습니다. 일정한 전술도 없이 싸움을 벌리다보니 결국 실패하고말지요. 목숨만 잃고.》

   리범윤은 곰곰히 듣더니 머리를 주억거렸다. 조금도 틀리지 않는 말이였다. 그한테 그 누가 이같이 투철히 말해주었던가? 없다. 오늘 함북도 경원에서 온 28살의 서생티가 물씬나는 교원 서일이가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아무리 군자라도 아이의 말도 옳으면 귀담아들으라했다. 리범윤은 자기가 오늘 뜻밖에 명지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되여 고마와했다.    

   리범윤은 여직까지의 의병항쟁을 한번 돌이켜보았다.

   의병항쟁의 첫시기부터 의병장들은 그 누구를 물론하고 결사(決死)를 맹세하고 싸움에 나섰으나 적들과의 치렬한 대결이 벌어지고 투쟁이 오래지속됨에 따라 동요하면서 우유부단한 행동을 하고있다. 특히 유생들은 백성들의 투쟁기세에 고무되여 의병을 조직하기도 따라나서기도 했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리용하여 의병장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가, 적과의 치렬한 싸움판에서는 외려 용감하지 못하거니와 뒤꼬리를 따라다니다가 대오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아예 항쟁을 포기하기도 하는것이다.

   그는 서일과 같이있고싶었다. 자기의 참모가 되여줬으면 오죽 좋으랴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었다. 서일은 아직 의병에 나설 맘은 없는 사람이였다. 돌아가서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려는 사람이였다.

안중근황병길과어울리며

1

   서일은 연해주에 온지 8일만에 안중근과 황병길을 만나게 되였다. 그간 아즈리, 시즈미, 사무와투리와 소왕령 등지를 나돌다가 의병본부가 있는 하선마구(哈什媽溝)로 되돌아온 안중근과 황병길은 거기서 리범윤으로부터 총명이 과인해 손만 잡아주면 전도가 유망할것 같은 젊은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한번 만나보고푼 생각이 든건데 며칠전에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러 온 경원군의 원 군수 리동호어른이 그들앞에서 또 서일의 사람됨을 자랑하는지라 일부러 보려고 연추(煙秋)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최재형댁의웃방이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산들바람이 들어왔다. 방안에 홀로앉아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열심스레 들여다보고있던 서일은 인기척에 고개를 번쩍 치켜 자기 앞에 문득 나타난 두 젊은이를 보았다. 둘다 중등키였는데 얼굴이 동글스럼한 청년은 자기를 황병길이라 소개했고 머리에 캪을 쓰고 팔자코수염을 기른 젊은이는 자기는 안응칠이라 자아소개를 했다.  

  《나역시 한때는 훈장질을 했소. 지금은 안응칠이 됐지만 전에는 안중근이라 불렀소. 서선생이 경원서 교편잡고있다는 소리를 리군수님께서 들어 알게 되였소. 나이는 올해  28이라는것도. 그러니까 서선생은 1881년생이겠지. 난 1879년도생이요. 생일은 구력으로 7월 10일이구.》

   안중근이 하는 말이였다.

  《내보다 두 살 손우니 형님벌이 되는구만요. 4월초순에 경흥의 로서면에 있는 일본수비대를 야습한게 안형의 부대 아니였소? 전번달 10일날 새벽에 신아산분경대를 습격한것도...듣자니 그때 두만강을 건너와 참전한 의병이 200명이나 되리라더구만.》

   그와 통성명을 하고나서 처음주고 받은 말이다. 안중근은 자기가 한일을 생생히 기억하고있는 서일을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음지였다.  

   황병길이 제 나이는 26살이라면서 자기도 한동안 교원노릇을 한 경력이 있노라했다. 서로가 처음보지만 하나도 서먹해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걸보고 인면이 여구(一面如舊)하다는 모양이다. 이건 아마도  의기상투(意氣相投)해서일 것이다.

   《안선생, 건데 이름은 왜서 고쳤습니까?》

   《안중근이라구 하면 어떤 사람은 듣기 싫어하거든. 그 이름 그대로 갖구서야 누가 나를 믿고 따라주겠소. 그래 생각던 끝에 연해주에 와서는 안응칠이라구한거요. 그건 나의 애명이요. 솔직히 말해 여기 사람들한테만은 인상을 좋게 심어주자고 맘먹었던거요. 》

   안중근은 말하고 웃었다.

