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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 1]  로농홍군工农红军 제4사 성립 옛터

편자의 말: 본 연재 글은 한국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최하는 "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테마의 광저우 지역 항일유적지 답사글이다. 답사시간은   2020년 1월 10일부터 14일까지, 본 아리랑닷콤 특약기자 김춘련(항일명장 양세봉 장군의 외손녀) 여사가 답사 전반 코스를 동행하였다.


답사에 임하면서


2019년 11월 22일, 한국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이 광동답사 중 2020년 1월 10일부터 14일까지 항일유적지 광주 답사 참가 여부 문자가 왔다. 나는 11월 22일, 동행하고 싶었는데 학교 일때문에 못 가서 아쉬움이 남아있던 차라 두번 째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침 학교 일정표를 보니1월 8일까지 학생들 기말고사가 마무리 된다. 나는 속으로 쾨자를 불렀다. 광주에 답사간다고 결정한 날부터 신이 났다. 마음이 설레였다.


1월 5일 민족문제연구소광동지부 김유지 부장이 1월 9일로 하루 앞당기면 어떤가고 문자왔다. 이번 답사 일정에 동관이 없으니 먼저 동관, 장무토, 광주를 보여주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무지 감동되었지만 페를 끼치는 것 같아 사양하였다. 김지부장이 또 문자가 왔다. “9일에 오셔야 제가 10일 선생님 모시고 9시45분에 광주공항으로 떠납니다. 11시15분에 도착하여 박호균국장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번 프로젝트 책임자입니다.” 스케쥴을 9일로 변경을 하였다.


1월 9일 7시40분 심양 도선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11시 30분에 광주 백운 공항에 도착하였다.   나는 공항밖으로 가는 일행 따라 나갔다. “김유” 라고 쓴 종이장 들고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반가웠다. 광주 날씨는 좀 흐렸지만 따뜻해서 좋았다. 심양은 눈이 내려 도시가 백색 세계인데 광주에 내리니 푸른 나무와 꽃들이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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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에서 동관으로 가는 길


3시20분에 동관 김지부장이 계시는 동내로 들어갔다. 문앞에 나와 계셨다.


김지부장댁은 3층 단독주택이었다. 먼저 1층에 짐을 두고 정원 구경 나갔다. 정원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앞에 돌로 만든 둥근 테이블과 의자 4개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또 작은 못이 있었는데 빨갛고 하얀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정원은 푸른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져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동관 김지부장댁 구경도 나한테는 하나의 관광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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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지 부장이 거주하는 아파트 정문 입구.


저녁밥은 김지부장댁 이모가 차려준 한식 반찬을 먹고 동관 야경을 보았다. 야경을 다보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김지부장이 동관에서 가장 이름난 특색 음식을 맛 보아야 동관에 온 보람이 있다면서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과연 맛있는 동관 특별음식이었다. 해서 저녁을 두 끼나 먹었다. 양세봉할아버지(필자는 양세봉의 외손녀 임 )덕분에 융숭한 대접을 받아 몸둘봐 모르게 고맙고 감사하였다.


1.공농홍군工农红军 제4사 성립 터 -화성소학花城小学


중국 광동지역 항일유적지 답사는“김산의 아리랑 로드를 가다”라는 부제로 2020년 1월 10일부터 14일까지 4박5일 진행되었다. 이번 답사는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지부장 김유, 사무국장 박호균)가 주관하였다. 이번 답사는 광동지부 소속 회원들이 틈틈히 <아리랑>과 <김산 평전>그리고 중국에서 발행된 각종 역사 서적을 펴들고 직접 김산과 혁명가들의 길을 따라가며 답사 코스를 개척한 길을 우리가 답사하게 되었다. 답사 일행은 35여 명이었다.


답사 첫날 2020년 1월 10일 10시10분, 나는 김유지 부장과 함께 택시를 타고 민문연 광동지부 배상철 부회장을 만났다. 먼저 그분이 준비한 샌드위치, 우유,생수 등 점심 거리를 버스에 싣고 1진 팀을 마중하러 광주 백운공항으로 향했다.


