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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평전13   제13편  북만으로 이동

13편 북만으로 이동


                   동부전선은 어딜까


청산리대첩이후북로군정서총재서일장군은상해림시정부에올린편의보고에서선후며칠간에걸친청산리전역기간의상황에대해이렇게밝힌있다.

오호라, 3일간 전투에 식량 길이 막히어 5~6개의 감자로 배고픔을 달래고, 하루 낮 하루 밤에 능히 150여 리의 험한 밀림을 동행하거나 전투 후 수백 리의 긴 숲과 눈밭을 걸어 동상에 걸림이 적지 않으나 이를 조금도 탓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독립의 장래를 위하여 희망한 바이더라.

이는북로군정서총재서일장군이청산리대첩을포치하고먼거리지도했으며청산리대첩모든과정을헤아리고속속들이꿰뚫고있었음을알려준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서일장군은 청산리전투 상황을 총화하여 제때에 상해 림시정부에 보고할 수 있었다.

실로1920년은 연변의 반일무장투쟁에서, 북로군정서의 력사에서 획기적인 력사의 한해였으며 련속 로고로 이어가는 한해였다. 이해 10월은 또 일본침략자들의 대거 무장출병으로 인한 경신년대토벌과 전략적 이동중에 있는 반일무장부대들이 서부와 동부 2개 전선으로 나뉘어 무장으로 항격하는 무장투쟁이 서로 교차되며 절정을 이루던 10월이였다. 그런데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일제의 경신년 반침략에 항격한 청산리전투 등은 크게 부각되지만 동부전선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런현상에대해중국조선족력사연구권위인물이고연변대학교수인박창욱선생은경신년대토벌중의동부전선이란연구론문에서대성질호하였다.

과거경신년반침략전쟁을말할청산리전투를크게말하고동부전선의일련의전투에대해서는적게말하거나혹은말하지않았는데이는과거연구중에서나타난착오였다. (85)

어찌하여이런현상이나타났을까?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중국조선족력사연구의 빈구석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개혁개방 후, 더우기는 지난 80년대 이후와 1992년 중한수교 후 한국과의 래왕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조선족 력사학계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성과들을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리념과 편견으로 많이 외곡된 청산리전투가 받아 들여졌다. 청산리대첩은 대소 10여 차의 전투로 이루어지지만 청산리전투가 많이 부풀려지면서 왈리구전투와 어랑촌전투를 망라한  홍범도부대와 안무부대 등 전투들이 가리워졌다.

   동부전선은더구나그러하다. 한국 측에서 동부전선에 대해 적게 말하거나 혹은 말하지 않으니 워낙 연구가 따르지 못하던 중국조선족 력사학계에서도 거의 공백으로 나타나면서 동부전선전투들은 연구가들에게 잊혀진 구석으로 남아 자료연구부터 빵점이였다. 서일장군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나 중국조선족력사연구에서 마땅한 위치를 찾지 못한 것은 서부전선과 청산리전투만을 중시하면서 동부전선에 대한 연구가 따르지  못한 것과도 크게 관련되는 것 같다. 늦게나마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필요한 중시를 돌리고 자료연구부터 모를 박으니 동부전선 전투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20년 일본침략자들에 의한 경신년대토벌로 말미암아 조선인 집거구인 연변지구 반일무장부대들 앞에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란  2개 전선이 생겨났다. 서부전선이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군이 획분한 토벌지대로서 룡정 이서, 안도 이동 지구를 가리킨다. 일본군은 이 서부전선에 라남주둔 제19사단 아즈마(东正彦)지대를 위수로 하는 제73련대와 제74련대, 기병 제27련대 주력 약 5000여 명의 병력을 풀어 놓았다.

   우리반일무장부대의병력은북로군정서주력부대와홍범도, 안무가 지휘하는  련합부대 도합 1000여 명이였다. 그때까지도 북로군정서 부대가 통합작전에 응하지 않았기에 이들 1000여 명은 의연히 두 갈래로 나뉘어 서쪽으로 움직인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주력부대는 이도구, 삼도구를 거치며 청산리 골안 쪽으로 화룡, 안도 접경지대로 진군하고, 홍범도—안무가 지휘하는 련합부대는 이도구를 지나 봉밀하를 따라 지금의 와룡골로 진군하였다. 그러다가 금방 청산리전투를 치른 북로군정서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전군복멸의 위기를 맞는다.  결사를 각오하는 시각, 천병같이 들이닥친 홍범도 련합부대의 개입으로 위기가 만구되고 통합의 현실성을 절감하게 된다.

   동부전선은어딜까? 동부전선 역시 일본군이 획분한 토벌지대로서 훈춘 동북부와 왕청—동녕 이서지구를 가리킨다. 일본군은 이 지구에 라남주둔 제19사단 제 38려단의 주력과 씨비리 파견군 제11, 13, 14사단의 부분 병력 도합 1만여 명을 풀었다. 우리 반일무장부대의 병력은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류수(留守)부대와 최진동이 이끄는 원 군무도독부 부대, 신민단, 의군부, 라자구의사부, 훈춘한민회 등 800여 명이다. 이들 동부전선의 반일부대들은 서일장군 등의 지휘하에서 10월 23일의 왕청현 십리평전투를 서막으로 왕청현 라자구, 로무주하(老母猪河), 장가점, 하마탕, 훈춘현의 삼도구, 우두산(牛头山),  소수분하(小水芬河),  팔가자 등 수차의 전투를 벌리며 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86) 그러나아직까지도동부전선에대한연구자가별반없고, 연구자료가 따르지 못하는데서 동부전선의 전투들이 잘 밝혀지지 못하고 있어 유감을 남긴다.

   하다면적들은왜서동부전선에서부전선의곱절로되는병력을투입했을까? 동부전선 연구에서 일가를 이룬 원 연변대학 임희준교수는 이를 두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일본군이지구에막강한병력을투입하게것은첫째로는일대는일찍연변지구조선족반일무장부대의근거지였고,  둘째로는 연변지구의 반일무장부대는 철퇴한 후 꼭 북만 혹은 로씨야 경내로 이동하여 로씨야에 있는 조선족 반일단체와 합류하게 되므로 연해주 지구의 일본군은 이 지구에서 조선족 반이부대를 저지하여 북만으로 이동하는 연변지구의 반일무장부대를 소멸하려는 전략적 기도에서였다.

   옳은분석이다. 일본군 씨비리 파견군이 대거 투입된 점도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는 또 서일장군 동부전선 부대들의 압력과 어려움이 더 큼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만큼 적들과의 싸움은 서부전선의 청산리전투나 어랑촌전투처럼 큰 규모를 이루기 어렵고 기회를 보며 적의 약한 고리와 조우전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보고싶다. 서부전선은 적들이 동부보다 절반이나 적은데 비해  반일부대 병력은 동부보다 상대적으로 많다. 반일부대의 북로군정서군만 보아도 서부는 주력부대 대부분인데 동부는 북로군정서 류수부대일 뿐이다. 또 실력이 막강한 홍범도와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전부가 서부에 투입되였다. 반일부대 지휘자들도 홍범도, 안무, 김좌진 등 막강한 지휘자들이 적지 않다. 동부는 지휘자들도 서부와 많이 다르다.

   경신년대토벌과전략적이동에서의서부전선과동부전선, 서일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전선에서의 여러 차례 전투들은 독립군부대 토벌에 나선 적들을 많이 소멸함으로써 서부로 증원하는 적을 견제하고 적들의 전략부서를 혼란시키는데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놀았으며 기회를 타서 밀산쪽으로 빠지며 서부전선의 여러 반일무장부대들을 밀산으로 집결하는데서 력사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만큼동부전선은기대가가는연구분야이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 이후 서부전선의 홍범도의 련합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가 어떻게, 어떤 도경으로, 누구의 명령을 받고 밀산으로 움직이였는지, 서일장군은 류수부대를 이끌고 어떻게 밀산으로 이동하였는지 ~~ 모두가 깊이 있는 연구를 기대하고있다.

                  경신년대토벌

   1920년 10월의 경신년대토벌에서 일본침략군은 연변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 경내의 조선인집거구에서 많고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가옥들을 불사르며 략탈을 저지르며 전대미문의 만행을 일삼았다. 이는 중국 각 계층 인민들의 지대한 격분을 자아냈다.

   북경, 심양, 장춘, 길림, 산동 등지의 학생들은 련일 거리에 나가 반일연설을 발표하거나 대회를 가지며 일제놈들의 침략죄행과 만행을 성토하고 규탄하였다. 대표를 북경에 파견하여 청원에 나서기도 하였다.

   10월 21일 화룡, 연길, 왕청, 훈춘, 동녕 5개 현의 민중들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일본침략군의 출병죄행을 단죄하였다.