  《안중근이 어떻다구서?》

   서일은 혼자소리로 뇌이면서 웃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려서 경원의 건달녀석한테 멋없이 놀림당하고나서 밸을 못이여 제 이름을 고쳐버렸던 일을 되새겼다.

   한데 그가 애명을 버리고 이름을 서일이라 지은것과 안중근이 되돌아가 애명을 쓰게 된 사정은 아주 달랐다. 안중근이란 이름은 그가 국내에서 애국문화운동을 할 때 부르던것으로서 일경에 많이 알려졌으며 또한 반일의병장들은 더 기억하고있었다. 로씨야로 건너올 때만도 의병장들은 애국문화운동에 대하여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 이름을 가지고는 의병장들과 접촉하기가 매우 불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애명을 다시 쓰게 된 그였다.

   안중근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로 유명한 황해도 해주 수양산밑 광석천변에 있는 옛집에서 진사(進士) 안태훈(安泰勳)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등에 박힌 북두칠성과 비슷한 흑점 때문에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명명하였다.

   안씨가문은 지방의 무반호족(武班豪族)으로 해주에 세거(世居)하여 명망과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중근의 조부는 일찌기 진해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동학란(東學亂)때 18세나는 김창수(김구)라는 총각 접장이 포군부대를 거느리고 황해도에 출몰하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관군(官軍)을 괴롭혔고, 산포군(山砲軍)의 소년장군 안중근은 신동의 대장이라는 용명을 떨쳤다. 후에 소년 안중근은 아버지의 배려로 김창수를 포용(包容)하였는바 두 소년은 장차 조국의 운명을 걸머지려는 혈맹(血盟)을 맺기에 이르렀다는 말이 나돌았다.    

   나이 청년시기에 이르러 안중근은 천주교 신부가 교육과 계몽으로 실력배양에 힘쓰라는 권고에 의하여 진남포교회의 프랑스선교사가 경영하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자력으로 인수하여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다 얼마지나지 않아 평양에서 열린 국채상환(國債償還) 대강련대회에 갔다가 자기를 비웃는 일본사람을 빈사상태에 이르도록 뚜드려 팬 일로 해서 경찰이 체포하려기에 몸을 피했던것이다. 그는 로씨아로 탈출을 목적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동만에 있는 개산툰 석문(开山屯石门) 너머남양평(南陽坪)일대에서 머무른 흔적을 보이고있다. 그러다가 그는 룡정과 국자가(局子街)를 경유하여 마침내 목적지인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여 신한촌(新韓村) 김치보()댁에 여장을 풀고 각계의 명사방문으로 일과를 삼았던것이다.      

   그때 회천(回天)의 경륜을 가진 리범윤을 만나보니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나 소극적이였다. 하여 안중근은 일대 용단을 내려 리범윤을 설득하였다. 성패리둔(成敗利鈍)을 헤아리지 말고 당장 의로운 청년을 모집하여 국내로 진격하여 겨례의 사기를 북돋아주자는 안중근의 열정에 넘치는 뜻이 감동을 주어 리범윤은 다시금 의병항쟁을 서둘렀다.

   일은 되여갔다. 안중근, 황병길, 엄인섭, 김기룡 등의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마침내 1908년 초에 300명 가량의 의병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2

    이 기간 황병길은 무기를 구입하느라 고생을 많이했다.  

   《왜놈이 침략하지 않았더면 그런 고생은 없었을 것을.》

    서일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문약으로 약소민족이 돼가면서도 달덕을 구하려다 결국은 이지경에 이른게 아니겠습니까.》

   황병길이 회심(悔心)에 잠겨 하는 소리였다.

   《고륜지해(苦輪之海)라고 고뇌가 끊임없이 운전하는 이 사악한 세상에 달덕(達德)이 어디있어 그걸 찾는단말이오. 현실적이 못되는 그따위 환상은 언녕 버렸어야 해. 렬강이 득세를 부리는 세계를 똑바로 보고 연구했다면 제 민족이 살아나갈 길을 언녕 모색해 냈을거야. 상무(尙武)의 기풍을 어느만큼이라도 수립했어도 쇠약이 이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남의 침탈의 대상으로는 되지 않았을 것을. 병길이, 안그래?》

   《그렇지요. 서형의 말씀이 들어 맞습니다.》  

   《론어에도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충족한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거늘 우선 외침을 막기 위해서도 국병은 잘키우고 국방은 잘 건설해야 할게 아니요. 하지만 우리는 여직 어떻게 했는가 좀 보란 말이요. 원...》

   안중근은 문약으로 국방마저 강화할 것을 잊었던 과거를 원망했다.

