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평전12 제12편 청산리 청산리제12편 청산리 청산리
서일총재의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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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9월 7일 마지막으로 로씨야 연해주 무기구입에서 돌아 온 서일장군은 인차 부총재 현천묵과 수하 사령관 김좌진한테서 길림륙군 제1혼성려 보병 제2퇀 퇀장 맹부덕의 수하들이 다년 간 회보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연해주 왕복길에서 보고 수집한 일본침략자들 관련 정보들이 심상치 않았다. 적정을 분석하고 있던 서일장군은 수하 장령들의 회보를 듣고 맹부덕의 권고를 따르기로 했다. 맹부덕퇀장의 권고는 진짜 북로군정서를 위시한 조선인 반일무장단체들을 생각해서 나오는 진심의 발로였다. 그렇지 않고 맹퇀장이 우로부터의 층층 명령에 의해 반일무장단체들과 무장충돌에 나서야 할 때는 그 후과를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서일은홍범도장군의제의도흔쾌히받아들이였다. 이에 따라 타지방으로의 전략적 전이를 앞두고 9월 9일 오전 10시에 십리평 잣덕의 본부에서 산하 사관련성소 제1회 사관생졸업식을 앞당겨 가지기로 명령하였다. 이날사관련성소 298명 사관생졸업식은 군정서 산하 성원들과 래빈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리였다. 사관졸업생 일동이 군례를 올리고《독립운동가》등을높이부르자대회장은온통끓어번지였다. 이어 김좌진 소장의 졸업식 례식과 총재, 부총재의 훈시, 래빈의 축사, 최우등생 김옥현(金玉玄)의답사가있은뒤소장이사관생들에게졸업증을수여하였다. 마지막에 만장일치의《만세!》소리가터져올랐다. 저녁 7시엔 또 무대를 꾸미고《독립혼》이란연극을공연하였다. 철거전의 분위기는 자못 긴장하였으나 제1회 졸업식은 대성황을 이루었다.(72) 9월 12일, 북로군정서는 서일장군의 명령에 좇아 보병 한 개 대대를 새로 편성하고 대대장 이하 각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임명되였다. 소대장 12명 중에는 사관련성소 제1회 졸업생 10명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제1회 졸업생 200명은 교성대(教性队)로 조직되고 나머지 80여명은 따로 요직들에 배치하기로 하였다. 리범석이 교성대 대장을 맡고 소대장들도 모두 배치되였다. (73) 서일장군은북로군정서지도부와함께전문회의를가지고북로군정서부대를동부와서부 2개 전선으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서부전선에 소속된 1000여 명 주력부대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누어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소수레에 싣고 9월 17일부터 십리평 잣덕 본부를 떠나 화룡현 토산자 관문 쪽에서 추격하는 일본침략군을 일망타진하기로 하고, 서일장군은 동부 전선에 속하여 직접 북로군정서 기관과 가속 그리고 후방부대를 이끌고 동으로 움직이며 기회를 보아 적들과 조우전을 벌리는 한편 새 근거지 창설에 전력하기로 하였다. 한편군인들이입을동복제작을다그치였다. 북로군정서 군인모두가 떡갈나무색갈을 들이여 만든 여름군복으로 입고있었는데 일치하게 운두가 둥그런 모자에 새 찌까다비를 일매지게 신은데다 신식의 체코식장총으로 무장하고 보니 그 의용이 이를데 없이 름름한지라 찬탄하여 갈채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북로군정서는 12일까지 졸업사관생을 중심으로 하는 려행단(교성대)과 150명가량의 사관으로 사령관경비대와 북로군정서군의 본대를 편성하고 이동준비를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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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부터 북로군정서 서부전선의 1000여 명 무장대오는 서일총재의 명령에 좇아 선발대와 본대로 나뉘어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운송마차에 싣고 근거지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처음 선발대는 대감자로, 본대는 유수천 일대로 떠나다가 유수천 일대에 이미 중국군대가 동원되였다는 정보를 전해 받았다. 본대는 서대파의 세번째 부락에서 숙영하고 18일에 대감자의 한 마을에 이르렀다. 부대는 이곳에서 땅속에 묻은 총기 50여 자루와 탄약 1000여 발을 파냈다. 또한 군정서 간부들은 회의를 가지고 당지에 100여명 대오를 남기였다. (74) 북로군정서서부부대가다시머무른곳은위자구였다. 21일 서부부대는 위자구를 떠나 남양촌을 거쳐 연집의 신흥동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다음날 부대는 연길현 팔도구 부근을 거쳐 차조구 일대로 우회하면서 화룡현 토산자 관문 쪽으로 움직이였다. 9월 18일, 서일장군은 이제 적과의조우전을계획하여북로군정서기관과가속그리고후방부대로무어진동부전선대오를지휘하여동으로움직이였다. 치중차(輜重車)로 동원된 마차만도 모두 84대. 서부와 동부 두 대오의 행렬을 합하면 10리도 넘는지라 사기충천한 독립군의 이 행군이야말로 위용이 대단하여 보고는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동해가는 로변(路邊)마다 동포들의 환대가 대단하였다.
백두산하넓고넓은만주뜨락은 구국영웅 우리들의 운동장일세 걸음걸음 떼를 지어 앞만 향하여 활발발 나아감이 엄숙하도다
한양성 자유종이 떵떵 울리고 삼천리 독립기를 펄펄 날리세 자유의 새 정부를 건설하고서 무궁화 동산에서 만세 부르세
전사들이 부르는 힘찬 노래소리 산간을 울리였다. 그러나 북로군정서는 이미 중국군과의 약속이 있었으므로 국도대로를 통과할 수 없었고 지어는 평야의 농로마저 낮에는 마음대로 리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악조건하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주력대오는 주로 야음을 타서 화룡쪽을 바라고 대황구(大荒溝)를 거쳐 왕청현 이북으로 험산준령을 지나 의란구의 깊은 산길을 따라 행군했다. 북로군정서의전략적이동을헤아려보았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8월에 이미 대이동에 오르면서 연변 반일무장단체들의 전략적 이동의 서막을 열였다. 그들은 이해 8월에 명월구를 거쳐 화룡현 서북부에 이동하였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은 8월 말 연길현 이청배란 병영에 주둔하고 있다가 9월에 중국군 맹부덕부대가일제의강박으로토벌에 나섰다는정보를입수하고화룡현어랑촌 일대로전이하여홍범도부대와힘을합치였다. 안무부대는 화룡현삼도구, 맹가동, 부동과 강장동등지지형정찰을하고군자금과군수품을 모집하면서홍범도부대와의배합작전을도모하였다. 최명록부대는봉오동을떠나동쪽으로움직이며왕청현라자구에이르렀다. 의군부, 신민단, 광복단 등 무장단체들은 대체로 두갈래로 나뉘어졌는데 대부분은 홍범도, 안무 부대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고 소부분이 라자구 쪽으로 이동하였다.
경신년대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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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그 시절 연변의 행정구역은 화룡, 연길, 왕청, 훈춘 4개 현으로 이루어졌다. 연변 4개현에서 활동하던 겨레 반일무장단체들은 맹부덕의 사전 통보와 일제의《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실시에직면하여 8월과 9월 사이 선후로 모두 원래의 근거지들을 떠나 서부와 동부로 이동하였다. 이 전략적 이동을 두고 원 연변대학 교수 임희준은 론문—《1919~1920년 연변지구 조선족민족주의 반일무장투쟁연구》에서자기의견해를내놓았다.