   10월 22일 중국 각계 련합회는 북경정부 외교총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여 일본군을 즉각 축출하고 나라의 주권을 수호할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각계 련합회는 또 일본정부에 전보문을 보내여 일제의 강제출병과 월경토벌을 엄정히 규탄하면서 일본군이 즉각 물러가지 않으면 전국이 일떠나반드시최후의대책을취할이라고강하게성명하였다.  

   북경의학생들은련일전문, 교두, 서하연, 순치문, 숭문문 등지에서 일제의 죄행을 성토하였다. 이런 성토모임에는 북경사범학교와 녀학교의 녀학생들도 참가하여 열을 올리였다.

   11월 1일 길림의 학생 1,000여 명은 집회를 가지고 일치행동할 것을 전국에 호소하면서 직접 대표를 연길에 보내여 일본침략군의 폭행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봉천의학생 800여 명은 동북군벌 장작림의 저택을 찾아 전례없는 반일행동을 가지고 거리에서 시위행진을 하면서 반일삐라를 살포하였다.

   운남성의회는일본이훈춘사건을빙자하여자유출병으로우리주권을빼앗고우리국민을유린함은공리(公理)면의 위반인즉 남북이 일치하게 대처해야 한다.호소하였다.

   안휘성교육회는정부에일본의철병을구걸하지말고엄중히교섭하라고요구하였다.

   호북의학생회에서는북경정부에전보를보내정부에서힘을내야국민은일치하게후원으로있다.강조하였다.

   독립신문련재로추도문싣고글들을발표하면서일본침략군의만행을규탄하고순난동포들을추모하였다. 그중3천의 원혼이란(87)이러하다.

   2년(88) 10월 지변에

   무도한왜병의손에

   타죽고맞아죽은 3천 원혼아

   너의시체를묻어줄이도없구나

   너에게무슨있으랴

   망국의백성으로태어난죄뿐

   못난조상의죄를입었느냐

   원통하고참혹한이꼴이무엇이냐

   무엇으로너희들을위로하나

   , 가엾는 3천의 원혼아

   눈물흘린들어찌하며

   슬픈노랜들어찌너희들원한을풀랴

   원혼아원혼아

   소리가되여웨치고

   피비가되여꿈꾸는동포네의

   가슴에뿌려라

   너희피로적신땅에태극기를세우라고

   상해서활동하고있던열렬한반일독립운동가이며자산계급민주혁명의선행자이며이름난민주주의시인이며교육가인신정(신규식)은 1920년 10월에 상해진단주간한국혼련재하기도하고, 마음을무어횡포무도를밀어버리고붉은강을이루어자유를찾노라라는만사를쓰기도하면서일제놈들을통책하였다.

   우리겨레가분노하고중국이분노하였다. 북경정부는 국내외 강력한 여론과 인민대중의 성원에 힘 입어 일본측과 거듭되는 강한 교섭을 벌리였다. 일본침략군은 별수없이 1920년 말에 저들 출병 주력부대를 연변에서  철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부 철거는 1921년 5월로 알려진다.

   중국인민들의성원과겨레의성원은서일장군을크게고무하였다. 그는 북로군정서 류수부대와 여러 반일무장단체들을 단합하고 이끌어 무사히 밀산현 당벽진에 이르도록 하였다. 또, 삼도구 서부의 화룡현 밀림지대나  장백의 밀림지대 근거지창설이 불가능한 형편에서 서부전선의 북로군정서 주력부대에 급보를 날리여 밀산 쪽으로 움직여 밀산 대회사를 내밀었다. 홍범도 련합부대의 밀산행으로 보아 이 련합부대와도 련계를 가진 모양이지만 필자는 아직 그렇다 할 관련자료를 대하지 못하였다.

   북로군정서주력부대의밀산으로의이동도통합의추세를나타내고있다. 10월 21일 청산리전투를 성과적으로 치르고 어랑촌 쪽으로 넘어 온 북로군정서 주력부대는 어쩌구러 우세한 적들에게 겹겹히 포위되여 전군 복멸의 위기,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련합부대가 천병같이 나타나  위기를 가실 때 김좌진장군은 통합의 위력을 절감하지 않았던가. 그로부터 북로군정서 부대는 밀산으로의 이동길에서 내내 여러 반일무당부대와의 어울린 자세를 가진다. 서일장군의 지시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밀산대회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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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장군과홍범도, 안무 등 장군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20년 10월을 계기로 연변 내 반일무장단체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나뉘여 청산리대첩 등을 벌리며 이른바 대토벌에 나선 일본침략군을 호되게 족친후 여러 갈래로 무사히 밀산현으로 이동하였다. 서일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반일무장부대 3500여명 대오는 밀산현 당벽진에 모여 겨레 항일운동사상 전례가 없는 대회합을 이루면서 처음으로 되는대한독립군단결성하고서일장군을신생한대한독립군단의총재로받들었다.

   대한독립군단주요간부배치는아래와같다.

     서일

  부총재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김규식

    참모장리장녕

    려단장지청천

   주요간부배치를보면거의가북로군정서출신들이어서의문도없지않다. 그러면서 현실은 현실이여서 지나치기로 하지만 3500여 명 수자도 의문을 가지게 한다. 한국 독립운동사 관련자료들이 이렇게 나오고, 중국 조선족 력사학계의 자료들도 가타부타없이 이를 따르고 있다. 청산리 관련 적지 않은 자료들에서 청산리 여러 전투들에서 적 3000여 명을 소멸했다고 엄청 과대하는 것처럼 필자는 밀산 3500여 명 숫자도 허위과대가 섞이였다고 보고있다.

   왜서일까? 밀산 대회합에 앞서 연변의 여러 반일무장부대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갈라지게 되였는데 비교적 믿음직한 자료는 서부전선에 투입된 반일무장부대 수가 1200여 명 (89)이고, 동부전선에 몰린 반일무장부대 수가 800여 명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게 두 갈래 대오가 2,000명을 웃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럼 나머지 1000여 명은 어디서 불쑥 나타나고 있는지 누가 설명하지 못하고있다. 밀산 당벽진에 모인 부대는 필경 연변지구의 9개 반일무장단체들이다.

   서부전선의 1200여 명 설도 쟁론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왕청현 십리평을 떠날 때 북로군정서 부대는 1000여 명이라고 했는데 이 1000여 명은 또 서부와 동부의 주력부대와 류수부대로 갈라진다. 대부분이 주력부대를 따랐으니 서부의 1200여 명 설은 넘쳐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3000명에 이를 부대들이 보이지 않는다.

   흘러간력사란이러하다. 일본 측 자료들은 동북과 연변에서의 활동을 말할 때 저들 사망자 수를 늘 줄이거나 대폭 줄여서 말하는데 습관된 듯 싶다. 봉오동전투가 그러하고 청산리전투가 그러하지 않는가. 이와는 달리 우리 반일무장부대 측과 우리 측은 늘 부대수를 부풀리기를 좋아하며 늘 적 소멸수를 과대하기를 즐긴다. 이래선 안 되거늘, 하나면 하나고 둘이면 둘, 실사구시가 필요하지만 가끔 그와는 반대상황이 나타나니 난처할 때가 없지 않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면서 필자는 오늘까지도 이렇다 할 자료가 보이지 않는데서 밀산 대회합에서 3500여 명 설을 그대로 따름을 밝혀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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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희준편저로중국조선민족항일투쟁유적지(연변대학출판사, 1996년 6월)를 따르면 연변 반일무장부대들의 대회합, 대통합을 이룬 밀산현 당벽진은 밀산에서 동남으로 약 50여리 되는 흥개호(兴凯湖) 서북부에 자리잡고있다.

  당벽진은행정구역이름이아니다. 지금은 국영 8510농장 10대라고 부르고있다. 북은 밋밋한 산으로 둘러있고 남쪽은 흥개호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인데 변방최전선이라 모든 사람들은 통행증이거나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 지금 당벽진에는 약 200호, 3700~3800명 인가가 살고 있는데 모두 한족이고 조선족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모두 50년대 후반에 이곳에 국영농장을 세우면서 온 사람들로서 당벽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책을출판한지난 90년대 중반까지도 당벽진은 로씨야와의 변방이여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은 모양인데 엣날 사람들이 살고있지 않으니 지난 력사의 무엇을 더듬을 수도 없은 것 같다. 이곳당벽진을두고필자(김송죽)는 관련 력사자료를 수집하며 현지조사와 답사를 거치였다.

오늘의당벽진을헤아리면현재중국의동북(옛적의 만주) 흑룡강성에서는 동남쪽구역에 들어있는 밀산현 당벽진의 한 자그마한 촌마을로서 앞에는 흡사 망망한 바다와도 같은 흥개호(興凱湖)가 활짝 펼쳐져 있다. 해변가의 풍경을 방불케 하는 그 일망무제의 커다란 호수가에 자리잡은 이 촌락은 서남쪽으로 호수에 흘러드는 자그마한 내물을 국계로 하여 로씨야땅과 중국땅이 거의 맞붙는다. 가믐이 좀만 들어도 내의 수심은 정갱이를 넘지 않으니 웬간한 절름발이도 저켠 땅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명색이 국경인 그 좁고도 얕다란 내를 건너 남쪽으로 몇리를 안가서 저켠 이국인 로씨야 국토의 뚜리로그정거장이 있는 것이다.