   《도포입고 유건쓰고 당나귀타고 추풍월색이나 읊조리면 그게 지고지상인줄로 알고 만세를 선비나라로 유지하려 했으니 한심했지요.》

   서일은 자국민의 부족점을 이만큼 비난해놓고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 세상이 돌아가고있는 꼴을 좀 보시오. 렬강들은 앞장을 다투어 약소종족을 정복하고 소멸하는 것을 마치도 강대국사람들이 다해야 할 의무로 간주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독재가 생겨나고 인권유린이 생겨나며 따라서 그것은 점점 극성을 부리는 정도에 이르는겁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에 와서 강행하고있는 통감정치를 보시오. 그것이 바로 표본이지요.》

   《그렇소. 과연 면바로 보아냈소. 일본은 정책을 변화시킨다고하나 그것은 공언에 지나지 않는거요. 누가 그자들을 믿을가, 5역신--7역신 놈들을 내놓고서는. 세월이 갈수록 원한만 쌓여 뼈속에 사무치게 되니 이 원쑤는 만세에 가서도 꼭 갚아야 할것이요.》

   안중근은 부르짖고나서 통감 이또 히로부미에 대해서 말했다.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 가장 대단한 권력가는 아마 이또공작일거요. 그런자가 통감이 되여 한국에 와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해놓은 것이 뭔가를 보란말이요. 병력을 사용하여 5개조와 7개조의 협약을 강제로 성립시키고 조선의 상하 국민을 기만한 것 밖에는. 오늘도 반일의 기치를 든 의병들은 계속 싸울것이며 적탄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질 것이요. 야수와도 같이 잔인무도한 그자들의 손에 학살된 무고한 백성은 또한 얼마일가?...》

  《이또 그자야말로 침략의 괴수로서 보살의 탈을 쓴 살인마지요. 힘으로 남을 억누르면 자신이 위태하다는 걸 알련만...》

  《머리가 뜨겁도록 자랑할 궁리만 하다보니 자신의 목숨을 돌볼 새나 있겠소. 조선인은 상하구별이 없이 행복해 하며 만족해 한다고 세상에 공포한것만 보오. 얼마나 뻔뻔스럽고 한심한 거짓말쟁인가구.》

   안중근의 말이였다.

   그들은 어느덧 화제를 스티븐즈의 죽음에로 돌리였다. 그자는 온 2천만 국민이 개 돼지만도 못하게 여기면서 죽도록 미워하고 저주하고 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는 역적 리완용을 충신이라면서 이또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조선은 큰 행복이라니 동양의 대행이라니 나발불었으니 워낙 죽자고 환장을 한것이라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티븐즈를 사살하려고 총을 쏜 장인환과 전명운의 의거를 찬양했고 지금 미국, 하와이, 멕시코, 만주, 중국, 국내 각지에서 두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기부금모집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고있는데 대해서도 찬양하고 지지하는 태도로 운운했다.  

  《스티븐즈를 쏘아죽인 것은 그 사람을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원쑤를 갚으려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한즉 장인환, 점영운 이 두 사람의 재판은 개인문제가 아니오,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건 재판인겁니다.》

   서일의 말이였다.      

  《나라의 원쑤를 갚았다, 조선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건 재판이다... 과연 옳은 말, 옳은 평이요!》

   안중근은 흔쾌히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또 히로부미를 보아라 유능한 그 정치가는 늙었어도 꾀가 많아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느라 발분망식(發憤忘食)을 하고있지 않느냐, 대체 어떻게 생긴 령감인지 그 몰골을 한번 보기라도했으면 좋겠다.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도 그래 제 수명까지 마음 편하게 살수 있을까 했다.

   이 순간 안중근의 눈에서는 경멸과 증오의 불길이 황황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원쑤에게 죽음을 주려고 맹세하는 사람에게서만이 있을수 있는 것이였다.