동쪽으로이동한훈춘한민회, 라자구의사부 부대는 북만으로 철퇴하여 토벌계획을 벗어남과 아울러 로씨야의 조선인 반일단체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동쪽으로 철퇴한 최명록의 부대는 서쪽으로 이동한 홍범도부대와 결렬하였다는 점이다. 서쪽으로 이동한 홍범도의 련합부대는 한 방면으로는 화룡, 안도 접경지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하려는 것이였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하지 못할 겨우 황구령을 넘어 포위권을 벗어나 장백산지구에 근거지를 창설하려는 것이였다. 마찬가지로 서진한 북로군정서 부대도 원 대종교의 세력범위였던 화룡현 삼도구에 기지를 건립하여 혹시 퇴각할 때에 교도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고 화룡, 안도를 지나 자매단체인 서로군정서군의 활동지대인 남만으로 접근하려 하였다.(75)
임희준교수는연변여러반일무장단체들의전략적이동을비교적현실적으로설명하고있어보는이들에게편리를도모하고있다. 연변 반일단체들의 이동이 그러했으니 당황망조한 것은 일본군이였다. 중국군대로 조선인 반일무장단체들을 토벌하여 소멸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자들은 기정된《간도지방불령선인 초토계획》에따라연변에직접출병하려고서둘렀다. 그러나 직접 출병하자니 여론의 압력이 두려웠다. 그래서 찾은 구실이 이른바《훈춘사건》조작이였다. 1920년 9월 12일, 일본측은 훈춘의 당지 비적 왕사해(王四海)와 만순(万顺)를 매수하여 그들 부하 300~400명이 훈춘현성을 들이치며 사단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훈춘현성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의 생명재산에 해를 끼치는 가상을 조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9월 12일 습격에서 이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측은 재차 진동(镇东), 만순 등을 사촉하여 10월 2일에 훈춘현성을 재차 들이쳐 일본령사분관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곤《일본거류민회》회장을사촉하여 일본군의출병을요구하는전보를치도록짜고들었다. 일본군 출병의 전제조건이 동북지구의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개괄적으로보는이른바《훈춘사건》의진상요점이다. 일본은 저들이 짜고든 각본 절차에 따라 즉각 출병을 결정하지만 중국 당국은 거절로 대답한다. 이에 일본은 10월 16일에 일방적 최후 통첩을 내고 10월 17일 영시에 즉시 출병한다고 통고하기에 이른다. 1920년 10월, 일본제국주의는 연변 등지의 조선사람들 집거구에 대해 전대미문의 피비린 대살륙—경신년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토벌에 투입된 총병력은 1만 8000~2만 명에 달했는데 그 주력부대는 라남주둔 제19사단이였다. 19사단은 또 이소바야시(矶林)지대, 아즈마(东正彦)지대, 기무라(木村)지대 3개지대와 사단직속부대, 국경수비대 등으로 나뉘여 물밀듯이 연변 각지에 덮쳐들었다.(76) 19사단 소속 기무라지대는 10월 20일 밤에 조선의 온성부근에서 두만강을 넘어섰다. 22일에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왕청현 십리평 일대를 소탕하고 배초구와 왕청, 훈춘 등지 그리고 연길현 의란구, 팔도구 등지에서 150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살해했다. (77) 연변을중심으로한두만강, 압록강 이북의 조선 사람들 집거구는 삽시에 살벌한 기운이 꽉 찼다. 심여추가 쓴《연변조사실록》에서는《일본침략자들은도처에서조선인촌락에대하여위협공갈하여남녀로소할것없이모조리집안에가둔채불을질러태워죽이였다. 무릇 불속에서 뛰쳐 나오는 자 있게 되면 즉시 총칼로 찍어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하였다.》고밝히였다. 1920년 11월 9일부《길장일보》는《최근 3주일 내에……연변 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 명에 달한다》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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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놈들때문에숨도바로쉬지못했습니다.……》 1989년 6월 17일 오후,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필자가 연길시 새마을(新村)에서 순난렬사의 후대 조애숙(그해 77세)을찾았을때그는이렇게허두를떼였다. 그리고는 가슴이 막히는듯 인차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지나 천천히 이야기를 터놓았다. 조애숙은충청북도충주군의한천주교가정에서태여났다. 그가 7살나던 해 겨울에 아버지의 이불짐 위에 앉아서 두만강을 건너 자리잡은 곳이 연길현 팔도구 수북천(원 룡정시 팔도향 팔도촌 부근)이였다. 그때 애숙의 아버지 조병일은 신의 질을 하면서 천주교를 믿었지만 실상은 조선에서부터 활약한 열렬한 독립운동가로서 팔도구일대 독립무장단체의 책임자였다. 1920년 10월 하순에 일제토벌대가 팔도구 일대에 덮쳐들었다. 이에 앞서 친분이 두터운 팔도구경찰서의 백순사(백인칠의 아버지)가 수북천에 와서 조병일을 보고 어서 피하라고 하였다. 그때 조병일은 누구나 다 피신하면 독립운동은 누가 하겠느냐며 피하지 않았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무리 일본군이 그의 집에 주숙을 정하게 되였다. 그러자 그의 안해는 안절부절 못했다. 집안 천정에는 독립군부대에 넘기려고 모은 양말, 신, 의복, 약품 등 물건이 있었다. 다행히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병일의 신분이 드러났다. 어느날 저녁 놈들은 조병일을 붙잡아 학교로 끌고갔다. 이튿날 오후 그의 안해와 딸 애숙이가 호출을 받고 가보니 조병일은 놈들의 혹독한 고문으로 머리가 터졌는데 강당엔 피가 질벅했다. 조병일의안해는구해낼방법이없음을직감하고남편의부탁대로교회당의최신부를모셔왔다. 천주교의 종부성사가 끝난 후 국수집에 가서 국수 한그릇 받아왔지만 조병일은 물도 넘기지 못했다. 그들 모녀가 집에 와서 얼마 안되여 총소리가 세 번 울리였다. 애숙이는 이렇게 8살에 아버지를 여이였다. 이튿날조병일의안해는가을한조이밭에서남편의시체를찾아딸애숙이와함께대충묻어놓았다. 그리고는 경찰서 백순사를 찾아 성당묘지에 모시도록 도와 달라고 청들었다. 일본놈들은《조선독립만세》를세번부른사람이여서다치지못한다고했다. 백순사가 이듬해 밭갈이에 시끄럽다며 재삼 제기해서야 겨우 허가를 받았다. 조애숙은 69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손등을 자주 눈굽에 가져갔다. 이해 6월 21일, 필자는 조애숙, 심태순(조애숙의 외손녀)과 함께 팔도구를 찾아갔다. 그날필자는조병일의순난터와수북천마을자리, 천주교회당, 성당자리 등을 답사하고 팔도촌의 권오승 로인집에서 이 촌의 몇몇 로인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그들은 팔도구 일대서 성망높은 독립투사—조병일을 잊을 수가 없다며 혀를 찼다. 그 자리엔 또 당년 일본토벌대에 피살된 리경찬투사의 딸 리기순(1989년에 74세)도 있었다. 리기순은팔도구수커리(쌍봉촌)출신인데 경신년대토벌 때 6살이였다. 그해 그의 아버지 리경찬은 30대의 사나이로서 조병일의 련락원이였다. 그는 팔도촌 건너 마을 수커리에서 일본토벌대 놈들에게 체포되여 수북천으로 끌려갔다. 그는 수북천에서 조병일의 집마루 기둥에 묶여 있다가 교회당 윗쪽 3층대바위에 가서 학살당하였다. 시체는 한달 만에 찾아서 수커리 뒤산에 겨우 매장했다고한다. 필자는또독립투사김병렬에대한이야기도감명깊게들었다. 김병렬의 며느리 박복실(그해 69세) 등 로인들의 소개에 따르면 김병렬은 성당촌 사람으로서 조병일의 수하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토벌대의 심사를 받을 때 정신병자로 가장했다. 낮에는 분별없이《애국가》등노래를부르며다니고밤에는자다가도일어나소리치며다니니놈들은깜짝속히웠다. 김병렬은 늘 술에 취한 척하면서 영어로 일본놈들을 욕했다. 이무렵에경찬의안해도갖은고초를겪어야했다. 야수들은 갓 해산한 그를 수북천 버들방천에 끌고가서 옷을 홀딱 벗기고 군도로 찌르는 형용을 하며 악랄하게 위협하였다. 넋이 날아날 지경이였지만 녀인은 용케도 뻗쳐냈다. 그만큼팔도구는당년독립운동의주요한활동지구였다. 그에 앞선1988년 10월 21일과 22일 왕청현 춘양진에서 전명준(그해 88세)로인을 취재할 때 그는 당년 팔도구에서 홍범도장군을 여러번 보았다고 했다. 전명준로인은당년지방독립운동단체의련락원이였다. 그는 강원도 평강군 태생인데 18살 때 부모를 모시고 두만강을 건너 왔다. 그의 일가가 팔도구 수커리에서 살다가 목단천을 거쳐 의란구 학교촌에 이사한 때는 1920년 가을이였다. 그때 마을의 호주인(戶主人)은 리씨라고 하는 60세 좌우의 로인이였다. 모두들 그를 리주사라 불렀는데 원근에 성망이 높았다. 그때 그는 늘 팔도구로 다니였다. 후에야 알고 보니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그가 팔도구로 다닐 때는 꼭 회의하러 갈 때였다. 1920년 10월 어느날, 리주사 등 12명이 팔도구에 가서 긴급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오다가 의란구 쪽에서 나오는 일제놈들에게 몽땅 붙잡혔다. 놈들은 그들을 결박해 가지고 가다가 어느 산에서 살해하였다. 리주사와 끌끌한 장정이 잃어지자 온 마을이 동원되여 샅샅이 찾아 보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이듬해 봄 햇풀이 머리를 들 때에야 겨우 시체를 찾았는데 이 생매장된 시체들마다 온통 칼자리 뿐이였다. 하늘도저주할만행이였다. 