뚜리로그정거장은 1916년부터 통차(通車)가 시작된 철길ㅡ 로씨야의 중심부를 지나 멀리 원동으로 뻗은 그 기나긴 씨비리아대철도가 북쪽의 하바롭쓰크에서 남쪽으로 꺾이여 이만(伊曼)을 경유하면서 멀리 남쪽끝 해변가도시인 울라지보스또크로 가다가 서북으로 겯가지를 오리변자모양으로 꼬불꼬불 뻗은 다른 한갈래 철길의 맨 말단역이 되는 것이다. 맑게 개인날 언덕에 올라서면 그 자그마한 도회지의 정거장을 육안으로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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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로국경지대에자리한밀산현당변진이이러하다면당벽진에서북쪽으로곧추 50여리 들어가면 밀산이다. 밀산은 청산리대첩후 서일의 북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대회합을 가진 력사의 고장이여서 당벽진이 속한 밀산현과 우리 겨레의관계를더듬을필요가나선다.  밀산현을 알자면 조선이주민들에게 북만으로 불리운 흑룡강성을 알아야 하니 흑룡강성은 로씨야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흑룡강성으로 재이주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밀산현도 이런 경우에 속한다.  

먼저밀산현의가까운현이고중로변방지대인동녕현을보기로하자.

  동녕현지기재에의하면 1860년 전후에 최초의 조선사람들이 동녕현 삼차구 경내에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로씨야 연해주로 갔다가 다시 이주길에 오른 조선사람들이다. 그들은 1860년 경에 먼저 해삼위, 쌍성자 등지를 떠다니며 농사도 짓고 품팔이도 하다가 수분하의 물길을 따라 동녕현의 삼차구 일대에 들어섰다. 처음 그들은 이 일대서 사금이거나 산삼 캐고 사냥질 등을 하다가 농사짓기에 알맞은 고장을 발견하고 정착하게 된것이다. (90)

   밀산이주는동녕보다는늦은시기로나타나지만이주사흐름은비슷하게나타난다. 이것이 북만 이주사의 첫째 단계 첫째 시기 19세기 중반의 현실이라면 이주의 첫째 단계 둘째 시기는 19세기 후반으로 본다. 이 시기 1880년대에 이르러 200여년 간이나 지속됐던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정식으로 페지되자 조선사람들 동북으로의 이주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 시기 중소 동부변경의 요하현을 보면 청나라 광서 6년(1880년)에 3명의 조선 사람이 로씨야 땅에서 요하현 의순호에 와서 사냥도 하고 인삼 등 약재를 캐다가 그 곳이 벌이 넓고 자원의 풍부함을 발견하고 로씨야에 가서 가족과 이웃들을 데려다가 최초의 조선마을을 일떠 세웠고, 밀산현에서는 1889년에 로씨야 연해주 일대서 30여 세대 조선 사람들이 밀산현의 봉밀산 일대에 건너와 물줄기를 찾아 논을 풀고 벼농사를 지었다. 밀산현 이주의 개척자들이다.

   그후북만의이주사는둘째단계인중동철도동부선부설시기(1898-1903)와 셋째 단계인 1910년한일합방이후, 넷째 단계인 로씨야 10월혁명 이후, 다섯째 단계인 20년대 쏘련(1922년부터의 소련)의 집단화운동 시기 등을 거치면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을 보인다. 1918년 4월 일본이 연해주에 출병하고 국세가 혼란해지자 연해주 일대서 피난하여 밀산, 요하, 호림 일대로 이주하는 조선 사람들이 많았는데, 20년대 말 쏘련의 집단화운동이 고조에 달할 때 생활의 급격한 변화와 엄청난 식량난으로 로씨야 땅을 떠나 밀산 등지로 옮겨 앉는 사람들도 많았다.

20세기 30년대에 이르러 흑룡강 동부 변강 지대로 이주하는 조선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 당년만철북만경제조사소통계자료에의하면중쏘국경에위치한동녕, 밀산, 호림, 요하, 무원, 보청 등 7개 현의 조선사람이 2만 9000여 명이였는데 이는 당시 흑룡강성 조선족 총인구 8만여 명의 36%를 차지한다. 이들 7개 현에 거주한 조선사람 거개가 연해주에서 이주해 왔다. (91)

 그중밀산(密山)본명이봉밀산(蜂密山)으로서 력사가 유구하거니와 그때 벌써 주민도 근 만여호에 달하는 큰 부(府)였다. 그런것을 1913년에 이르어 부(府)를 페지하고 이곳에다 행정기관인 현(縣)을 세운것이다. 한족, 만족, 허저족의 이사호가 점점 많아감에 따라 당벽진과 마찬가지로 밀산현내의 다른마을인 하량자(下亮子), 삼성촌(三成村), 향양촌(向陽村), 영안촌(永安村), 복전촌(福田村), 북하촌(北河村), 기성촌(箕城村) 등 마을에도 조선족호수가 늘어가고있었다. (92)

이같이북만의몇개이주시기를거치면서밀산현의조선사람들도계속상승세를탔으니19세기 80년대 후반에 인가가 생겨내며 쾌당별(快當別)이라 불리운 이곳밀산현당벽진에 1917년부터 조선인 이주민들이 한집 두집 모여들기 시작했다. 20세기 10년대에 이르러서는 100여 호의 조선인 인가를 가진 고장으로 번져가면서  대종교동도본사주관시교사서일이지도하는동이도본사관구(東二道本司管區)도 이 고장에 자리를 잡았다. 서일은전해에한기욱(韓基昱ㅡ壬戌3月15日解任)선생에게 여기 밀산일대의 대종교사업을 맡긴바 있다. 고맙게도 그가 책임지겠다고 자진해 나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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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현십리평북로군정서근거지를떠나동부전선을거치며밀산현당벽진에이른서일장군은청산리전투에서대승을하여기분좋고힘도났지만수백리밀산의당벽진까지여러날을행군하고보니서일역시다른여늬사람과마찬가지로  지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시름놓고 쉬지는 않았다. 련며칠부대긴일신의피로에도불구하고한기욱선생과함께여기당벽진(當壁鎭)에 거주하고있는 백여호의  조선이주민들을 하나하나 찾아 방문하면서 크나큰압력을느끼였다.

당벽진의조선이주민은다가대종교도들인데그들이자진하여제마을에오는독립군의주숙과작식을책임지여고맙긴해도그건현실적이되지못했다. 하루이틀이면 몰라도 시일이 얼마걸릴지 모를 3500명 넘는 사람의 입을 그들이 담당해낼수 있을가? 말도되지 않는 일이였다. 그래서 잠을 가가호호에 나누어 자기로 하고 식사는 몇군데 장소를 잡아 모여하기로 했지만 독립군이 매일 소모하는 식량은 엄청이다. 대부분식량은당벽진에서북으로곧추몇십떨어진밀산현성의양점(糧店)에서 사들여야 하는데 이 양점의 주인은 《전해에 한번 소작료인상문제로 인하여 서일과 불쾌한 마찰이 있은 쑹마즈(송곰보)여서쉬운일도아니였다. 원근에 이름난 대지주 송곰보는 때를 만났다고 식량값을 올리며 독립군에 팔아대니 웃음집이 흔들흔들했다.

3500여 명 독립군부대들 밀산 당벽진 대회합과 대통합은 지난 20년대 겨레 항일운동사상 일대 사변임은 틀림 없으나 당벽진은 필경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 가장 주되는 원인은 일본침략군의 추격과 식량문제이다. 그때까지도 일본침략군은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뒤를 물고 있는데다가 3000여 명의 먹는 문제 해결이  큰문제로 나섰다.

서일장군은여러독립군지도자들과함께독립군부대들을여러부서로편성하고  정세를면밀히분석하여보았다. 여러날을두고의논했지만부대를살리려면로씨야로건너가야한다는주장이우세였다. 서일은비록여러수뇌자들의일치한요구에의해새로결성된독립군단의총재로추대는되였지만여러독립군부대들이모이고의견들이다른데서주장을제대로펼수가없었다.  많은독립군부대의지도자들은그래도지금상황에선일본군의추격을피해먼저로씨야로넘어가로씨야의지원을받으며새로운투쟁을도모하는것이낫다고주장한다.

서일총재는로씨야행이달갑지가않으나별수없이자기주장은보류하기로하고대다수의의견을따라야했다. 그러면서도서일은독립군단이피전책(避戰策)으로 일시 로씨야 원동지방으로 넘어갈수는 있으되 그곳 로시야공산당계 조선사람의 무장대와 합치거나 완전편입되는데는 동의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리였다.