한국에서는 1진과 2진 두 팀으로 나누어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1진 15명 팀원과 만나 같이 버스를 탔다. 오후 2시 12분 쯤에 첫번 째 답사지 화현 화성소학교花城小学 부근에서 내렸다.


학교 가는 길 옆에 누렇게 시든 갈색 잎과 파란 색 잎사이 줄기에 내 손바닥만한 바나나가 앙증맞게 매달려 있는 거 보고 신기했다. 심양에서 살고 있는 나한테 광주 겨울 풍경은 이국 풍경이나 다름 없었다.


오후2시 10분, 화성소학교 정문 앞에 도착하였다. 학교규모는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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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소학교 정문


박사무국장 말이 이 학교 터가 바로 공농홍군 제4사 성립대회 옛터라고 하였다. 1927년 12월13일, 광주봉기가 실패한 후, 국민혁명군 제4군 교도단, 경위단,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전사 도합 1200여명이 철퇴하는 부대를 따라 포위 뚫고 12월15일에 화현에 이르렀다.


2월16일 화성학교 교실에서 공산당 회의를 열었다. 부대를 재편성하고 앞으로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3개 봉기부대가 합하여 모두 1000여 명, 총1100자루, 대부분은 군관 교도단 학생, 그중 200명은 경위단과 특무영 대원이였다. (주해 1)


   인원수를 고려하여 한 개 사로 편입하고 부대 이름을 노농홍군 제4사라 달았다. 사 아래 3개 퇀-   10, 11, 12퇀을 설치하였다. 엽용叶镛이 사장, 송상도宋湘涛가 부사장, 원육袁裕(원국평)은 참모장에 임하였고 10퇀장 백흠白鑫, 11퇀장 조희걸赵希杰, 12퇀장 요수백饶寿柏이다.   (주해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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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소학교


12월 17일, 홍4사는 화현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홍4사성립 대회를 열었다. 주석대 앞에 낫과 마치, 보총을 수놓은 붉은기가 걸려 있었고 군기 앞에서 설립을 선포하였다. (주해 3)   


아리랑 평전에 보면


광주봉기에 참가한 2백여 명이 넘는 동포 청년들 중에 화현 집결지에 온 것은 겨우 2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는 박진의 두 아우 박근만과 박근수도 있었다. 화현에서 부대가 재편성 될 때 조선청년들은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한데 뭉쳤다. 그리고 장지락, 오성륜, 이영 세 사람의 지도를 중심으로 뭉쳐 이동하고 있었다. 조선인 용사들은 일제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는 조국, 그것을 극복하겠다고 중국 땅으로 왔고 중국혁명 세력을 도우면 조국 독립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참가자 8할이 죽어버렸다. 장지락은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다.(주해4)


박국장이 안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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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화성소학교 종루 설명문   아래: 화성소학교 연혁 간판


홍4사 성립소재지:   화성소학교는 1930년에 건립되었고 원래 낡은 사당이었는데 항일전쟁시기 전쟁의 불길 속에 훼손 되었다가 1987년 해외교포가 협찬을 하여 부지면적이 6500평방메터 되는 작은 규모의 학교를 새로 세웠다고 한다. 현재 효孝특색 학교로 학생수가 대략 200여 명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노농홍군제4사 가 성립된 터 화성소학교를 돌아보고 다음 유적지로 발길을 옮겼다.   


주해1: <순시원이 중앙에 보낸 보고서巡视员给中央的报告>(1928년 4월)

엽좌능 叶左能 저 <해륙풍혁명근거지사海陆丰革命根据地史>,   중공중앙당교출판사   192쪽.

주해 2:   위의 책 “서향전 저 <역사의 회고历史的回顾>, 해방군출판사 1944년 재인용 192쪽.

주해3:   위의 책 193쪽.

주해4: 이원규 <김산 평전> 실천문학사 2006.10 271-2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