그럼 팔도구와 의란구 부근의 산에서 귀축같은 만행을 저지른 자들이 대체 일본군 어느 부대일까? 로인들은 머리만 가로 저었다. 기억난다면 일본군이 노랗게 밀려들더라는 것뿐이였다. 알고 보면 팔도구와 의란구의 순난자들은 바로 19사단 소속 기무라지대의 놈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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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시는경신년대토벌에서심한재난을당했다. 1988년 11월 22일 필자는 훈춘에 가서 먼저 마천자향 포태촌의 김하익로인(그해 75세)을 찾았다. 《나는경신향회룡봉태생인데경신년토벌때백부김홍석이회룡봉에서붙들려금당에서죽는것을직접보았수다.》 그의말에의하면백부김홍식은회룡봉현립8소 교원으로서 지방에서 독립선전활동을 벌리며 의연금을 모았는데 놈들에게 살해될 때 29살 쯤 밖에 안되였다. 그날 놈들은 회룡봉과 그 일대에서 김홍석, 박현규 등 7명을 붙잡아 금당촌(경신진 금당촌) 숭실학교에 끌고가서 불태워 죽이였다. 김하익로인은 먼 발치에서 이 비장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한다. 1992년 2월에 필자는 녀류작가 리혜선씨와 함께 두만강이주 답사차로 방천에 갔다가 그때의 경신향 금당촌에도 가보았는데 당년의 순난터—숭실학교 자리에는 그때의 기초 돌하나가 그대로 박혀있었다. 당지 사람들은 혁명자들의 넋이 스며 있다하여 이 기초돌을《귀신돌》이라고불렀다. 훈춘시가지에는당년국내외에이름떨쳤던반일독립투사황병길의딸황정일(1913년~1989년)이 살고있었다. 필자는 일찍 황정일로인을 찾아 황병길과 그의 일가를 둘러싸고 옹근 3일이나 이야기를 들었다. 1920년 음력 4월 중순 황병길이 불행히 사망된 후 그의 안해 김숙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권총과 태극기보따리를 목숨처럼 아끼며 잘 간수하였다. 그해 음력 9월 초나흗날 훈춘애국부인회 회장인 그녀는 남편의 유물을 다른 곳에 옮기자고 내놓았다가 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 위급한 찰나 그녀는 남편의 유물을 제꺽 집안의 돼지물통에 넣었다. (유지로 쌌기에 탈이 없었음) 뒤미처 집안에 들어선 놈들은 아무 것도 뒤지지 못하자 황병길이 죽지 않았다면서 무덤까지 파헤쳤다. 이날아무것도얻지못한놈들이동네의남자들만열다섯을연통라자의빈학교에가두고불을지르려고서두를때김숙경이척나섰다. 《이사람들은죄없는사람들이에요. ‘죄’는나에게있으니이사람들을어서내놔요.》 이렇게붙잡힌사람들은모두죽음의고비에서벗어났다. 다만 한 30살 쯤 되는 최현숙이라는 남자가 이에 앞서 뛰다가 총에 맞아 죽었을 뿐이였다. 이날 그녀는 놈들에게 끌려갔다가 36명 우리 동지들과 함께 마적달아래에서 적들 총구 앞에 나섰다. 기관총소사가 곧 시작될 무렵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한 일본군장교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가 뭐라고 지껄이자 놈들은 36명 동지들을 순순히 내놓았다. 김숙경이 중국인형제들의 마차에 실려 연통라자의 자기 집에 도착한 것은 집 떠난 지 10여 일 후였다. 그해음력 9월 초엿새날 일본군은 대황구에도 달려들였다. 마침 대황구 북일학교 천정에서 당년에 안중근, 황병길 등이 이또 히로부미를 암살하려고 결의한《단지동맹 (斷指同盟)》의도끼, 목데기, 손가락마디가 발각되였다. 이는 그들이 손가락마디를 도끼로 자를 때 쓰던 물건들이라 한다. 결과 학교의 명예교장 김남극과 교원 량병칠, 김하정이 체포되였다. 마을에서도 20여 명이 붙잡혀 학교마당에 끌려 나왔다. 이때 김남극이 나서서《이 물건들은 내가 감추어 둔 것이니 쏠테면 나를 쏘라.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없다.》고비호해나섰다. 놈들은김남극, 량병칠, 김하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내놓았다. 이날 놈들은 김남극과 량병칠 두 사람을 북산기슭의 말뚝에 묶어놓고 기관총으로 쏘아 죽이고 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놈들이 물러간 후 사람들이 모여들어 불을 껐기에 학교는 한쪽켠이 좀 탔을 뿐이였다. 그후 사람들은 다시 학교를 수건했는데 그때부터 이 학교를 3·1학교라고 불렀다. 황정일은후에김남극의며느리로되면서대황구에서도항일활동에종사하였기에대황구의사실도잘알고있었다. 일본침략군은연통라자, 대황구, 회룡봉 외에도 훈춘각지에서 대토벌을 일삼았다. 조선강점군 제19사단 이소바시지대는 훈춘에서 다시 3개 토벌대로 편성된 뒤 10월 14일 밤중부터 훈춘일대에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제1토벌대는 10월 14일부터 18일까지 훈춘 동부와 동북부의 28개 부락을 토벌하였다…… 제2토벌대는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훈춘 일대의 허다한 부락을 토벌하였다…… 제3토벌대는 15일 훈춘 동북부와 동남부의 많은 부락을 토벌하였다…… 로씨야원동지구에서투입된제11사단(울라지보스또크 파견대)의 토문자지대(12월 15일 로씨야 경내로 퇴각)와 제13사단(울라지보스또크 파견대)은 제19사단의 이소바시지대와 배합하여 토문자, 로흑산과 라자구 일대를 토벌하였다. 했으나일제토벌대놈들은가는곳마다에서조선인반일투사들의견결한반대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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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년의연길현장암동(원 룡정시 동성용향 동명촌)은 일명 노루바위마을이라 하는데 경신년대토벌 그해 심한 토벌란을 겪었다. 당시 룡정촌 카나다 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이였던 마띵은 노루바위골을 현지 답사하고《견문기》를썼는데그가운데한토막은이러하였다.
나는 10월 31일(일요일) 마차로 12마일 떨어진 장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하였다. 10월 29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 보려는데서였다. 그날 날이 밝기 전 무장한 일본군이 이 촌락을 포위하고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을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78)
그후이견문기는서방여러나라신문에널리실려강렬한반항을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인지 노루바위골은 우리의 마음을 몹시 끄당기였다. 1991년 12월 10일 필자 일행은 마침내 노루바위골 답사길에 올랐다. 연길에서뻐스를타고그때의동성용향소재지로간우리는 7~8킬로메터를 좋이 걸어서야 이 향의 동명촌(동명 2대)에 이를 수 있었다. 이 촌은 노루바위골 원골의 중간쯤에 위치한 마을로서 일명 삼구촌이라고도 불렀다. 관련 조사자료에 의하면 지형은 여기서 다시 남북방 세 개 골로 갈라지는데 원골을 남골이라 하고 북쪽골을 북골, 중간골을 샛골(사이골이란 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삼구촌이라 부르게 된 유래이기도 하다. 이날우리는동명촌에서 1.5~2킬로메터 떨어진 북골의 북동(동명3대)에 가서 김흥섭(1991년 72살) 로인을 취재하는 가운데서 이 고장 세 개 골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였다. 그것은 남골, 북골을 각기 남노루바위, 북노루바위로 부른다는 것과 샛골은 다시 샛골과 웃새골 2개 마을로 갈라지는데 경신참변을 당한 마을이 바로 웃새골이라는 것이였다. 여러 자료들에서 말하는 장암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큰 의미로 볼 때 장암동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엄격히 따지면 웃새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참변을 당한 것이 이 마을이고 당년 이 일대의 중심지가 웃새골이였기 때문이다. 김흥섭로인의아버지김경흥(광복직전에 70살로 사망)이 조선서 이 고장으로 이주할 때는 19살이였다. 지금 살아 계신다면 119세(1991년)가 된다. 100년 전에 벌써 북노루바위에 자리잡았다는 말이다. 그때 이 일대에 조선인이 몇세대 되였으니 이곳 개척은 19세기 90년대 이전으로 되고있다. 조선인으로서 지금의 룡정에 첫 발을 들여 놓은 것이 1884년이라고 할때 이와 비슷한 시간이 된다. 김로인은 이런 일화도 들려주었다. 19세기 90년대 초의 일이다. 수수를 좀 심어야겠는데 씨종자가 없었다. 마침 서남으로 35리 쯤 가면 조선인마을이 있다고 하기에 그리로 가니 과연 우물가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이 다름 아닌 우리가 일컫는 룡드레촌(룡정)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북노루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였다. 하여 그때로부터 노루바위골에도 수수를 심게 되였다. 이주초기의 한 모퉁이를 보여주는 귀맛당기는 일화였다. 김로인은경신년태생이다. 그가 태여나던 해에 웃새골에 20호 가량의 조선이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7~8살 될 때에는 30여 호로 늘어났다. 후에 김로인은 자기 마을 력사에 짙은 흥미를 가지고 허창호 등 로인들한테서 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상 깊은 것은 경신참변이였다. 당시에노루골에는경신참변을앞두고한엿장사가나타났다. 그는 엿을 파는 척하면서 조무래기들과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아는가고 물었다. 그곳을 지나던 마을의 한 청년이 이 말을 듣고 의심이 들어 인차 국민회조직에 알리였다. 