뜻밖의자유시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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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이중로국경을넘어갈서일자신은 40여명 대오를 가지고 국경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정세를 봐가면서 차차 움직이기로 작정하고 밀산남쪽의 당변진에 남았다. 자기까지 떠난다면 그곳을 잃을것만 같아서였다. 만일의 경우 로씨야로 건너간 이들이 돌아온다 해도 몸둘 곳은 있어야 할게 아닌가. 여기 당벽진(當璧鎭)에서 논을 풀고 농사질을 하여 월경한 군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리라했다. 그것역시 그가 기여히 당벽진에 남게된 주요원인의 하나였다. 그는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장차 독립군이 다시 모이면 둔병제를 실시할 타산이였다.

서일이로씨야원동지구에로의월경행동을달가와하지않은데는그로서의견해와고민이컸다.  당시 연해주방면에 이주해 생활하는 조선이주민들은  20여만에 달했다.  그곳 조선사람들은 이쪽에서 건너가면 기꺼이 맞아주리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넘어가는 움직임자체가 믿음성이 당당치는 못했으니  사실상 그것은 현실을 떠나 리상적이 되지 못하였다.

왜서? 서일은 로씨야 원동지구를 잘 알고있었다.

  국경너머의 로씨야땅에서 볼쉐비크꼴챠크지간의전쟁이끝났다하여이쪽에서바란것과같이평화로워진건아니였다. 당시 로씨야의 원동지방을 놓고 보면 그곳을 영원히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출병한 일본무력의 부축으로 세워졌던 치따의 쎄묘노브정권이나 아무르주 해란포(海蘭泡) 즉 블라고베쉔스크(자유시)의 리노브정권이나 그리고 흑용강과 우쑤리강의 합수목에 있는 큰도시 하바롭쓰크에 세워졌던 백계정권이나 다가 홍군무력에 의하여 하나하나 붕괴되였다.  

두해전이던 1918년 11월의 일이다. 꼴챠크가 씨비리아의 옴스크(鄂木斯克)에다 제일 큰 괴뢰정권인 꼴챠크정권을 세우고는 쎄묘노브정권, 리노브정권과 카르미꼬정권을 령도한다고 선포했었다. 허나 그것은 명의였지 실질은 아니였다. 1920년 1월에 이르러서는 원동지방에서 한때 기염이 대단히 높았던 그 꼴챠크정권이 결국 쏘련홍군에 의하여 분쇄되였거니와 그 두목들은 2월 6일에 처단되였다.

   볼쉐비크는 승리했다. 하지만 그러했음에도 볼쉐비크주권이세워진로씨야는아직  제구실을못했다. 민족해방을 절절히 바라는 약소국을 구원해준다고 선포했지만 지방의 불손한 자들이 신의를 저버림으로 하여 약소국가를 해치여 되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못한 일이였다.  

서일이그렇게나오게된것은신생한쏘련공산당볼쉐비크가약소국가의운명에대해지극히동정하고관심을한다고태도를표시하기는하지만아직은정권이공고하지못하거니와따라서너무나생소해서믿음이가지않았던것이다. 서일은 태도가 그러면서 지어는 말못할 두려움까지 느끼고있었다. 그 두려움은 어디서 생긴것이였던가? 그것은 한고향 사람으로서 숙친했던 최재형의 죽음으로부터 생긴 것이였다.

   로씨야로 이주한지 오랜 최재형은 제1차 세계대전기간에 로씨야군의 육류용달상노릇을 해서 거부가 된 사람이였는데 로씨야에 건너간 동포치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최재형은 부유했다. 그는 그들을 제집식구같이 여기면서 안치(安置)하고 생활을 돌봐줬거니와 계몽교육에 직접 투신하기도 했던것이다. 그랬은즉 그의 그 헌신성이야말로 본받을것이요 우러러 탄복이 가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볼쉐비크는 정권을 틀어쥐자 전에 그가 짜리로부터 훈장을 받은 일이 있었다하여 주의주장이 달랐다면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몰아서없애치운것이다. 때는 1920년 4월 5일.  체포된 인원을 보면 울라지보스또크에서 76명, 니크리에서 51명이였는데 그들은 다가 조선동포사회에서는 손꼽는 지도급인물들이였다. 그중 체포할 근거가 없고 유력자도 아니어서 거의 대부분이 석방되고, 4월 7일 최재형 등 4명이 총살을 당했다.

   서일은 도만(渡滿)하기전 고향에 있을적부터 최재형은 동포애가 지극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치는 좋은 사람이라 들었고 그 자신이 연해주에 갔다가 제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었다. 최재형은 원래 상해림시정부의 재무총장이였고 로씨야 원동지구에서도 조선인사회의 수령인물이였다. 한데서 서일은 최재형을 일반 사람을 초탈한 위인으로, 덕망있는 거룩한 사람으로 보고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있었다. 한데 그런 사람이 죄를 쓰고 죽다니?  왜 죽어야하는지?

2

   1921년 1월, 엄동설한이였건만 새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은 밀산의 당벽진(當璧鎭)을 떠나 동북쪽의 호두(虎頭)에서 국경선인 우쑤리강 얼음판을 걸어 이만(伊曼)으로 갔다. 지금은 로씨야원동지방에서 주요한 군사요지로 되고있는 이만이 그 당시는 원동 수부인 하바롭스크에서 남으로 뻗은 씨비리대철도선에 있는 그리 크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도시로서 서로 적대가 되는 쏘련군과 일본군의 완충지대에 놓여있은것이다.

그런데운명이고약한희롱질을한다고나할가. 새로 정비된 부대가 월경함으로 하여 앞길은 열려지는게 아니라 생각과 다르게 점점 막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쏘련은 그들이 희망을 품었던것과 달랐다. 이쪽을 대해줌이 처음과 같지 않고 변해갔던 것이다. 갈수록 수미산이니 꿈밖이였다.  

부대를이끌고월경한장령중맨먼저각성이사람은김좌진이였다. 그는 로씨야 한인(韓人) 볼쉐비크측에서 군사훈련지도를 맡아달라고 요청하니 그에 응해 경위원 몇을 데리고 자유시쪽으로 갔다가 되오고말았다. 가보니 교련을 받게되여있는 상대가 전부 로씨아에 와서 태여난 후대들이였는데 로씨야말만 번질줄을 알았지 제 민족어는 한마디도 할줄을 모르니 기구멍이 막히는 일이라 너무도 한심해서 실망하고는 에라 나는 못해내겠다 그만 이만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헌데이게웬일인가, 1921년 6월 28일 로씨야 자유시로 간 대한독립군단이 뜻하지 않게 로씨야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서로의 무력충돌에서 많은 독립군 사람들이 쓰러지고 체포되는 비극이 일어나다니? 서일장군이나 독립군 장병들로 말하면 전혀 상상밖의 참변이다. 이때의 로씨야령 자유시사변으로 하여 서일장군을 총재로 하고 여러 조선인 독립군부대로 무어진 대한독립군단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풍비박산이 났다.

일대횡래지액(橫來之厄), 조선의독립운동사상대비극으로기록이자유시사변이다.

   전사자 272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된자 917명, 만주로 되건너오려고 흑룡강에 뛰여들었다가 익사한자 31명.  

   발생한 시간은 1921년 6월 28일!  

   그것은 독립군단의 총재였던 서일의 탓도 그 누구의 탓도 아니였다. 사건전반을 모두어 분석해보면 원인은 곧바로 원동지구의 오하묵같은 한인(韓人) 볼쉐비크들이 리성을 잃을지경으로 정권욕, 군권욕이 극도로 팽창됐기 때문이였다. 그들은 저들을 믿고 건너간 이쪽의 그 3천명넘는 독립군을 보자 마치 굶주린 하이네가 먹이를 만나 서로 빼앗듯이 암투를 벌렸던 것이다. 그런자들이 이만에 간 독립군을 블라베쉔스크(자유시)로 오라고 할적부터, 한데모이라고 할적부터 군권욕은 팽창할대로 팽창해 극에 오르고있었건만 이쪽은 누구도 그것이 빚어낼 후과를 예상못했으니 그것은 그들을 대함에 경각성이 너무 무디고  신중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대방에 대한 그 믿음이라는 것이 지어는 무감각할지경 어리석었으니 독립군은 앙화(殃禍)를 입기 마련이였던 것이다.    

그사이에쏘련측대표카라한과중국주재일본공사요시사와사이에깜챠카반도부근의해상어업권에관한문제를놓고담판이있더니형세가묘하게변해버렸다. 김좌진은  볼쉐비크측이 독립군을 향해 무장해제를 강요해오자 분노하여 자기가 거느리고왔던 원 북로군정서대오를 되돌려 우쑤리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오고 말았다. 그가 자유시로 가지 않고 이만에 남았고 이만에서 밀산으로 되돌아온것은 과연 현명한 결책이였던 것이다. 그가 그같이 행동했기에 원 북로군정는 처참한 자유시사변을 모면한 것이다. 정말이지 불행중 다행이였다.

