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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 22] 중산기념당

2020년 1월 13일, 오전10시 15분에 중산 기념당에 도착하였다. 중산기념당은 광저우시 월수구 동풍중노259호에 위치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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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기념당


자료에 따르면

광저우 시민들과 해외교포들이 손중산을 기념하기 위하여1929년1월부터 시작하여 1931년 11월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부지면적은 약 4000평방메터이다. 건축설계는 팔각형궁전식 건축이다. 중산기념당은 중국에 여러곳이 있는데 그중에서 광주 중산기념당이 가장 잘 지었고 대표적이라고 한다.


손중산은 중국 2000년의 봉건제국을 뒤엎은 중국 근대의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의 선구자이다. 신해혁명은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고 있던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되어 민족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손중산은 대만, 홍콩, 마카오를 비롯한 전 중국뿐만아니라 동남아 중화권 화교 지역에서도 존경받고 있다. 남경 교외에 위치한 손중산의 묘 이름을 봐도 알수 있다. 1929년 6월 1일 안장할 때 중산묘가 아닌 중산릉中山陵이라고 명칭을 달았다. 이는 그가 현대 중국역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서 묘지명으로 능陵이란 제왕의 무덤帝王的坟墓이란 뜻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다는 표징이다.


중국에서 모택동에 앞선 ‘혁명 선행자’로 평가 받는다. 손중산은 국민당 제1차대표대회에서 국민당 반대파의 반발에도 공산당과 합작하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국경절이나 주요 기념일에 모택동과 손중산의 초상이 걸려 있다. 그리고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칭도, 센양, 등 주요 도시에 공원이나 도로를 중산로中山路 이라고 손중산 이름을 따서 지정한 곳이 많다. 내가 살고 있는 선양에도 도시중심에 “중산공원”이 있고 서탑에서 가까운 곳에 중산로中山路, “중산광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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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유언


광저우 중산기념당에 와 보니 과연 듣던대로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손색이 없을만큼 중산기념당이 장엄하고 웅위로왔다.


먼저 중산기념당에 들어가 관람하였다. 대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정문을 마주하여 손중산 초상이 있다. 왼쪽으로 가면 손중산 생전에 혁명했던 내용을 전시해 놓았다.


“손중산은 광동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의학을 배우고 의사로 활동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혁명에 관심을 갖고 실제 혁명생활에 가담한 후 주로 미국, 일본, 영국 등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생애는 서구의 사상과 중국의 사상을 접목시킨 삼민주의를 창안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삼민주의는 신해혁명을 통해 청정부를 무너뜨리는데 혁명사상으로서, 중화민국 건국후에는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 작용하였다. 삼민주의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안내문에 써 있는 것을 훑어보고 대강당으로 들어갔다.


대강당에 들어서는 순간 놀랐다. 감탄이 나왔다. 강당은 1~2층으로 되었는데 넓고 밝았다. 5000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라고 한다. 큰 강당에 한 사람도 없었다. 유적지에 와서 이렇게 한사람도 없어 본 적은 전날, 깊은 밤에 샤몐 공원에 갔을 때와 이번이었다. 나는 혼자 강당무대에 서서 흥분되어 어쩔줄 몰랐다.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강당 무대에 서니 손중산의 기개가 느껴졌다. 역사적인 장소에 선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무대 위에 서서 자리 쪽으로 사진을 몇장 찍고 독사진을 찍으려고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마침 모녀가 다정하게 무대 위로 걸어 오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내가 먼저 두 사람 같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고 나도 한장 부탁하였다. 마치도 내가 인민대표로 베이징 천안문 대회당에 서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격동되었다. 조금 후 하나 둘 관광객이 들어왔다. 소학교 학생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귀에 이어폰 끼고 해설원의 안내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귀여워 옆에서 한참 바라보면서 아들이 어렸을 때 데리고 와 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였다. 조금후 일행이 와서 같이 더 둘러보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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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기념당 앞을 지나서


강당 안이 크고 넓어 가관이었는데 강당 밖에도 형용할 수 없이 좋았다. 손중산 동상 앞에 예쁜 꽃들로 장식되어 있어 나의 마음도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화단 뒤에 우뚝 서있는 기념당이 웅위롭고 거기에 우뚝 서있는 손중산 동상이 위풍당당하고 멋졌다.


중산기념당 답사는 민문연 광동지부에서 특별히 사진 작가 불산을 청해왔다. 우리는 기념당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사람마다 위치 좋은 곳을 선택하여 독사진 한장씩 찍었다. 나도 정면, 측면, 자리를 옮겨가며 기념을 남겼다. 유독 중산 기념당 동상앞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한 사람씩 독사진을 남기었다. 기념당 위에 새겨 놓은   천하위공天下为公이 마음에 들어 가슴에 새겨 놓으려는 거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위공天下为公“, 천하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천하 만민 모두의 것이다.


언제봐도 멋진 말이다. 손중산은 ‘천하위공’을 신념으로 삼고 신해혁명을 달성했다. 경희대총동문회 학술위원장인 주선생님은 “아, 천하위공, 좋네” 천하위공이 좋다고 감탄하는 소리를 두번 들었다. 나도 중산기념당에서 감탄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손중산은 생전에 업적을 많이 남겼고 또 대단한 분이라 중국문학의 주장인 노신의 글로 마무리하는 것이 더 좋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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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산 동상 앞에서 단체기념 촬영.


“중산선생의 생애는 력력한바 그는 세상에 나서자마자 혁명에 착수하였고 실패를 하고도 혁명을 계속했으며 중화민국이 창건된 후에도 만족감을 가지거나 안일하게 보내지 않고 거의 완성되어가는 혁명사업을 계속하였다. 지어 임종시에도 그는 혁명이 아직 성공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라! 고 말했던 것이다” (주해 1)


그는 개인의 물질적 부귀나 명예, 지위 등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 민족의 안위와 번영만을 걱정하며 평생을 보내었다.


“이전에 없던 중화민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자체가 곧 그의 불후의 비석이며 그에 대한 기념인 것이다. 민국의 국민임을 자인하는 사람이라면 민국을 창조한 전사를, 더우기 그 첫 전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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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기념 사진.


“그는 하나의 전일체이며 영원한 혁명자이다. 그가 한 일은 어느것이나 다 혁명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헐뜯으며 랭대하여도 그는 결국 모든 것이 다 혁명적이었다.” (주해 2)


모든 것이 혁명적이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우리는 중산기념당 답사를 마치고 다음 코스로 향했다.

   

참고자료: 주해: 1 <노신선집>   4, 1989. 4 “중산선생 서거 1주년에 제하여” 428쪽.

주해: 2 위의 책 429쪽.

3. 百度网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