하여 마을청년들은 엿장사를 불러다 따지고들었다. 그자는 모르쇠를 대였다. 그러자 청년들은 그자를 뻐드러지게 때려주었다. 그러다가 어두워지니 더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시체》가오간데없었다. 이때 룡정에서 조사가 온다는 소문까지 파다히 퍼졌다. 독립운동투신자들은 분분히 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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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음력 9월 20일(양력 10월 30일)이다. 밤중에 웃새골에 이른 일제토벌대 놈들은 동살이 잡히자 일제히 마을에 덮쳐들었다. 마을의 남정들은 모두 결박당한 채 학교마당으로 끌려갔다. 토벌대놈들은 32명 남자들을 학교마당에 꿇어 앉히고 독립운동을 안하는 사람들은 일어서라고 호통쳤다. 뒤이어 학교마을에 떠밀어 넣고 기관총소사를 들이대고는 학교에 불을 질렀다. 뛰쳐나오는 사람은 가차없이 다시 떠밀어넣었다. 일제놈들은그러고도성차지않아남자라고보이는것은무턱대고총질했다. 그 서슬에 남쪽 령너머 덩때마을(동명 5대)에서 웃새골로 다니며 토기막을 하던 김씨(약 40세)가 총에 맞아 죽었다. 지금의 동명촌(당시 삼구촌으로서 물건너에 있었음) 남쪽밭에서 일하던 늪지골(북노루바위의 뒤너머 마을)의 리관준(30여 세) 농민은 물건너 3호동네로 내달아 3부자가 사는 농막에 뛰여 들었다가 뒤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뒤미처 농막에 이른 놈들은 악이 나서 그 농막과 곡식가리에 불을 질렀다. 이것이웃새골이당한경신참변의대체적상황이다. 마띵의《견문기》등에는 10월 29일이라고 하나 마을사람들은 10월 30일로 가슴속에 아로 새겼으니 구태여 캐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일제놈들에 대한 피의 원한이 가슴 한가득 괴여오른다. 김로인과이야기를나눈후우리는집마당에나가동쪽산을바라보았다. 산기슭엔 과연 노루를 방불케 하는 바위무리가 있었다. 노루바위라고 한것은 저 바위에서 인기되였다고 김로인은 덧붙혔다. 이어우리는김로인의안내하에마을앞개우물을건너샛골에접어들었다. 어구가 샛골 옛터라고 하는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 동으로 뻗은 샛골을 따라 1킬로메터 남짓이 걸으니 웃새골 옛터였다. 웃새골은 샛골치기였는데 역시 밭으로 되여있었다. 밭가운데로 나가니 사기와 질그릇쪼각들이 가끔 눈에 띄웠다. 김로인은 당년의 그릇쪼각들이라고 하였다. 밭웃쪽의낮다란산밑에자리잡은교회당자리도보이였다. 지금도 옛 모양이 력연했으나 터자리와 주위는 온통 나무판이였다. 아름드리 나무도 가끔 섞이였다. 흘러간 력사속에 묻히며 관련 조사자료를 펼치니 마을의 주민 모두가 예수교를 믿었다. 당시 국민회계통에서는 예수교를 외의로 지반을 닦았는데 웃새골은 노루바위 일대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로 되였다. 마을의 지방국민회 책임자는 한국룡(당시 약 60세)과 그의 아들 한두현(당시 약 30세)이였다. 그 시절 웃새골과 그 일대에서《조선독립만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등구호소리가터져올랐다. 이 마을조직은 왕청현 봉오동과 련계를 가지였다. 이들이 모은 군자금과 무기 등은 지체없이 봉오동으로 넘어갔다. 우리는발길을학교자리로돌리였다. 금방 마을자리를 지나니 골짜기 왼켠에 있는 마른 옛 박우물터가 발목을 잡았다. 70여 년 세월이 흘렀으나 박우물터는 돌하나 파손 없이 그대로 보존되여 있었다. 골짜기를 건너니 학교자리가 나타났다. 옛터가 그대로 드러났다. 항일로간부 량환준 등 로인들이 이 학교를 1914년에 예수교계통에서 세웠고 학교이름을《사립영신학교》라고했다던이야기가생각났다. 경신참변 후 학교는 령너머 원골(동명 4대)로 옮겨 갔다지만 옛모습은 여전했다. 산기슭에 닦은 터, 그 터를 받들어주는 돌담들이 정답게 안겨들었다. 필자일행은학교자리에서이윽토록떠나지못하고남쪽켠의학교밭(당지 사람들이 이렇게 부름)자리와 골짝 너머 웃새골 옛터, 교회당자리, 32인무덤산 그리고 웃새골의 정경을 한껏 되새겼다. 일제침략자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운 우리 겨레가 장하게, 장하게만 안겨왔다.
청산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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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훈춘사건으로출병의구실을찾은간악한일본침략자들은 1920년 10월 경신년대토벌에서 이르는 곳마다에서 우리 독립지사들을 가차없이 살해하고 불을 지르고 략탈하면서 날뛰였다. 연변인민출판사 1986년 출판으로 된《조선족략사》에따르면연변의화룡, 연길, 왕청, 훈춘 4개 현에서만도 일본토벌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람이 3500여 명에 달하며 5058명이 체포되고 2500채의 집이 불에 타고 30여 개 소의 사립학교와 45000여 섬의 양식이 소각되였다. 불완전한 통계임을 념두에 둘 때 실제 수자들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반일무장단체들은일본군의대거침략과 대토벌로이동중에있지만속수무책으로적을피하지만은않았다. 이들은 동부와 서부 2개 전선으로 나뉘어져 기회를 보며 일제침략자들과 거듭되는 조우전을 벌리였는데 그 대표적 조우전이 바로 이름난 청산리대첩이다. 북로군정서로 말하면 청산리대첩의 서막으로 되는 청산리전투는 서일 총재이고 최고사령관인 서일장군의 전략적 포치에 따라 진행한 전투였다. 청산리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여러 전투를 전방위적으로 립체적으로 자상히 알고저 필자는 지난 90년대 초반에 수차 현지 답사길에 올라 보았다. 1991년5월 20일, 필자는 연길서 열리고 한준광 리사장이 마련한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년차회의 참가자들과 함께 전용뻐스를 타고 청산리와 그 일대의 답사길에 올랐다. 연길을 떠난 전용뻐스는 두시간도 못 되여 화룡에 이른 후 서쪽으로 해란강을 거스르며 그때의 부흥향 변두리와 송하평을 뒤에 남기더니 청산리로 통한 굽이굽이 산길에 들어섰다. 우리는 마치 연길현 의란구의 깊은 산길과 로투구령, 장인강, 이도구, 대진창을 지나 200여 킬로메터 험로를 헤치며 한달만에 송월평에 이른 북로군정서 부대를 찾아가듯 마음은 하냥 설레이였다. 《저마을이송월평이요!》 누군가소리치자우리의시선은약속이라도한듯일제히왼편차창밖으로쏠리였다. 아담하고 오붓하게 자리잡은 산간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중국조선민족사연구일군들에게는너무나익숙한마을. 1920년 9월 17일과 18일에 김좌진장군은 서일총재의 명령을 받고 북로군정서 부대를 이끌고 서부전선—서쪽으로 진군하여 10월 12일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로 이동하였다. 1920년 10월 중순, 송월평으로부터 청산 증봉리에 이르기까지 북로군정서 부대로 쫙 덮히였다. (79) 북로군정서부대는서일총재의작전포치에따라워낙충신장(즉 삼도구)아래 토산자관문에진을치고뒤따르는일제침략군을일망타진하려다가그일대군중들이피해를입는다고싸움터를청산리쪽으로돌리였다. 그들은충신장(지금의 화룡현성) 대진창에서 점심을 치르고 이 늘찬 수십리 서쪽골짜기에 들어섰는데 삼도구일대 국민회와 대종교 계통의 군중들은 국민회와 군정서간의 계선을 타파하고 독립군에 초신, 의복, 정보 등을 전하고 식량 등을 거두어 부대주둔지로 운반하였다. 송월평의 조선사람들은 큰 소 한마리까지 잡았다. (80) 그때적들이계속뒤쫓는데서김좌진장군은송월평군중들이피해를입게해서는안된다면서부대를인차해란강을거슬러계속올라가게하였다. 일제침략군이새까맣게밀려든것은독립군부대가떠난뒤였다. 왜놈 통역 한 놈이 송월평의 한 군중을 붙들고 독립군이 어디로 갔는가고 물으니 그 군중은《우리 백성들이야 어찌 알겠소.》하고대꾸하였다. 이때마을뒤켠에서떠들썩하는소리가들리였다. 적들은 김좌진과 동성동명인 한사람을 묶으며 야단법석이였다. 애매한 군중이 욕을 보는 판이였다. 이때 일본말을 아는 마을의 김천일 농민이 일군장관한테 다가가 경례를 굽석하고 무어라 여차여차 하자 일군장교는 고개를 끄떡이며 김좌진군중을 풀어놓게 하였다. 이는청산리전투를앞두고송월평에서전해진일화이다. 우리가흘러간력사를거스르며당시의전경을담론하는사이에전용뻐스는어느덧해란강상류지역의송월평과라월평, 십리평을 지나 청산촌에 멈춰섰다. 시계를 보니 화룡현성에서 청산리까지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20킬로메터 거리를 반시간 안에 달린 것이다. 그때의 청산리행 도로는 세멘트길이 아닌 모래길이였다. 전용뻐스는청산에잠간멈춰섰다가베개봉밑으로뻗은서쪽산길을들추더니 10분 만에 청산촌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백운평마을 옛터에 이르렀다. 백운평 마을터는 베개봉밑의 좁은 개활지에 놓였는데 개활지바닥으로는 작은 개천에 지나지 않는 맑은 해란강물이 골따라 졸졸 흐르고 북쪽켠엔 북쪽골이라 할만큼한 골이 가로 뻗어있었다. 백운평은 우리 겨례의 반일독립사상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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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평을급급히떠난북로군정서부대는백운평마을에잠간머물렀다가베개봉아래직소(直沼)(직소란 로일령에서 발원한 해란강이 이 계곡사이로 흐르다가 이곳 바위에 이르러 곧추 떨어져 꽤나 큰 소를 이룬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부근에서 밤을 새웠다. 때는마가을이라독립군장병들은저마다오스스한한기에시달려야했다. 적의 대부대를 지척에 두고 모닥불 한무지 피울 수 없었던 것이다. 긴장한격전대기중에시간은더디게만흘렀다. 이때 한시를 곧잘 짓는 사령부 비서 리정이 장병들의 심정을 그대로 한 수의 즉흥 5언률시에 담아 읊었다.