그럼서일은행동을어떻게보았던가? 언녕 로씨야의 처사에 불만이 생겼던 서일은 김좌진이 대오를 이끌고 분연히 되돌아온것을 참 잘했다고 환영하면서 새로운 행동을 모색했다.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가, 원견이 있다고 할가, 그는 중광단설립초부터 정처가 불온하여 류랑하는 구의병(舊義兵)을 적극 끌어모았거니와 만주에 거주하며서 북로군정서의 관할내에 든 동포주민들을 상대로 하여 징병제를 실시해 자체의 병력을 멋지게 키워왔였다.

준엄한현실을정시해야했다. 총재 서일장군은 김좌진장군 등과 토의하고 북로군정서를 먼저 해산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몸둘 곳이 있는 부대 사람들이 본 지방으로 돌아가 계속 농사를 짓다가 훗날 부르면 다시 모이기로 한 전략이였다. 후일을 도모하고저 김좌진장군은 대원 몇을 데리고 독목하(獨木河)로 떠나고 서일장군은 농사짓고 있는 40여 명을 데리고 그대로 당벽진에 남았다. 당벽진에서 둔병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힘을 키우려는 심산이였다.

서일이나김좌진이나처사도잘된것이였다. 그렇게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적을 겨루고 싸움도, 훈련도 할 수없는 상황이였는데 군량도 충족히 장만한 것이 없어갖고 그냥 집결해있어서는 뭘하는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수도 없었던 것이였다.  

14편 만주여 말하라

독립군의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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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산으로 돌아온 북로군정서 장병들의 처지는 말이 아니였다. 아직은 곡식이 자라고있어서 수확을 할 수 없는 계절이였다. 황차 이런 때였으니 어느 농가면  여량이 족했으랴? 제 구복도 달래기 어려울 지경이니 집집이 거개가 식량은 각박하고 지어 먹을것도 없을 지경이였다. 한즉 동정은 하면서도 함께 굶어죽자 할 사람은 없었다. 형편이 그러했으니 흩어져서 살길을 찾아 헤매이는 그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부담거리가 되고말았다.

속담에《절간의중도사흘굶으면빈대를잡아먹는다》고했다. 철같이 굳던 군규(軍規)는 언녕 허물어져 버렸다. 있다해도 아사지경(餓死之境)에 이른 그들이였으니 그것에 속박되여 죽어버릴 수는 없엇다. 그들은 살아보려했다. 그래서 구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죄한 백성을 해치면 죄악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막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유한 집을 대함에는 달랐다. 주지 않으면 빼앗아 먹었다. 그러다 그들은 어느날 총을 들고 상점에 뛰여들었고 밀산의 량점(糧店)을 털었다.

   리유야 어떠했던지간에 그들은 이미 다른 일종의 사나운 인간ㅡ흉악스런 략탈자로 변해 버리였다. 막바지에 이른 그들은 눈에 달이 올랐었다.  이일로 하여 밀산시내는 혼잡해졌고 어제날 정의롭게 보이였던 반일독립군이 반전(反轉)하여 한족(漢族)들의 눈에는 도적놈, 략탈자, 강도로 변해버려 증오의 대상이 되고만 것이다.  

   송곰보가 차린 량점(糧店)을 털어 먹었으니 송곰보가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보복하려하지 않을리 있을까? 당연한 일이였다.  송곰보의 큰아들은 량점(糧店)이 독립군의 습격을 받아 털리웠다는 소식을 듣고 마구 달려왔다.  그는 당장 저의 방량패 따당다쟈더에게 고발해서 저의 무리를 끌고 와서 보복을 하겠노라 했다 . 그러자 송곰보는 머리를 가로저였다.

당시방량패(方亮覇)는 기국(起局)한지는 꽤오라지만 류자()수는 다해봤자 모두 30명도 되지 않았다. 우선 송곰보가 아들이 직접 보복에 나서는것을 꺼려했다. 독립군이 자유시사변을 당하여 비록 볼꼴없는 거지모양의 무리가 돼서 구걸을 하다가 나중에는 략탈을 하고있지만 아무튼 그들은 군인이고 손에 무장이 쥐여 있으며 인원수도 거의 300명에 이르는 것이다. 자칫하면 그깟 30여명의 방랑패(方亮覇)같은건 되녹아나고말것 같았다. 송곰보는 아들보고 《급한 개 담장 뛰여넘고 문다》면서 보복을 하자면 청보산(靑寶山)이 나서야 한다고했다. 청보산(靑寶山)은 류자()가 300명에 이르니 독립군수자와 같아 대비가 될것 같다. 그리고 그 무리의 수이샹(水香)은 쑹마즈의 둘째 처남이였다.

할진대송곰보란누구던가? 밀산 량점의 주인 송곰보는 전해에 한번 소작료인상문제로 인하여 서일과 불쾌한 마찰이 있은 쑹마즈(송곰보). 그의 땅은 밀산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 지역을 벗어나 멀리 왕청에도 얼마 가량 있어서 대리인을 내놓고 세도를 부리며 사는 대지주이고 령황지주(領荒地主)에다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를 겸한 자였다.

2

  무엇을 령황지주(領荒地主),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라고 할까? 당시 북만의 지주는 대체로 세가지 부류로 나뉘였는데  황무지를 헐값으로 사서 령황토(領荒土)를 비준받은 자를 령황지주(領荒地主)라 하고  관리의 가족이거나 친척으로서 세력을 믿고 령세농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였거나 관부에서 땅을 재일 때 뢰물을 먹이고 면적을 적게 매기여 많은 땅을 차지한 자를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라 했다. 그밖에 토지를 사지 않고도 묘한 수단으로 토지대장(土地臺帳)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런자를 점황지주(占荒地主)라 했다.

그에걸맞게송곰보의가원은웬간한황궁못지않게으리으리했다. 송곰보는 밀산(密山) 본토배가 아니고 10살나던해에 산동(山東)에서 들어온 이주민의 자식이였다. 조상의 뫼(墓)를 잘써서인지 아니면 부지(敷地)가 좋았던지 어른이 되여서는 숱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탈바꿈했다.  그는 여러 세대가 모녀사는 세가이다 보니 권속이 근 백여명에 이르였다. 그는 관리도 아니였는데 무슨 재간에 령황지주에다 권세렴토지주로는 되였을까? 물론 관리는 아니였지만 처남 둘중 큰처남이 현장의 부원이고 작은 처남은 인원이 근 300명이나 되는 청보산토비(靑寶山土匪)였다. 이 작은 처남의 성명이 진사해(陳四海)였는데 그가 은근한 뒤심이 되였였다. 그리고 송곰보의 아들 둘중 큰것은 방량(方亮)무리의 새자(崽子)였다. 방량패는 인원이 30명도 안되는 토비였다.

   당시 항간에는 이런 노래가 나돌았다.  

    한가마밥먹어야친할까

     토비와 군대는 한형제라네

     서로좋고 배가 맞아

     두바지 갈아입으며 살아간다네  

   나라의 군대와 토비는 가리지 못할 지경으로 한통속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이였다. 송곰보는 대지주이면서 이같이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토비무리를 등에 업은 악랄한 자이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메운다는 속담이 생겨났던가, 밀산의 송곰보는 두가지를 겸한 지주였지만 소작농의 고혈을 좀이라도 더 빨아먹자고 으시대고있었다. 근년에는 왕청소작농들의 소작료를 인상하려다가 서일이 리동춘과 단합하여 원세개의 지지를 받으니 찍소리도 못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불온한 세상이 괴물을 만들어낸다고 악착스런 흡혈귀로 변해버린 송곰보--송지주는 량식값을 올려놓고 독립군에 팔면서 값을 깔축없이 받았다. 독립군의 돈을 많이 버니 웃음집이 흔들흔들했다. 그러다가 독립군에 의해 량점이 털리였다.

   송곰보는큰아들이하늘하늘뛰니네가나설것이아니라청보산이나서야한다고추기였다. 청보산은 류자()수가 거의 300명이나 되고, 완달산完達山)의 심처에 산채(山寨)를  가진 토비무리인데 작은 처남 진사해(陳四海)가 이들 청보산토비무리에서 수이샹(水香)의 자리에 있었다. 수이샹(水香)이라면 산채(山寨)에서는 물론 출정시 초소(哨所)를 포치하고 초병을 관리하며 전반 류자()들의 규률을 제정하고 장악하는 직책을 맡은 자리이다.