   서일은 이 시각 그와 황병길의 앞에서 나는 이또통감을 보았다, 그는 몰골이 어떻게 생긴 백두옹이더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뜻밖에 본것이라 경악(驚愕)하기만했던 일순간이였다. 말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입을 봉하고말았다.

류린석어른

   류린석은 지난해 1907년에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의 각 창의소(倡義所)에 거족적인 항전의 전개와 지구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종래의 체험에 비추어 외국의 지원없이는 일제와의 행장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국외의 망명기지로는 만주보다 로씨야가 기지구축도 그렇고 국내의병에게 무기지원도 그렇고 본토수복잔전을 전개함에도 최상의 길이라 판단하고 7월에 막료인 임정빈(任正彬), 리진용(李鎭龍) 등과 함께 부하 60여명을 대동하고 원산항에서 연해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류린석은 연추에 본거를 두고 우선 부하들의 취업, 생계를 마련했고 최재형, 리위종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동의회(同議會) 회장에 추대되면서 이를 장의회(彰議會)로 재조직하여 의병을 규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 연해주 구경이 어떤가?》

   서일을 다시보자 그가 물어보는 말이였다.

   《마을 몇 개를 돌아봤을 뿐이니 구경이야 시원치 않습니다만 유진률기자와 최선생어른으로부터 이곳의 상황을 상세히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구 어제는 안응칠과 황병길을 만나 하루를 보냈습니다. 고향의 리동호군수님도 여기서 만나보구요. 연해주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동만의 홍범도부대에 계시지요. 무기를 구입하러 오셨길래 마침 만날 수 있은겁니다.》

   《그분은 군수자리에 있으면서 의거를 했다는 말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올봄에 고향서 30명을 모집해서 나가셨습니다. 저의 학생 9명도 그분이 데리고요.》

   서일은 제자 9명중 3명은 전사했고 가족에도 알리지 않았으니 이제 돌아가면 아마도 자기가 뒤처리를 해야겠다고 했다. 류린석의 병색이 도는 얼굴에 그늘이 짙어지고있었다. 풍상많은 세월속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제자의병들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서일은 머리에 얹은 상투를 지켜주느라 검은 유건을 단정히 쓰고있는 이 66세 로인의 살결적은 근엄한 몰골을 바라보면서 전에 개화파(開化派)면 몰잡아 적으로 보고 비난해 온 완고한 유생종장(儒生宗匠)이 지금은 심기가 어떻게 돌아가고있을가 속으로 점쳐보았다.

   유명한 것은 10여년전 그가 자기의 의병진을 인솔하고 만주 료동의 초산아이성(楚山阿夷城)에 이동하면서 내린 격문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이다.

 

...販君賣國之徒 接跡起於斯 稱爲萬國開化 而締結世讎之狡夷 輾轉搆禍 弑殺一國之母后 辰我至尊之君 上驅我先王赤子而禽獸焉 汚我先正制作而糞壤焉...

   

   이 글에서 류린석은 개화파를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라고 규정해놓고는 그들이 만국개화를 사칭하여 천하에 홀로 남아있는 례의지국인 조선을 패륜(悖倫)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그들이 지은 죄악 세가지를 들었다. 즉 오랜 제도를 더럽힌 죄, 례의를 짓밟은 죄, 국모를 죽게 한 죄. 그리고는 지금 조국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감은 기필코 원쑤를 갚고 동방의 례의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까지 이역에서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옛제도를 지키다 죽어서 귀국할 것이라했다.

   그는 강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소신을 밝히면서 특히 일제보다 구라파의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하려는 개화파를 매국노로 단정하여 강력히 성토함과 동시에 생명이 다할 때까지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었다.    

   서일은 류린석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조심스레 충고의 말 한마디를 꺼냈다.  

  《일개 무명인이 이러면 외람된 소행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쭙고싶은 것이 하나 있어서 다시 뵙습니다. 보시다시피 정세는 부단히 변하고있습니다. 지금은 전만 달라 대세가 단합의 길을 바라고있습니다. 의례 그래야지요. 의병항쟁과 애국문화운동이 본래 동일한 목적인즉 계속 대결하면 자상뿐이니 종식하고 이제는 통합의 길로 나아감이 지당한줄로 압니다.》

류린석은곰곰히듣더니자기의태도를표명했다.