나무잎떨어져 산모습조용한데 하늘은높고 달빛더욱밝구나
장사의마음속엔 만마가달리는데 새아침기다릴제 밤이이리길구나
필자가연변서류보관국에서찾아낸당년청산리력사견증자들의회억자료에의하면새날이밝아오자백운평마을의조선사람들이아침밥, 초신 등을 갖추어가지고 몇킬로메터 떨어진 계곡의 부대주둔지를 찾았고 식사가 끝난 후 어떤 군중들은 돌아 서다가 골안의 웃북골 다리목에서 라남주둔 제19사단 73련대의 400여 명 일제토벌대 놈들과 맞띄웠다고한다. 적들이 어디로 갔다오는가고 물으니 그들은 안도로 갔다온다고했고 독립군을 못 보았는가고하니 모르쇠를 댔단다. 결과 놈들은 시름놓고 골안으로 올라가다가 북로군정서 부대의 매복에 들어 불과 얼마 안 되여 전멸당하고 겨우 마병 셋이 살아달아났다고 백운평마을 사람들이 말했다.(81) 해당자료들도약 400명이 전멸당했다고 전하고있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에 야스가와 (安川)소좌가 인솔한 야마다(山田)련대의 전위부대가 백운평을 지나 얼마 안 되여 북로군정서부대 매복에 들어 거의 반격도 못하고 약 200명이 무리죽음을 당했다. 야마다련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산포 등 중무기를 앞세우고 발악적으로 달려들다가 역시 200~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말았다. 이러고 보면 당년 백운평사람들의 증실이 력사자료와 기본적으로 어울린다. 김좌진의북로군정서군은청산리전역첫전투에서휘황한승리를얻었다. 이것을 흔히 백운평전투라고 한다. 일본침략군은미쳐날뛰였다. 적 후원부대는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 부대가 녹아났다면서 백운평마을에 달려들어 그 분풀이로 이 마을 22~23세대의 녀자들을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로 생긴 건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집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82) 이는당년일본침략군의만행에서살아난백운평마을과그주변마을사람들의진실한증언이다. 이 자료가 지난 80년대 후반 연변주보관서류국에 보관되여 있었다. 그때로부터 71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이 마을 터전에서는 드문드문 백골이 발견된다고한다. 백운평마을옛터에서윳켠을바라보니계곡은점점좁아만졌다. 헌데 전용뻐스가 돌아설 수 없다. 하여 더 나가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들은 점심식사를 하며 청산리전투 이야기로 꽃을 피웠으나 직소를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하는 서운함은 항시 가셔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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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우리일행은전용뻐스로청산, 화룡현성을 다시 거치며50킬로메터를 조여 화룡현 서성진에 이른다음 서쪽 방향으로 다시 10킬로메터 쯤 달려 원 와룡향소재지에 이르렀다. 향소재지 윗쪽의 계남촌에서 서쪽골로 10분 푼히 달리니 천수동이였다. 안내자인 연변박물관의 김철수 부관장은 천수동이 바로 당년 김좌진부대가 일제놈들과 싸운 전적지라고 소개했다. 주위는 온통 산이고 골이 동서로 뻗은 산속에 지금은 림산작업소가 자리잡았다. 력사자료에의하면10월 21일 일본군제19사단 37려단장 아즈마소장이지휘하는일본군은도처에불을지르며두갈래로나뉘어 북왈리구와남왈리구에달려들었다. 홍범도와 안무는 주력부대를천리봉의측면고지에매복시키고예비대를중앙고지에배치하는전술을썼다. 이에 속히운적들은중앙고지를주공방향으로삼고진공하다가크게 얻어맞았다. 왈리구(曰日沟) 전투이다. 같은날 10월 21일 북로군정서부대는 직소부근에서 뒤따른 일제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후 밤을 패가며 30~40킬로메터 밖의 이도구 갑산촌으로 강행군했다. 리범석 등이 지휘한 제2지대가 앞서고 김좌진이 직접 인솔한 제1지대가 뒤따랐다. 갑산촌에 닿으니 이튿날 이른 새벽이였다. 뒤미처 갑산촌에 이른 김좌진은 아즈마지대의 기병중대 40여 명이 천수동마을에 숙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김좌진장군의 명령에 좇아 북로군정서 부대는 다시 10여 킬로메터를 급행군하여 잠간새에 천수동의 적 기병을 거의다 소멸했다. 겨우 기병 네놈이 도주에 성공했을 뿐이다. 사학계에서는 이 전투를 천수동전투라고 일컫는다. 귀로에서우리는야지골어구에서내려이일대옛전적지를둘러본다음어랑촌에이르러발길을멈추였다. 당년 이 일대에서 홍범도장군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이 련일 처절한 전투를 벌렸는데 그중 어랑촌 왈리구전투에서만도 400여 명 적들을 무리로 쓰러눕혔다고한다 이미서술하다시피연변의여러반일무장부대들가운데서제일먼저이동길에오른것은홍범도부대였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후 홍범도장군은 휘하의 독립군부대를 왕청현 대감자에서 연길현 의란구(원 연길시 의란향)로 전이시켰다가 다시 명월구로 옮기였다. 도중에 로투구 쪽에서 간도일본총령사관 경찰서 고등계형사부장 쯔바이가 인솔한 경찰대 20여 명과 조우전을 벌려 대부분을 소멸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당시명월구에는사관학교까지있었다. 허나 홍범도장군은 일제의 대거출병에 대비하여8월 하순에 부대를 백두산쪽으로 이동시켜 9월 20일 경에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부근에 이르게 했다. 아군의 국민회군도 8월 31일에 의란구를 떠나 9월 말경에 이도구지방에 이르렀다. 홍범도장군은 이도구의 한 마을에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한민회 등 독립군부대지휘관회의를 소집하고 련합부대 (총병력 1,000 명 정도)를 뭇는데 성공하였으며 청산리일대의 북로군정서부대와도 련합작전을 토의했다. 한편 이도구일대의 련합부대는 어랑촌에서 매일 군사훈련을 다그쳤다. 일제침략군약 2만 명은 10월 초부터 연변에 대한 대거출병을 개시했는데 아즈마지대의 약 5000명이 이도구와 삼도구일대에 투입되였다. 여러 독립군부대의 총병력은 약 2000명이였다.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장군이 북로군정서 부대를 지휘하여 백운평 직소부근에서 적과 싸울 때 홍범도장군은 독립군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어랑촌 왈리구에서 아즈마소장이 지휘하는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와 격전중에 있었다. 이날아즈마지대의주력부대는도처에불을지르며두갈래로나뉘어북왈리거우와남왈리거우에달려들었다. 이 무렵에 홍범도장군은 적정을 간파하고 이왕과는 달리 주력부대를 측면고지에 매복시키고 예비대를 중앙고지에 배치하는 전술을 썼다. 이에 속히운 적들은 중앙고지를 주공방향으로 삼았는데 전투는 해질 녘까지 계속되였다. 어스름이기승을펴자예비대의독립군용사들은홍범도장군의명령에좇아감쪽같이고지를떠나적의측면에숨어들였다. 아즈마지대의 한개 대는 중앙고지를 점령했으나 우리 예비대의 측면공격과 독립군주력부대의 협공속에 들었다. 북왈리거우로 진격하던 아즈마지대의 다른 일대도 중앙고지의 자기편을 홍범도군으로 오인하고 맹렬한 진공을 들이댔다. 하여 적들은 홍장군의 계교에 빠져 거의 전멸당했는데 그수가 400여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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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랑촌남쪽큰길에나선우리에게는이고장에깃든홍범도장군의전설이떠올랐다. 1920년 10월의 어느날 저녁식사를 마친 장군의 부대는 어랑촌 누이성 마을에서 단잠에 들었다. 새 날을 잡자 장군은 번개치는 예감에 소스라쳐 깨여났다. 《포위되였다. 빨리 산에 오르라!》 장군이버럭소리를지르자전사들은벌떡벌떡일어나산으로치달았다. 허나 후위를 서던 홍장군은 일본군의 겹겹한 포위속에 빠졌다. 이때 손에 작탄을 쥔 장군은 문을 박차면서《나를 잡아라!》고웨치더니오간데없이사라졌다. 그후 적들은 홍범도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장군은대뜸전설속의인물로되였고조선사람들속에서신망이하늘처럼높았다. 어랑촌 전투 때 13살로서 여기 북왈리구에 살았던 김극성로인(1908년생, 연길시에 거주했음)은 홍범도를 하늘이 낸 인물이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홍범도장군을제눈으로보았는데평소일본제〈마상대〉한자루를메고배낭을지고물통하나를차고있었는데병사들이입은옷보다더헐망한옷을입고있었다.》 이어그는그나날의정경을보는듯이그려내면서《홍범도부대가와서약보름후에김좌진부대가오니홍범도부대는자리를내어주고어랑촌동화동으로옮겨갔다.》고했다. 그때어랑촌동화동에서홍범도부대를가까이대했던류덕규로인(1911년생, 연길시에 거주했음)은 1920년 10월 초순에 홍범도장군이 100명 좌우의 부대를 이끌고 동화동으로 왔는데 이 부대전사들은 낮에 초신을 삼기에 여념 없었다고 우리와 터놓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후 불과 며칠 안되여 청산리전투가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던홍범도장군은어랑촌왈리구전투에서적들을여지없이쓰러눕힌다음들미동쪽으로부대를귀신같이움직이다가김좌진의부대가어랑촌부근에서아즈마지대의주력부대와결사전을벌리고있다는급보를받았다. 사실은이러했다. 김좌진부대의 천수동습격은 어랑촌에 총지휘부를 둔 아즈마소장의 본영을 놀래웠다. 이를 예견하고 북로군정서 부대는 천수동 북쪽의 고지에 올랐는데 과연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 수천명이 천수동골짜기를 덮으며 밀려들었다. 김좌진의 제1지대는 유리한 지세에 의지해 적들을 거듭 물리쳤지만 병력과 화력 등의 현저한 차이로 하여 아군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북로군정서 부대는 적들의 수차 진공을 물리쳤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아 아군은 전군복멸의 위험한 처지에 빠지였다. 이때, 결사의각오로싸우던이때 봉밀구방면으로이동하던홍범도련합부대가천병마냥싸움터위측산마루에나타난데서북로군정서군고지로달려들던적들이밑둥부러진나무처럼여기저기나부러졌다. 생사의 시각에 홍범도부대를 맞이한 김좌진부대 장병들은 사기충천하였다. 이것이 전반 청산리전투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치렬한 어랑촌전투였다. 적들은 거듭 패배의 고배만 마시다가 땅거미가 든 후 저들 부대를 어랑촌쪽으로 물러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또 수백명의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북로군정서군은그해 6월과 7월의 통합회의에 등을 돌렸다가 청산리 어랑촌전투에서 전군 복멸을 초래할 뻔 했다.