토비를통털어류자()라 부르는데 새자(崽子)라 하면 일자반급도 없는 일반 류자(토비)를 말한다. 류자()가 수백명, 천에 달하는 무리에서는 그 수괴(首魁)인 따당쟈더(大當家的ㅡ큰형님)아래에 리쓰량(里四梁)과 외쓰량(外四梁) 즉 8대금강(八大金剛)이 제대로 갖추어진다. 그같이 조직구성이 째이고 조직화된 규모를 갖춘 큰 토비무리에서 수이향(水香)은 네 번째 자리에 있으니 주인급인 땅쟈더(當家的)줄에 들수 있었다.

장군의최후

   드디여1921년 8월 26일 밤중에 송곰보의 작은 처남 진사해는 완달산(完(達山)에 있는 토비무리를 휘동하여 당벽진을 들이쳐 살인방화하고략탈하며무법천지로돌아갔다. 굶고지쳐곤하게자고있던독립군들은얼마반항도못해보고하나하나피못에쓰러졌다. 한입으로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 참경이요, 어쩌지 못하고 당한 참혹하고도 잔인한 대살육이였다.  

   독립군들은 신변보호를 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장을 제대로 갇추지 못했다. 대부분 사람이 거의 그것을 다룰 맥조차 없었거니와 생에 대한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와서 적수공권이나 다름없는 꼴이니 살인에 미쳐 맹호같이 달려드는 자들을 어찌 당해내는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 독립군은 그렇게 면양모양으로 거의 반항도 못해보고 죽음을 당하고말았다.  

이날의토비떼들을두고 1921년 12월 6일독립신문이렇게쓰고있다.

  무장군인십이명을거느리고앞서말한촌가에머무르면서군무에관한서류를정리하고있던, 돌연히 같은 해 구월 이십 팔일에 토비 한 무리가 이 촌낙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며 재물을 약탈을 행하므로, 그의 부하 열두 义士그들을대항하여분전하다가중과부적이되여마침내몰사한지라...(93)

   독립신문기사에서의씨는서일장군을가리킨다. 토비들 야습시간은 9월 28일로 틀리게 나오지만 토비들의 습격소식만은 그대로이다. 이 뜻하지 않은 토비떼 습격으로 밀산에 둔병제화한 독립군 후방기지를 건설하고저 서일장군과 함께 남았던 마지막 한 부분의 병력마저 피바다에 쓰러졌다. 12명 뿐이 아닌 거의 전부라 하겠다.

이틑날이였다. 포교일로 여러날 당벽진을 떠나 다른마을에 가 있은 서일은 당벽진에서 참변이 생겼다는 소리에 놀라 달려와 보니 과연  소문과 같은지라 억장이 무너졌다. 온 마을이 불에 타 없어졌고 살아남은 자 몇이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훼멸성적이다. 자기를 따라서 함께 당벽진에 남아서 농사를 짓고있었던 젊은 군인과 자유시사변을 겪고나서 분산적으로 되건너온채 다른 어디로든 가지 않았던  젊은 군인들이 거의 다 죽고만 것이다. 주변의 주민이 죽은것도 여럿이였다. 눈에 보이는것이 그러했은즉 서일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자유시사변이 지난지 이제 두달인데 독립군은 또 그런 참사를 곱잡아당했으니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일장군은철저히맥이풀리였다. 로씨야 자유시사변, 밀산 당벽진에서의 토비의 습격은 서일장군에 대한 타격이 너무도 컸다. 서일장군한테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밀어 버릴 수 없는 책임으로 느껴졌다. 서일장군은 그해 1921년 8월 27일 오전,  밀산현 당벽진 마을 뒷산의 산림 속에서 조천했다. 장군은 스승인 홍암 라철선생이 순명삼조(殉命三条)를 남기고 5년 전1916년 음력 8월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함을 상기하면서, 라철선생의 유서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조천했다고 전해진다.

귀신이수파람하고도깨비뛰노는천지에정기빛이어두우며백암이먹고도야지뛰어가니겨레의피고기가즐벅하도다. 날 저물고 길 궁한데 인간가는 길이 어디메뇨? (94)

                                         

   서일장군의최후모습으로비쳐든다. 물론 누구도 조천장면을 보지 못한채 전하는 말이다. 이 조천을 두고 상기 독립신문은 계속하여 쓰고 있다.

山上에서비참한광경을바라보던씨는呼天号地하다가 , 이 슬픔을 오로지 겨례를 위한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몸가진개체자아에서겨레를수호하는호국영령으로돌아가는길을선택한것이다,  삼일신고 최고의 수련법인 조식(調息)법으로 조천을 하신 것이다……

그래도서일장군의최후를두고서일장군연구에서일가견을가진우리저자의한사람인김송죽선생이관련사론(史論) --당벽진참안과서일의  조천 (當壁鎭慘案徐一朝天)에서 밝힘이 지금까지 가장 설득력을 가진 서술이라 보아진다.

           

사흘만에야사람들은뒤산에서돌을베고곧바로누운채숨을거운그를발견했다. 그 자태가 줄을 그은 것같이 두팔을 곧게 드리우고 눈을 조용히 감았으니 그로 보아서 사람들은 그 역시 대종사 라철이 구월산에서 조천할 때의 모양으로 한얼이 되여야만이 쓸 수 있다는 폐기법으로 자결했음을 알았다. (당시 대종교도들의 분석이다)  

여러면의자료들을종합분석해보면  자료가실사구시하게안겨진다. 자기의죽음으로대종교의단계도약을도모하고자했고, 흩어진 독립군부대의 재기에 밑거름이 되고자 했던 서일장군이였다.

서일장군, 장군은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 총재이고 최고사령관이고 동북반일무장투쟁의  저명한 지도자의 한분이였다.

   서일장군, 장군은 겨레의 항일혁명가이고 종교지도자이고 사상가였다.  

   이는서일장군에대한고도의평가와존경이니한국김동환박사가말씀하시는것처럼편의헌시(献诗)—서일선생유방(遗芳)을 추모하여(95)대변해준다.

   총명한눈으로슬기의책을읽는

   서창에서는백두산이믿읍게미소하고

   구릿빛나는몸이은어(银鱼)처럼헤염치면

   돌을굴리는두만강의물결이춤추는

   대자연의속에서자라난력사의아들

   겨레의운명이구름처럼흐렸을

   명일(明日)태양을다시빛내게

   미래의청년들을고향에서십년육영(育英)

   그리고만주에서도스스로학원을열매

   가르침은오직애국의눈물한줄기로

   우러러받드는단군님의대종교신앙

   삼일신고의진리를밝힐 "회삼경"은

   종교의무지개를과학의철교로놓아서

   수만신도에게구원의성서가되다

   손에단신(檀神)성서를높이들고

   손에는항마(降魔)보검이날카로우매

   김좌진장군들과독립군을일으켜

   북로군정서의총재로싸운광복의의용

   천하무적을자만하던왜군을

   청산리전역에서도탕한원동력이여

   군가(军歌)신가(神歌)하모니를이루는

   군교일치로무장한사랑이어늘

   , 4254년 8월 어두운 밤하늘에는

   무슨망령의별이점을그릇쳤던고

   무도한토비는어디곳이없어

   우리젊은의용군을피로물들였느냐

   이튿날아침에이슬이빛나는

   이역의고요한숲에홀로들어가서

   가엾는부하의원혼을슬피곡하고

   홍암유서를낭음하며조천하신영혼이여

 

   서일장군의한생을형상적으로그려,  마음마음을 울리는 한 편의 헌시로 받아 들여진다. 위의독립신문1921년 12월 6일자에는 또 《고 서일선생을 조 ( 徐一先生)라는제목의추모글이실려사람들의마음마음을울린다.

    , 슬프도다. 선생의 돌아가심이여!

    누구를위하여오늘의소동이일어났으며

    누구를위하여오늘의죽음을맞이하였는가.

    선생의죽음은과연이천만동포의자유와존영을위한것이며,

    선생의죽음은또한

    십삼의사와수백양민이무고히피해입음을위함이시니,

    생을마침도나라를위하심이요,

    비장한죽음도동포를위하심이라.

    선생의고결한의기는

    스스로의목숨을자신의목숨으로인정치아니하고

    오직동포의생명으로자신의목숨을삼으심이며,

    동포의생사도자신의생사와같이하심이니,

    그의삶도동포와더불어사셨고

    그의죽음도또한동포를의하여돌아가셨도다.

    선생이시여! 선생이 만일

    나라를되찾고나라를살피는자리에계셨더라면,

    나라의희로애락을같이하는충성스런신하의자격이선생이시며,

    필부의얻지못함으로세상을채찍질함과같이

    천하위임(天下为任)의 양필(良弼) 또한선생이실지라,

    만리초보(万里初步)군국대사(军国大事)

    바로눈앞에두시고죽음으로써살신성인하시며,

    의를취하심은비록선생의양심에부끄럼없고

    천손만대에아름다운이름을남기실지라,

    아직도살아있어거적에누워창을베고

    백전고투중에있는우리들에게는,

   만리장성이무너짐이며큰집의대들보가부러짐과같도다.