  《젊은의 충언이 사심없고 일리가 있는건데 외람될거 뭐겠는가. 그러잖아 나도 머리가 그리로 돌아 생각을 많이 해본걸세... 어제 바로 우리는 회의를 개최하고 토론을 했었네. 각자 립장과 태도를 모을 때가 돼서. 내가 말했네. 지금소위유신혁명지당이내외에가득차서세력을가지고있으니이세상그들과군사행동을같이하지않을수없다말이네.》  

   그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니 서일은 안개가 걷히듯 흐릿하던 속이 개운해지기 시작했다.

   이틑날 그는 연해주를 떠나 고향에 돌아왔다. 뜻깊은 연해주 쾌속려행이였다.

3명 학생  추도식

서일이돌아가자경원학교는개학을선포했다. 그러나 첫날은 교학을 하지 않고 의병에 나가 목숨잃은 3명 학생의 유상(遺像)을 놓고 추도식을 거행했다. 사생 모두가 숙연히 머리숙여 희생자의 생전을 기리면서 영혼의 안식을 빌었다.

   오사기 겐다로가 학교에서 추도식을 여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왜서 맞지 않습니까? 우리 학교의 학생인데, 제자가 비명에 죽었는데 그래 추도마저 하지 말란말입니까? 우리 조선사람은 그래 감정마저 메말라 살라는 말입니까?》

   서일이 따지고들엇다.  오사기 겐다로의 입으로는 이를 막아내는 재간이 없였다. 교장이 이러고 나왔거니와 사생모두가 일본인 교감의 말은 개방구만도 못여겼던것이다.

   서일이 연해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열게 된 이 추도식에 희생자가정과 친척은 물론 경원읍내 주민들이 많이 참석해서 학교운동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오사기 겐다로는 놀라 상급에다 다음과 같은 보고를 써올리였다.

  경원학교에서는의병에나간학생 3명이 죽었다 하여 사생모두가 공공연히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교학마저 전페하였는바 이를 주도한 사람은 물론 본교의 교장인 서일이다. 그는 교감인 내가 비준하지 않았음에도 그같이 한것이다. 주민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보아하니 온 고을이 몽땅 반일의병과 관계되고 우리의 적인것 같다.

       

   이같이 하면 서일을 다스릴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였다. 허나 그것은 오산이였다. 이때에 경원학교에 들어온 두 일본인 오사기교감과 이와데 주다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하나의 불쾌한 소식이 온 함북도에 쫙 퍼지고 있었다. 라남수비대에서는 의병대와 싸워 패전한 끝에 추도식을 요란하게 했다는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은 중국 당국자들에게 만일 중국이 간도지방에서 조선사람 의병들의 활동을 묵인하여 그들이 조선안에 들어와 활동하게 한다면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면서 또한 로씨야 원동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이 의병항쟁을 벌리는 것을 엄격히 탄압금지하여 달라고 도꼬주재 짜리로씨야 공사와 교섭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외에다 근거를 잡고있는 의병들의 항쟁은 멎지 않고 계속되였다.

   8월에 연해주의 의병들이 수차 두만강연안의 일본수비대를 습격한 뒤를 이어서 9월 3일에는 경성반일의병 200여명이 명천수비대를 습격하고 그곳을 하루동안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라남의 수비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병력이 경성지방에 짐중하게 되였다.

   이에 경성지방의 의병들은 겁을 집어먹고 피하기는 커녕 도리여 토벌에 나서는 적을 타격할 결심을 품고 적의 동태를 탐지해 냈으며 그로부터 승산이 있게 작전계획을 면밀히 짰다. 한주일이 지난 9월 10일날이다. 의병들은 화룡리 범의덕골 고개의 산턱에 매복해있다가 줄지어 무질서하게 오는 토벌대를 발견하고 일제히 사격하여 그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의병들의 돌연적인 습격을 받은 수비대는 련대장 이하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어 녹아나고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추도식을 요란하게 한 것이다.

한편경원학교의선생들은군수따라의병에나갔다가전쟁판에서희생된본학교학생 3명의 추도식까지 하고나서야 마침내 서일은 근본 원산에는 가지도 않고 그지간에 연해주에 갔다왔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한데도 두 일본인 선생만은 깜깜이였다. 어쩌면 영원히 모르고 지낼지도 모른다. 이 학교에는 친일파가 없어 발설할 자도 없으니까. 오사기교감은 서일을 더 의심할 근거도 없었다.