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련합부대가 때맞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실로 청산리전투, 왈리구전투, 어랑촌전투 등 전투를 중심으로 한 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부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부대,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 등 여러 겨레 반일무장부대들이 공동작전의 소산이요, 결과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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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에서성진명암촌부근을지날때우리는명암촌쪽에도잠간눈길을돌리게되였다. 당년 명암촌은 간도국민회 서지방부(西地方部)소재지였는데 한때 홍범도장군이 이 촌에 머물렀었다. 연길시에 거주하고 있는 항일로간부 량환준로인이 그때 11살이였는데 일찍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날저녁홍범도장군이량씨네집퇴마루에걸터앉았다가방문을빠끔이연량환준을보고오라고손짓했다. 어린 량환준이 주춤주춤 나서자 홍장군은 제꺽 들어 무릎에 앉히고는 이름은 무엇이고 공부를 하느냐고 자애롭게 물었다. 이때 어린 또래들이 모여든다고 호위병이 막으니 장군은 다 저애들을 위해 싸운다면서 어린이들을 가까이 앉히고 로투구 영에서 적경찰대를 본때스레 족쳤던 전투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었다. 백운평과어랑촌, 이 일대들은 이렇듯 유서 깊은 력사의 고장이였다. 이 력사의 한복판에는 홍범도장군과 김좌진장군과 안무장군이 서 계시였다. 이들은 여러 독립군부대를 지휘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간에 백운평부근전투, 천수동전투, 왈리구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 차의 전투를 하여 일제침략군 약 1000명 좌우를 섬멸했다. 당년 삼도구지방과 독립군부대 사이의 통신련락을 한 적 있은 황필항로인(연길시에 거주했음)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 백운평 계곡에서 일본군은 저들 장병의 대가리를 세마차나 실어내렸다고 증실했다. 1988년에 88살이었던 리형권로인은 어랑촌싸움 후 일본군은 죽은 군인의 대가리를 떼서 네바퀴 중국마차에 실었는데 이런 마차 세대가 투도구를 경유하여 룡정에 내려갔다고 하였다. 이러고보면 청산리대첩 전반기간에 일제침략군이 독립군부대의 뒤를 물다가 1000명 쯤이 죽어나갔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청산리전적지첫답사후이해 1991년 8월, 우리는 다시 백운평계곡을 찾았다. 청산리 대첩의 첫 전투를 치른 직소를 보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 우리들이였다. 허나 두번째 답사도 헛수고였다. 이미 직소답사를 했던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강룡권선생이 우리의 안내자로 나섰는데 맹랑하게도 그도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1992년 5월 6일, 필자는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답사일행속에 섞이어 세 번째로 청산리전적지 답사길에 올랐다. 이날도 안내자가 없이 좁은 계곡을 소형뻐스로 달린데서 또 헛탕을 치고말았다. 직소는 마치 우리와 숨박꼭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했으나 세번째 답사에서 얻은 수확은 대단했다. 우리는 직소를 찾느라 이 골안치기까지 거의 올라가게 되었는데 이 골안을 손금보듯 환히 헤아릴 수 있었다. 청산리마을부터계곡치기까지장장 20킬로메터 거리인데 백운평마을 옛터 우로부터 이 계곡의 중턱까지는 불과 수십메터 너비의 길고좁은 계곡이였다. 후에 당지의 사람들을 통해 안 바이지만 직소는 바로 이 길고좁은 계곡안에 있었는데 백운평옛터에서 2~3킬로메터 상거한 거리였다. 위치로 말하면 베개봉(해발 1616.6미터)동북쪽 바로 산밑이였다. 직소의 물이 락차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2~3메터 높이의 바위란다. 광복 직후까지 벌목군들이 떼목유송을 하였다는 해란강 최상류이기는 하나 수십년 세월이 흐른 오늘 계곡에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지고 새길이 산비탈로 뻗었으니 달리는 차우에서 직소를 내리 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해내외의여러자료와전문저서들에서싸움터좌우켠에《깎아지른듯한절벽》이솟아있고그사이에백운평이라는공지가있다고했는데이는현지특징과너무나도어울리지않았다. 이 계곡의 20킬로메터 안에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은 그만두고 낮다란 바위산 하나 없다. 있다면 좌우켠에 수림으로 덮친 우중충한 산들 뿐인데 이 계곡사이로 해란강물이 흐르고 산비탈로 울퉁불퉁한 소수레길(지금은 새길이 닦아지고 자동차가 씽씽 달림)이 올리 뻗었다. 당년 북로군정서 부대가 이런 곳에 진을 치고 계곡에 들어선 일제침략군을 내리 족쳤으니 놈들은 날개가 없는 한 솟아날 구멍이 없었다.
김좌진장군
보는바와같이북로군정서는동북각지에서활동한 30여 개 겨레 반일무장단체들 가운데의 주요한 하나로서 북로군정서 사령관인 김좌진장군은 청산리전투와 그후의 여러 전투들을 지휘하며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비록 북로군정서가 한때 여러 반일무장단체들과의 통합을 무시하다가 청산리대첩의 어랑촌 천수동전투에서 하마트면 전군 복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적은 있지만 전체 청산리대첩에 기여한 장군의 력사적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사상과리념의편견, 력사시각의 차이, 참가자들의 자아과대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한국독립운동사나 한국 국내 출판물들에는 흔히 북로군정서 총재이고 최고사령관인 서일장군이 력사의 저편으로 몰리고 서일장군이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으로 초빙한, 장군의 수하 장령 김좌진장군이 마치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이끈듯이 나타나며 청산리전투를 승리에로 이끈 주장으로, 절세의 영웅으로 나타난다. 력사는 외곡되여도 많이 외곡된듯 싶어 깊은 사색과 유감을 남기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상력사는덮어감추지못하거늘서일장군과김좌진장군의대비속에서보면서일장군은북로군정서를조직지도하고광명과승리에로이끈력사의주역이고, 청산리전투를 계획하고 포치하고 또 주요지도자들과 주력부대를 배치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서일장군의 수하 장령인 김좌진장군은 최고사령관인 서일장군의 작전부서에 따르며 청산리전투의 직접 지휘자로 나섰을 따름이다. 그리고 지적해야 함은 전체 청산리대첩은 대소 10여 차의 전투로 이어졌을 때 김좌진장군이 지휘한 청산리전투는 10여 전투의 한 전투였다는 점이다. 다시다시 1910년대 독립운동의 력사속으로 들어가보면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반일독립운동 진영에서 찾아 보기 힘든 문무겸비의 인물로서 1911년에 벌써 북로군정서의 전신인 《중광단(重光團)》을왕청현덕원리에세웠었다. 이 중광단이 1919년 3·1운동직후《대한정의단》으로확대, 개편하고 산하에《대한군정회》를두였다가 1919년 12월에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국무원 제205호》지시에따라북로군정서로력사에등장한다. 그 뒤 서일장군은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좌진 등을 수하에 받아들이고 사관련성소 소장을 위임하며 북로군정서 사령관으로 활동하도록 한다. 김좌진장군(1889~1930)은 자는 정원, 호는 백야(白冶)로서 1889년 11월 24일, 충청북도 홍성군 고도면 갈산리 량반가정 출신이다. 선친 김형규는 30여 명의 머슴을 두고 2000여 헥타르 땅을 가진 갈산리의 갑부로 헤아려진다. 그런 부친 슬하에서 김좌진은 5살 때 벌써 서당에서 공부하고《삼국연의》,《손자병법》, 《육도삼략》 등책들과병서까지읽으며래일의위인으로자라났다. 장군의 위인됨을 이 세상이 잘 알기에 따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15살 때 벌써 30여 명의 가노(家奴)들을 전부 해방시키고 곡식 2000여 석을 지을 수 있는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여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우고 1906년에 80여간 집을 내서《호명학교》를꾸리고교장으로나서빈부귀천없이학생을받아들였다는것은그지없이존경심을자아낸다. 김좌진은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대한협회 골간으로, 서울무관학교의 입학생으로, 리동휘가 이끄는 서북학회의 주동자로, 오성학교의 교감으로 뛰였다. 1913년에는 대한광복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저 나라 안을 누비다가 1915년에 체포되여 3년 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던김좌진장군은 1917년 11월에 조국을 떠나 중국 동북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길림에서 대종교에 가입하고 려준, 조소앙 등과 함께《대한독립의군부》를조직, 1918년 11월에는 김교헌, 서일 등 39인과 더불어《무오독립선언》을발표하고혈전독립의무장투쟁기치를드니그위상이돋보이기만한다. 1919년 8월, 김좌진장군은 남만을 떠나 왕청행에 올랐다. 장군은 왕청땅에서 서일장군이 조직한 대한정의단에 가입하고 서일장군에 의해 대한정의단 산하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초빙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픈 것은 김좌진장군은 남만에서 왔고 서일장군의 초빙을 받아 대한군정회에 나섰고 사관련성소 소장으로 임명되였다는 점이다. 그 뒤의 북로군정서도 총재가 서일장군이고 김좌진은 그 수하의 한 장령으로 활동하게 되였다. 김좌진장군은사관련성소소장직무를충실히리행했다. 사관련성소는 선후로 400여 명의 학생을 받아들이고 1920년 9월 9일에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여 북로군정서의 무장력량건설에 큰 힘을 보태였다. 이들이 그해 10월에 있은 유명한 청산리전투에서 중추적 역할을 놀았다고 하니 김좌진장군의 군사적 재질을 너무나 잘 헤아릴 수 있다. 하기에 서일장군은 이에 앞서 김좌진장군을 사관련성소 소장 겸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또짚고넘어갈것이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도 김좌진장군이 조직자, 결책자로 되여 사령관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총재이고 최고사령관인 서일장군이 산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1선에서 군사를 통솔하게 한 력사사실이다. 김좌진장군의 앞에는 총재 서일과 부총재 현천묵 등 지도자들과 군사지휘관들이 여럿이 있었다. 이쯤하면서일장군과김좌진장군과의관계를리해할수있으리라믿어진다. 한 마디로 개괄하면 북로군정서의 최고사령관은 총재 서일장군이였고 김좌진장군은 그 수하의 한 충실한 장령이였다.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총재일뿐만 아니라 최고사령관이고 동북 반일무장투쟁의 저명한 지도자의 한분으로서 말 그대로 당시 독립무장투쟁진영에서《찾아보기 힘든 문무겸비의 인물》이였다. 1920년 10월 유명한 청산리대첩에서의 청산리전투도 서일장군의 전이방침과 전략부서에 따라 진행한 전투였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다. 이제 뒤에서 펼쳐지는 청산리전투 후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독립무장단체의 3,500여 명 대오가 북만의 밀산에 모여 대회합을 이루고《대한독립군단》을결성하였을때그총재도서일장군이였다.