   하물며청산리전역에승리의노래를부르시던소리,

   우리의귀에잊혀질없는경종이되질않았던가.

   밀산의송백이만고에푸르름은

   우리선생의절의(节义)딛고것이요,

   파저강수(婆猪江水)천추에오열함은

   우리선생의풀지못한한을울음으로안고흐르는

   , 송백아 끝없이 푸를고,

   , 강수야 한없이 울어라!

   감지못할선생의눈이해와달이되여보시느니라.(96)

                 

1921년 8월 27일 오전, 서일장군이 밀산현 당벽진 마을 뒷산에서 조천순국한 후 각지 대종교 교인들과 반일무장부대 지도자들이 부고를 듣고 달려 왔다. 그들은 머리를 숙여 저들의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장군을 애절하게 추모하였으며 장군의 후사를 두고 두가지를 토의결정하였다. 하나는 서일장군의 유해를 먼저 당벽진에 모시고 몇년 후 시기와 기회를 보면서 다시 화장하여 대종교의 총본사였던 화룡현 청파호에 이장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일장군의 생전유서문제였다.(97)  

   서일장군의유서이런사연이였다. 장군은 당벽진에 머무를 때 권씨 댁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딸을며느리로삼겠소!라는말을수하사람들과하군하였였다. 장군의 영전에 모인 사람들은 서일장군의 이 말은 이미 고인의유언으로되었는데우리가장군이바라던대로장군의아들서윤제와권씨의딸을성가시켜주어야한다는것이였다.

   3대독자인 서일장군한테는 4대 독자로 이어지는 아들 서윤제가 있었는데 1911년 고향을 떠나 왕청현 덕원리로 이주할 때 아들은 4살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러던 아들이 10대 중반의 소년으로 자라나니 남녀 15살 좌우면 응당 결혼해야 되는 것으로 알던 그 시절에  맞세워 주어야 했다.

   하지만이들혼사를내밀기란쉬운일이아니였다. 서윤제는 왕청현 덕원리에 있는데 권씨 딸은 밀산현 당벽진에 있으니 쉬울 수가 없었다. 도처에 마적들이 출몰하는 판이라 모든 왕래는 쏘련땅을 거치여야 하는 세상이다. 그런 속에서도 혼사는 추진되니 3년 후인 1924년에 서윤제와 권씨 딸은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다.(98) 모두가서일장군수하분들의수고덕분이다.

1930년 덕원리 마을

   덕원리마을은함북도기운이묻어나는조선이주민들의아담한마을이다. 마을 뒤는 산으로 둘러 있고 마을 앞은 꽤나 넓은 평지인데 평지 끝으로는 왕청하가 흘러 가야하와 합수한다. 천교령 쪽에서 흘러 내리는 가야하는 덕원리 마을의 오른쪽 가에서 산과 산사이를 누비며 흘러 내린다. 이런 아담한 마을에 30여 세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니 명동학교 서일교장이 대종교를 펼치고 반일계몽활동을 벌리던 그 시절은 사람 사는 세상으로 북적이였다.  

   그러던함북도마을이서일교장이이끄는대오가서대파구십리평쪽으로지대를옮기니대번에한적한마을로바뀌여진다.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교장으로부터 총재로 부름을 달리한 서일장군을 받들며 오손도손 삶을 영위하여 간다. 20년대 초반까지는 독립군의 세상이다가 그 세월이 지나니 20년대 후반에는 조선공산당 기층조직이 마을에 뿌리를 내린다. 1930년 5.30폭동 이후 이들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넘으며 덕원리마을에는 이해 가을에 중국공산당 지부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당지부가 지도하는 공청단, 적위대, 농민협회, 반일회 등 군중단체들이 륙속  나타났다. 가을에는 대중적 추수폭동이 일어났다.

   혁명이였다. 반제(반일)반봉건의 기치를 든 혁명이였다. 혁명의 불길은 덕원리에서, 왕청현에서 세차게 타올랐다. 적들은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으로부터 경관증원대를 끌어 왔고 동북군도 보병 한개 퇀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1930년 10월 이후 대지주이며 동북군 돈화주둔 제7퇀 퇀장인 왕수당이 수백명 군대를 이끌고 반역자인한족연합회"(韩族联合会)남대관, 권수정을 두목으로 한 반동무장과 야합하여 연변 각지로 쏘다니며 야만적인 대토벌에 나섰다.(99)

   이자들중점토벌구는왕청현이다. 1930년 10월 라자구에서 조직된 라자구유격대(즉 왕청현유격대)는 중공왕청현위의 지도를 받으며 현안의 대흥구, 하마탕, 묘령, 천교령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이자들에 밀려 라자구 쪽으로 전이했다가 잠시 해산해야 했고, 중공왕청현위 제1임 서기 김훈과 제2임서기 김상화 등 많은 혁명자들이 체포되여 희생되었거나 연길감옥으로 끌려갔다. 덕원리마을도 피해가 막심했다. 토벌대 놈들은 덕원리마을 집집마다 뒤지며 혁명자들을 붙잡아 죽이거나 끌고 갔다.

   이렇게희생되고체포된혁명자들이왕청현에서만수백명에달했으니왕수당과남대관, 권수정에 대한 원성이 왕청현에 차고 넘치였다. 마을이 생겨 덕원리가 화를 당한 첫 피해사례라 하겠다. 이 피해에서 서일장군의 가족피해는 말그대로 엄청이다.

   1930년 가을 추수폭동은 친일주구를 처단하고 일본놈들 앞잡이인 민회를 불사르고 지주들이 더 받아간 량곡을 몰수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폭동이다. 강룡권선생의 글에 따르면 서일장군의 아들 서윤제와 안해 권씨, 서윤제보다 두살 위인 서일장군의 둘째 딸 서죽청과 그의 남편 최관 등도 당연히 이 폭동에 뛰여 들었는데 왕수당부대가 마을에 들이 닥치였다. 다행히 서윤제와 최관 등 마을의 적지 않은 청장년들은 미리 피신한데서 일대 화를 면하였다.

   그때서일의아버지이고서윤제의할아버지인서재운은 웃집령감의생일술을마시다가토벌대놈들이달려들었다. 놈들은 술상을 발길로 차 번지고 사람을 때리며 야단을 부렸다. 분이 치민 서재운은 주먹을 쥐고 일어 서다가 토벌대 총에 복부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100)

   같은시각서윤제의안해권씨도돌도차지않은둘째아들서만섭을업은잡히였다. 서일장군 부인 채씨는 며느리 등에 업힌 손자를 받으려고 나섰다가 총탁에 손목을 상하였다. 서일장군의 둘째 딸 서죽청도 끌려 나왔다. 그 서슬에 서죽청의 돌도 차지 않은 딸애 금순이가 울어댄다고 서죽청을 끌어내던 놈팽이가 금순이를 차서 부엌바닥에 떨어 뜨린다. 금순이는 심한 타박상을 입고 울지도 못하다가 후에 정신착란이 왔고 4살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101)

   서일장군의부친서재운로인으로말하면로인은복부에치명상을입고이튿날새벽에한많은세상을하직하였다. 로인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어디에선가 호박을 얻어다가 붙이며 토방법을 강구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한다.

   며칠  불행중다행으로놈들에게끌려갔던서윤제의안해권씨와누님서죽청마을사람들이풀리였다. 서윤제와 최관도 피난길에서 돌아왔다.

              1932년 봄 덕원리 마을

   덕원리마을에서이것이첫번째피해라면두번째피해는마을이재더미로 1932년 봄이다. 그 전해인 1931년 가을에 또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대중적 추수투쟁의 불길이 온 연변 대지에 타올랐다. 1932년 봄에는 춘황투쟁으로 번지였다. 덕원리 당지부도 마을사람들을 이끌어 이 추수춘황투쟁에 뛰여 들었다. 민분이 큰 친일지주와 친일주구들을 족치며, 더 받아간 량곡을 나누며 부글부글 끓어 번지였다.

   적들은미쳐돌아갔다. 1932년 봄에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에서간도파견대끌어들이고토벌대를집결하여연변 4개 현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광분하였다. 한데서 왕청현 덕원리도 그번 대토벌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32년 4월6일 이른 아침, 왕청현성 배초구 쪽에서 밀려 온 일제토벌대 놈들이 덕원리마을에 달려 들었다. 기병과 보병으로 무어진 이 토벌대는 날이 밝자 마을 앞 평지넘어 건너 산—대선산(大仙山)에 대포를 걸어 놓고 쏘아댔다.(102) 미처피난하지못한사람들이명동학교가산인마을동산수림에올랐다가비행기의기총소사를당했다. 이번에는 보병들이 동산수림에 불을 질러댔다. 사람들은 불에 밀리워 류수하 쪽으로 몰키였다.