                        리강년의병장순국소식


   조선국내의 반일의병항쟁은 1908년 이해에 전국적 범위로 확대되고있었다. 19세기말에도 의병항쟁은 넓은 지역에서 치렬하게 벌어졌지만 전국적 범위를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의병항쟁이 치렬하게 전개된 중요 지역수는 85개로서 의병항쟁이 일어난 중요 지역보다 일어나지 않은 지점이 더 많았다.

   그러나 1907년 8월이후 현재까지 의병항쟁은 전국을 포괄하고있었다. 즉 의병항쟁이 벌어진 중요 지역의 수가 의병항쟁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수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았다. 의병항쟁이 일어난 중요 지역의 수가 300여개소. 전국 중요도시수의 약 90%를 차지했다. 그만큼 일본침략군과의 싸움에서 희생도 뒤따랐다. 리강년의병장이 그 대표적인 실례라 하겠다.

   1908년 9월 조선의 여러 신문들은 리강년의병장이 9월 19일 사시(巳時)에 교수대에 올라 50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한 소식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리강년은 이해 7월 2일(음력 6월 4일) 충청북도 청풍군 까치성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부상당하여 적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체포한 그를 일단 제천수비대로 압송하였다가 다시 충주수비대로 옮겼다. 리강년이 지나가는 곳마다 민중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애통하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한다.        

   옥중생활 4개월이였다. 그는 나중에 왜놈이 주는 음식은 거절하고 먹지 않으면서 태연자약한 태도로 적을 꾸짖어 그자들로 하여금 조선땅에 들어와 저들이 저지른 죄악을 알게 했다. 사가사 불가욕(士可死 不可辱)이라 즉 《지사는 차라리 죽을것이지 욕을 뵈여서는 안된다》생각하고 빨리 죽기를 각오한 그는 팔역동지(八域同志)들과 장자 승재(承宰)와 종제 강수(康壽)에게 고결문(告訣文)을 보내고 사형대에 올랐다.

   12만의 의병대군으로 서울공략까지 꿈꾸었던 맹장(猛將)은 이같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만은 그가 이룩한 업적과 더불어 력사에 길이 남아 나라를 지키는 후세의 귀감이 될 것이였다.

   경원학교의 선생들은 모두 비통해 하면서 그가 생전에 이룩한,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혁혁한 공적들을 찾아 정리해 보았다.  

 

  1907년:

8월 28일ㅡ 청풍 황강전투에서 왜적 600명을 목베고 전리품로획.

   9월 10일ㅡ 문경 갈평전투에서 왜적 수백명을 전멸.

   10월 22일ㅡ 제천군 신림누치산 유곡에 래습하는 적을 넣어 전멸.

   11월 27일ㅡ 죽령에서 적 60여명을 도륙.

   11월  6일ㅡ 역시 죽령에서 적 600여명을 섬멸.

   11월 10일ㅡ 거듭 죽령에서 적 80명을 도륙.

  1908년:

3월 19일--23일사이 용소동에서 1000명 적의 습격을 받았으나 뛰여난 지략으로 수백명을 도륙. 경성공락을 미룸.

    4월 13일ㅡ 린제 백담사에서 적 수백명을 도륙.

    4월 22일ㅡ 간성에서 적 수백명을 살상하고 단신으로 적장과 겨루어 단번에 목을 베니 적은 전의를 잃고 도주.  

    4월  4일ㅡ 봉화, 내성전투에서 적 200여명을 살상.

    4월  7일ㅡ 재산에서 적 500여명을 살상.

   리강년의병대는 이 전투를 하고나서 강원도와 충청도의 접경으로 진주하였는바 피아(彼我)의 교전수는 실로 매거불능(枚擧不能)할만큼 많았다. 허나 그럼에도 하늘이 무정했던가,  강토와 민족의 수호자인 용맹스러운 의병장은 운이 나빴다. 수천의 적이 무리로 한꺼번에 달려들어 가열처절했던  청풍작성전투, 선봉장(先鋒將) 하한서(河漢瑞) 등 지용을 겸비한 7명의 아군장(我軍將)이 전사하고 사졸이 잇따라서 쓰러졌다. 의병장 리강년도 총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였다.      