양림군사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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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사관련성소에는김좌진장군과더불어신흥무관학교출신인군사교관양림(1901~1936)이 활동하고있었다. 그는 훗날의 운남강무당 출신,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중국 홍군장령으로서 선후로 중국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 제3영 영장,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 중화쏘베트 로전(劳战)위원회참모장, 강서군구 회창, 심오, 안원 군분구 사령원, 홍군 제23군 군장, 홍군 제1방면군 1군단 참모장, 홍군장정 시기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 홍군 제15군단 제75사 참모장을 맡은 장군으로 활동한 위인이다. (83) 지금까지 모든 자료들을 연구하면 양림의 본명은 김훈이고 자는 지원(志远)으로 알려진다. 때에 따라 필명도 많아 양림(杨林), 양주평(杨洲平), 양녕(杨宁),필사제(毕士弟) 등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출생지는 평안북도라고만 쓰이고 그 이상 상세한 주소가 나타나지 않고있다. 양림의 동년시절, 동년시절의 조국은 풍전등화의 운명이였다. 1905년에는 일제에 의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강행되더니 1910년에는 삼천리 아름다운 조국강산이 일본침략자들의 철제아래 짓밟혔다. 망국의 비운이 온 나라에 차고넘치였다. 이해 양림은 야무지게 생긴 10살의 애티나는 소년이였다. 이 소년이 세월의 흐름속에서 19살의 어엿한 젊은이로 자라났다. 이해 1919년 3월 1일, 온 나라, 온 세계를 들썽한 3·1운동—반일애국운동이 일제히 터져올랐다. 그때의 양림은 그젯날의 애어린 소년이 아니였다. 그는 평양에서 중학교공부를 하며 평양학생운동의 기수로 활동하면서 위대한 애국운동에뛰여든다. 3·1운동가운데서 양림은 평양녀학생들가운데서 중견인물인 리추악(李秋岳)을 알게 되고서로 사랑하게 되고 영원한 반려를 언약했다. 3·1운동후 일제놈들의 탄압이 뒤따랐다. 그 서슬에 반일지사로 활동하며 평양에서 3·1운동에 뛰어들었던 아버지도 희생을 면치 못했다. 국내에서 배기기 어려운 양림은 이해 1919년 가을에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행에 올라야 했고 중국 남만의 통화현 하니하(哈泥河)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하니하에는 조선인반일단체에서 꾸린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는데 양림은 이 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공부에 몰두하였다. 이듬해 5월, 양림은 우수한 성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럴 때 중국동북군벌과일제놈들이 남만의 조선인반일무장단체에 대해 무차별탄압을 개시한데서 8월에 반일무장부대는 동북쪽 액목현일대로 전이하고 양림 등 한패는 왕청현 십리평으로 가서 서일이 지도하는 그곳의 북로군정서와 합세하였다. 북로군정서서일총재는젊음과패기로넘치는양림을 군정서산하 사관련성소 군사교관으로 배치하였다. 1920년 9월이후 연변경내의 여러 독립군부대들은 분분히 원 근거지들을 떠나 동쪽으로, 서쪽으로 전이길에 올랐다. 북로군정서도 크게 두개 패로 나뉘어 9월 17일과 18일에 근거지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서일장군이 한패를 거느리고 동으로 움직이고 서일장군의 명령을 받은 북로군정서부대는 10월 12일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일대로 이동하였다. 드디어 10월 21일 오전에 북로군정서부대는 청산리 백운평일대 직소부근에서 청산리대첩에서의 첫 승리—청산리전투(일명 백운평전투)를 멋지게 치렀다. 양림은 한개 중대를 거느리고 용감히 싸우며 나젊은 지휘관의 군사재능을 그대로 보여주어 김좌진, 리범석 등 장령들의 칭찬을 받았다 10월 22일 새벽에 북로군정서부대는 감쪽같이 북쪽의 어랑촌 갑산촌으로 전이하였다. 부대는 이곳에서 아침밥을 지어먹고 아침 5시경에 천수동의 적 기병 한개 소대를 섬멸한 뒤 어랑촌 서쪽 야계골부근에서 아침 7시부터 일본침략군 아즈마지대 주력부대와 혈전을 벌리였다. 양림도 소속부대를 지휘하여 피어린전투에 뛰여들었다. 북로군정서부대는 적들의 수차 진공을 물리쳤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아 아군은 전군복멸의 위험한 처지에 빠지였다. 양림 등이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사태를 돌려세울수 없었다. 이때 봉밀구방면으로 이동하던 홍범도련합부대가 천병마냥 야계골에 나타나 적들을 족치였다. 이것이 전반 청산리대첩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치렬한 어랑촌전투였다. 적토벌대는 합계 1000명가량으로서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전투가 자못 치렬하였다. 허나북로군정서부대와홍범도부대가 힘을 합친데서 북로군정서부대는 사경에서 헤여났고 또같이수백명의 적들을 소멸한 전과를 올리였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간에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련합부대와 김좌진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부대는 선후로 백운평부근전투, 천수동전투, 왈리구(曰日沟)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벌리여일제침략군 1000명가량을섬멸하는자랑찬전과를올리였다. 이렇듯 대첩으로 불리는 청산리전투에서 청년양림은 침착하고 용감히 잘싸워 소문 놓았다. 그는정녕서일장군의수하한장교로되기에손색이없었다. 서일장군은 장래가 촉망되는 양림을 잘못 보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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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이후북로군정서와대한독립군, 국민회군 등 여러독립군부대들은밀산을거쳐로씨야경내로전이하였다. 북로군정서 부대를 보면 처음에는 소부대로 분산하여 행군하다가 1920년 10월 28일 경에 안도현 황구령촌(黃口嶺村) 부근에이르고여기에서다른독립군부대들과함께군사통일문제를두고원칙적합의를하게된다. 11월 초순에는 황구령촌을 다시 떠나 왕청현 춘양향(春陽鄕) 북삼차구와왕청현신선동등지를거치며밀산현쪽으로움직인다. 그럴 때 양림은 소속 북로군정서 부대를 떠나 상해행에 오르게 되였다. 보여지는자료들은양림이진리를찾아동북을떠나상해로갔다고말하지만어느때어떻게상해로갔는가는말하지못하고있다. 그저 1920년 말이라고 두리뭉실 에때울 뿐이다. 진실한 력사를 밝히면 양림은 자기 소속 북로군정서부대가 밀산으로, 로씨야로 움직일 때 그만이 진리를 찾아 상해행에 오른것이 아니였다. 한국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12권 (국가보훈처, 1996년) 등 문헌자료에 따르면 《진리를 찾아 상해》설과완전히다르다. 양림은 북로군정서부대의 명령으로 청산리전투상황을 상해림시정부에 보고하기 위하여 파견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연히 서일총재의 파견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대한민국독립유공자공훈록》 제12권 등 문헌자료를 보면 양림은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후 청산리전투 상황을 상해림시정부에 보고하기 위하여 상해로 파견된다. 독립운동가 윤기섭이 동행한다. 윤기섭은 누구일까? 윤기섭 관련자료를 헤아리면 윤기섭(尹琦燮, 1887—1959)은 경기도 출신이며보성중학교출신의독립운동가이다. 일찍 중국 동북으로 건너와 1911년에 벌써 우당 리회영 일가를 비롯한 독립운동동지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맡았다. (후에는 상해림시정부 국무원 및 군무장, 의정원 의장을 력임하며 40여년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던그는남만의신흥무관학교가아닌동만의왕청땅북로군정서로활동무대를옮기게된다. 신민회출신들이자남만의신흥무관학교출신들인김좌진등한패의사람들을초빙하여대한군정회를맡아보도록한서일총재의강력한조치였다. 이는 독립군부대를 편성하려는 서일의 속깊은 전략적 결단이였는데 윤기섭은 김좌진 등과 같이 초빙된 주요 성원의 하나였다. 북로군정서에서의윤기섭의등장이다. 이런 윤기섭이 양림과 동행한 상해행이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후라고 하니 1920년 말이라고 하는 설이 비슷한것 같다. 상해에 가서 상해림시정부를 찾은 양림은 청산리전투 과정을 그대로 보고드린다. 양림은 또 《독립신문》에《북로아군실전기—김훈씨담》(北路我军实战记—金勳氏谈)을련재하면서청산리전역을온세상에널리알리였다. 《독립신문》은 1919년 4월 상해에서 탄생한 상해림시정부에서 1919년 8월 21일에 창간한 신문으로서 제 21호까지 《독립》이라는제호로내다가 1919년 10월 25일자 제22호부터 《독립신문》으로개칭되였다. 필자는아직《독립신문》에련재되였다는양림의《북로아군실전기—김훈씨담》 전체를보지못한유감을안고있지만《북로아군실전기》(2)에는 이런 한단락 글이 반영되여 있다.