   이날토벌대는대선산에서 200여 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비행기가 저공비행하며 적수공권의 사람들에게 기총소사를 들이댔다. 오전 10시부터 덕원리마을에 덮쳐들어 불을 지르니 마을은 재더미로 변해 갔다. 피난하지 못한 마을  김낙언의 안해와 조희문의 모친이 불속에 꺼꾸러졌다.

   바로전날 4월 5일, 이 토벌대놈들은 배초구 쪽에서 밀려 오는 길에 도문에서 왕청으로 향하는 골안 길가에 자리잡은 대감자(大坎子)마을에 덮치여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 대감자마을은 중국인과 조선사람들이 모여사는 200여 호의 마을인데 놈들은 이날 80여 호 가옥을 불사르고 홍두극 등 8명을 불속에 넣어 죽이고 10여 명을 체포하는 만행( 이해 봄, 선후 적들에게 살해된 사람이 30여 명에 달한다)을 저질렀다.(103)

   4월 6일에는 또 덕원리마을을 재더미로 만들고도 성차지 않아 왕청하를 거스르며 올라가 소왕청 골어구 산밑에 자리잡은 동일촌(东一村)몽땅불태워버리였다.

   치떨리는일본침략자들의만행, 같은 하늘을 떠이고 살 수 없는 간악한 무리들, 그때 군중들 속에서는 노래 한 수가 전해졌는데 이 노래를 보면 적들의 만행이 얼마나 잔인하고, 토벌에 항거하여 일어난 조선사람들의 항일(1931년 9·18사변 후는 반일이 항일로 불리운다.)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알 수가 있다.

 

  1932년 4월 6일

   대감자에서반일전쟁개막되였다

   대포알은앞뒤산에들들울리고

   기관총과유산탄은빗발같도다

   비행기는공중에서폭탄을던져

   무산대중학살을능사로한다

   대두천에화염은하늘에닿고

   덕원리의  농촌은재터뿐이다

   무죄양민주검은들에널리고

   왕청들엔인적이고요하구나

   만주땅에살고있는무산대중아

   일치단결일어싸워나가자

   우리들은끓는피로전쟁장에서

   승리의깃발을휘날리리라  

   노래제목은대감자전가인데가사는조선전적지답사단이지난 50년대 후반기에 중국 동북 일대를 전면 답사하고 출판한항일무장투쟁전적지를찾아서(1960년 출판)에 처음 실리였다.  그들이 현지 취재하고 그대로 실은 가사이다. 강룡권선생이 왕청의 김희재로인한테서 수집한 가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9백 32년 4월 6일에

   대감자의반일전은시작되였네

   무죄양민주검은들에널리고

   피는흘러만주들에물들었나니

   대포알은앞뒤산에뜰뜰울리고

   기관총과유산탄은비발같도다

   비행기는공중에서폭탄던지니

   무산대중학살을능사로한다

   대두천의화염은하늘에닿고

   덕원리의농촌은재터뿐이다

   이난민은사오방에널려있고요

   왕청들엔인적이  고요하구나

   만주들에잠겨있는무산대중아

   일치하게단결하여일어나거라

   우리들은끓는피로전쟁장에서

   승리의붉은깃발휘날리리라(104)

   1932 4월, 덕원리 토벌과 동일촌 토벌에서 두 마을은 완전히 없어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였다. 다행히 강룡권선생이 서일장군 후예들과 로인들을 만나며 적은데서 덕원리 마을 33호(마을이 토벌을 맞기 전 33호였다)와 그 호주들의 이름이 남게 되였다. 그 호주를 이름을 그대로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최학삼, 엄로규, 리대흥, 최두봉, 김동환,

   김춘일, 리주봉, 최익현, 김기인, 최세일,

   ×× (리서방), 박학준, 리홍렬, 최동권,

   김창환, 김문명, 조권순, 조신순, 김문약,

   최수항, 채기철, 김영환, 엄정남, 김리흠,

   최선생 (한의),  방창준, 김병흠, 김관세,

   한승묵, 리응세, 정공예, 정공순, 최두빈.(105)

1932년 4월 6일 재난성을 띤 토벌 이후 왕청현 덕원리마을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지금 이 유서깊은 고장을 찾으면 그젯날의 마을 옛터만이 사람들을 쓸쓸히 맞아줄 뿐이다. 덕원리 마을 옛터라고 아는 사람들도 별반 없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영영 사라질 것인가? 아니 그래서는 안 되지, 그래서 소수의 연구가들만 보는 책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널리 볼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속에 우리의 서일장군이 우렷이 떠오르고 우리의 천천만만 항일지사들이 살아 움직인다.

오늘도왕청땅을질러내리는가야하강반의대선산북쪽산기슭큰길가에나서면그젯날덕원리마을옛터가환히안겨오면서여기가유서깊은력사의덕원리라고가르친다. 겨레의 서일장군이 두만강을 넘어 발을 들여 놓은 지도 올해(2011년)로 어언 100돌이라고, 북로군정서의 전신—중광단 설립 100돌이라고 가르친다……

2011년 8월 27일, 강남 두앵원 초고

2013년 2월4일2월 14일 대폭 보충수정

【주해】

(1) 두만강아너는알리라, 문학과 예술, 1991년 제3호, 제49페지

(2) 두만강아 너는 알리라, 문학과 예술, 1991년 제3호, 제50페지

(3) 두만강아 너는 알리라, 문학과 예술, 1991년 제3호, 제50페지

(4) 두만강아 너는 알리라, 문학과 예술, 1991년 제3호, 제50페지

(5) 원 연변력사연구소 이주사 조사자료

(6) 두만강아 너는 알리라, 문학과 예술, 1991년 제3호, 제51페지

(7) 두만강아 너는 알리라, 문학과 예술, 1991년 제3호, 제51페지

(8) 두만강아 너는 알리라, 문학과 예술, 1991년 제3호, 제53페지

(9) 원 연변력사연구소 이주사 조사자료

(10) 임희준 편저, 중국조선민족항일투쟁유적지, 연변대학출판사,

1996.6, 제32-35페지

(11) 리광인, 겨레 항일지사들, 제1권, 민족출판사, 2007.10, 제2페지

(12) 김상 편찬, 조선민족의 성씨와 본, 연변인민출판사, 1993.4, 제 139페지

(13) 백가성대전(한어문), 운남교육출판사, 2010.1, 제187페지

(14) 백가성대전(한어문), 운남교육출판사, 2010.1, 제187페지

(15) 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겨레얼을 빛낸 력사인물 100인,

경인문화사, 2008.12, 제 64페지

(16) 김상 편찬, 조선민족의 성씨와 본, 연변인민출판사, 1993.4, 제 141페지

(17) 사)국학연구소, 국학논고 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수행편), 북캠프,

2008.4, 제 94-95페지

(18) 사)국학연구소, 국학논고 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수행편), 북캠프,

2008.4, 제 94페지

(19) 송우혜, 윤동주평전(개정판), 도서출판 세계사, 1998. 8 (초판은 1988. 12)

(20) 사)국학연구소, 국학논고 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수행편), 북캠프,

2008.4, 제 95페지

(21) 김송죽, 반도의 혈 (제2부), 중국 연변 《조글로》사이트

(22) 김송죽, 반도의 혈 (제2부), 중국 연변 《조글로》사이트

(23) 김송죽, 반도의 혈 (제2부), 중국 연변 《조글로》사이트

(24) 김송죽, 반도의 혈 (제2부), 중국 연변 《조글로》사이트

(25) 연변문사자료(5),  교육사료전집, 229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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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룡정3.13반일운동 80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9, 293294페지

(88) 시의 2년은대한민국상해림시정부 2 1920년을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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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리광인, 씨비리조선민족이중국동북에로의재이주, 문학과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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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리광인, 씨비리조선민족이중국동북에로의재이주, 문학과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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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김송죽, 반도의 혈 (제3부), 중국 연변 《조글로》사이트

(93) )국학연구소, 국학논고 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수행편), 북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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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강룡권, 서일과 그의 후예들, 우리 글 문학지 《장백산》, 1990.6, 제79페지

(95) 사)국학연구소, 국학논고 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수행편), 북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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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사)국학연구소, 국학논고 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수행편), 북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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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강룡권, 서일과 그의 후예들, 우리 글 문학지 《장백산》, 1990.6, 제79—80페지

(98) 강룡권, 서일과 그의 후예들, 우리 글 문학지 《장백산》, 1990.6, 제80페지

(99) 리광인, 겨레 항일지사들, 제1권, 민족출판사, 2007.10, 제140페지

(100) (101) 강룡권, 서일과 그의 후예들, 우리 글 문학지 《장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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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내부자료, 왕청현문물지(한어문), 1983.10, 제91페지

(103) 내부자료, 왕청현문물지(한어문), 1983.10, 제90페지

(104) 강룡권, 서일과 그의 후예들, 우리 글 문학지 《장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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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강룡권, 서일과 그의 후예들, 우리 글 문학지 《장백산》,

1990.6, 제82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