 

   한평생 목숨 아껴본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야 삶을 어찌 구하려 하나만 오랑캐 쳐부술 다시 찾기 어렵구나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선생들은 신문에 실린 그의 유작시를 수첩에 베껴넣었다. 서일은 선생모두를 기립시켜 함께 5분간 묵도를 하게했다.

조성환의출현

의병항쟁이전국범위로확대되니일제의탄압역시전례없이가혹했다. 그자들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삼천리강산 온 강토가 점점 무시무시한 사형장으로, 소름끼치는 시체전시장으로, 피바다로 변해가고 있었다.

   살인마의손에의하여학살된수자를보면:

   1907년 7월이후 12월사이에 3627명.

   1908년에 1만 1562명.

   합계 1만 5189명.

   뿐아니라 일제놈들은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를 동원하여 《폭도의 거점을 없앤다》는 당치도 않는 구실을 대고는 닥치는대로 주민들의 가옥을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고 부락을 페허로 만들기도했다.

   1907년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사이만도:

   충청북도에서 1000여호,

   경기도에서 800여호,

   풍덕군에서 450여호,

   강원도 홍천군에서 350여호,

   합계 2600여호.

   영국기자 맥켄지는 한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도시와 마을을 소각하고 파괴한 정형을 친히 목격하고는 다음과 같이 세상에 공포했다.

  나는 이때까지 이렇게 무참하게 파괴된 것은 본 일이 없다...충청북도의 제천은 지도우에서 사라졌다.        

   침략자의 손에 조선의 많은 도시와 마을은 잿더미로 변하여 형체마저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였다. 그중에서도 피해가 특히 심한 곳은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였다.

   목숨은 잃지 않았지만 하루아침사이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함북도 경원쪽으로 단신 혹은 식솔을 거느리고 오는 난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다가 두망강을 건너 만주나 아니면 로씨야로 가려는것이였다.

   그들을 월경시키는 임무를 대한협회 경원지회의 사람들이 맡아나섰다. 한편 신채호의 소개로 신민회에 가담한 서일은 신채호 한사람을 내놓고는 아무와도 련계가 없었다. 배일적인 이 비밀결사의 창시자가 안창호라는 것만 알았지 서일은 그를 보지 못했거니와 면목도 모른다. 그러니 유사시에는 신채호를 내놓고 또 누구를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한데 신채호와도 련계가 끊어진 상태라서 답답했다. 그로부터 조직을 발전시키라는 지시도 받지 않았다.

   경원읍내의몇몇막역지우는물론지어죽마고우이자지기인현천묵이나박기호도서일의신분을모르고지냈다. 그들은 대한협회 회원이였다. 서일역시 자기 학교의 수하 여러 선생들과 함께 그 조직에 가입했거니와 경원지회의 책임자이기도했다. 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회는 합법적이면서 공개된 조직이니 문제시될건 없었다. 하지만 통감부는 이 조직의 활동을 은근히 감시했고 일진회의 세력은 내부로 뚫고 들어오려했다.

   어느날 코등에 안경을 건 40대미만의 사나이가 서일을 찾아 경원으로 왔다. 초면인 그는 서일을 조용히 만나 자기는 성명이 조성환(曺成煥)인데 서울에 있는 태극관(太極館)에서 일을 본다면서 신채호가 오지 못할 사정이니 자기가 왔노라했다. 그리곤 요즘 혼자서 어떻게 지내는가고 물어왔다.  

  《그러니 조선생은 신채호와 관계가 있는 분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내가 찾아왔을가. 제사람이니 믿어도 되네.》

   이리하여 서일은 조직과 련계없어 답답하던 심정이 풀리게 되였다.

  《경원학교에다도 청년학우회를 설립할 필요가 있겠소. 청년수양을 목적으루 해서말이요. 이 조직은 우리 신민회의 산하 비밀조직으로서 청년학생들을 배일적이며 애국적인 인간으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갖추도록 교양하고 이끄는 것이오. 그 책임을 아마도 서선생이 맡아야겠소.》

   조성환은 1874년생으로서 일명 욱(煜)이라며 서울사람으로서 26세에 무관학교학생으로 있을 때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가 발각되여 사형에서 감형으로 무기역에 처하였다가 3년만에 특사되여 참위(參尉)에 임명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직을 사(辭)하고 안창호(安昌浩), 리동녕(李東寧), 리상설(李相卨), 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것이다.

   서일은 그한테서 새 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정황을 상세히 교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