북로군정서독립군을위시한여러독립군부대가우세한적군을맞이하여싸우는중에는식량의부족으로인한곤란이막심하였다. 산중에 교통은 불편하고 거주민은 많지 않으며 더구나 전투가 밤낮으로 계속되니 식량을 이을 길이 없였다. 그 중에도 북로군정서 군은 3일간 계속 되는 격전에 기한과 피로가 격심하였기 때문에, 시간이 있으면 칼로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혹은 솔잎을 따먹어 허기를 줄이며, 심지어는 배낭 속에 든 황초를 나누어 먹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 당시 장병들의 고생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였다.
이는일제놈들과의싸움이아닌식량의부족으로인한청산리대첩그때현실을그대로보여주어실감이난다. 청산리전투 참가자가 아니면 써낼 수 없는 글을 양림은 상해에서 《독립신문》에생생히련재하여후세의청산리전투연구에큰도움을주고있다. 이날의 《북로아군실전기》(2)가 1921년 3월 12일부 《독립신문》실린것으로보아양림의련재글은 1921년 3월 12일 전후로 보인다. 청산리전투보고는이에만그치지않는다. 《대한민국독립유공자공훈록》제12권 관련자료에 따르면 양림은 1921년 2월 20일 상해의 조선인 인성학교(仁成学校)에서마련한환영회에참석하여청산리전투때독립군부대들의싸움과정을그대로알리면서청산리전투후의주동적퇴각은일제놈들이무서워서가아니라무기와인원이부족하여퇴각한것임을밝히기도하였다. 양림의상해림시정부보고, 독립신문 련재글, 상해 인성학교 특강 등을 통하여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소식은 신속히 중외에 널리 전해졌다. 이는 서일총재의 상해파견으로 인한 성과물인바 서일총재의 명지한 선택과 위인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백운평대참안?
최근년간에중국조선족사회우리글신문과잡지들에는흘러간우리력사를두고틀리게과대서술하는일들이수차나타나기분을흐리우고있다. 력사를 모르면 응당 그러려니 하겠지만 알고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아래청산리전투를취급한두편의인용문을보기로하자.
—백운평전투 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다.
—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0, 60세대가 살고있었다고한다. 한세대당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참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 명 된다. 오붓한 조선족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사이에 이 세상에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 뿐만아니라 그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
청산리백운평참안을다룬두편글의관련인용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과대서술. 웬간한 참안이면 스치고 지날 수도 있지만 우리 겨레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획을 그을 청산리대첩의 백운평 주요 전적지이니 단순히 스쳐 지날 수가 없다. 백운평은 우리 겨레의 반일투쟁사상 잊을 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그럼어찌하여백운평대참안은놀라운과대서술이라고하는가? 이는 당년 력사의 진실을 펼쳐보이면 스스로 풀리는 문제이다. 당년오늘의화룡시소재지—삼도구, 즉 충신장(忠信場)에서 청산리 백운평까지는 27~28킬로메터 거리였다. 이 50여 리 구간은 충신장과 지금의 송하평 사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십리 골짜기였다. 이 골짜기에는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평양평(즉 청산촌), 백운평 등 조선이주민들 마을이 있었고 백운평 동북쪽에 베거우 (北沟)와쟈피거우등조선인마을이있었다. 그중 평양평은 조선의 평양이주민들이 이주한 고장이여서 평양평이라고 불리였는데 1984년에 출판된《화룡현지명지》에의하면평양평이청산리로이름을바꾼것은 1932년이라고 한다. 백운평은 평양평(청산촌)에서 서쪽으로 7~8킬로메터 떨어진 산간마을이였다. 백운평마을의형편과청산리전투때의형편은연변주보관서류국(당안관)의 원 혁명력사자료—3061에 잘 반영되였다. 이 3061에 반영된 자료는 당년 1920년 10월 백운평참안을 겪은 이 마을의 력사의 견증자들이 직접 구술한 자료들인데 이 자료들에 의하면 당년 백운평마을의 인가는 50~60호가 아니라 22~23호에 불과했다. 이해 10월 일본침략군은 청산리 백운평 직소 부근에서 북로군정서 주력부대에 의해 졸딱 망했다. 적 후원부대는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 부대가 녹아났다면서 백운평마을에 달려들어 그 분풀이로 이 마을 22~23호의 녀자들을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로 생긴 건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집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력사의진실이바로이러하다. 온 마을 남녀로소가 아니라 남자들만 말이다. 집안에서 뛰쳐나오는 남자들에 대해 적들은 총창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기관총을 내둘렀다. 허나 남자들이라 하여 모두가 죽은 것이 아니였다. 김응준이라는 어린이와 이 마을의 민간의사 리희보 및 그의 셋째 아들 셋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는어찌된일이냐? 백운평 사람들의 증실자료에 따르면 김응준어린이의 집은 마을 뒤켠의 외딴집이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가슴으로 원쑤의 총창을 막아나서며 시간을 지연시켰기에 김응준은 달아나 나무밭에 몸을 숨을 수 있었다. 리희보는 북쪽의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기에 살았으며 6살난 그의 아들은 리희보의 안해가 재빠르게 녀자옷을 입힌데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84) 그외남자라는건전부가불속에꺼꾸러졌다. 백운평마을이 22~23호이니 불속에 거꾸러진 남자들이 수십명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당년일본침략군의만행에서살아난백운평마을과그주변마을사람들의진실한증언이다. 이 자료가 지금 연변주보관서류국에 보관되여 있다. 하기에 필자는 백운평의 당시 인가를 50~60호로, 한호당 5명으로, 전체 살해를 300여 명으로 지적한 것이 틀린다고말한다. 모르고 그럴 수도 있다지만 모르면 자기 나름대로 추측으로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학자의 준칙 아닌 준칙이건만 때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남자셋에녀자들이살아남은것은백운평의당시현실이다. 그리고 백운평일대와 청산리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는 것은 모르는 소리이다. 지금까지 백운평을 제외한 마을들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송월평 등지 군중들의 증실자료에도 이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다. 백운평의 민간의사 리희보가 북쪽의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다가 살게 되였다는 것도,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등 마을의 군중들이 청산리전투와 경신년대토벌을 증실한 자료를 보아도 이런 마을들이 일본놈들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좋은 근거로 된다. 지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사이 필자가 연변력사연구소의 한 연구과제로 연변의 경신년대토벌 주요 참안지들을 현지 답사하며 현지 조사한데 의하면, 조사한 범위 내에서 보면 일본군들이 만나는 조선사람 마을들마다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는 것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적들은 조선사람 마을에 들어갈 때마다 사전에 수집한 정보명단에 따라 반일에 나선 사람들을 붙잡아서는 마을의 남자들과 함께 흔히는 사립학교나 교회당 같은 곳에 밀어넣고 불을 질렀다. 청산리 백운평 마을도 그러하다. 이것이력사이며이것이경신년대토벌현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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