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평전11 제11편 무력항쟁의 길제11편 무력항쟁의 길
철혈광복단 래력
말그대로철혈광복단의 15만원 탈취거사는 서일장군한테나 누구에게나 소중한 경험이고 거울이였다. 이들 철혈광복단이 서일의 북로군정서에 속한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언젠가 15만원 탈취거사의 한 인물인 한상호(韓相浩)가 서일을 찾아와 룡정의 은행을 털겠노라고 했다는 것도 그러하고 그들이 자진하여 철혈광복단이란 이 극비밀의 조직을 북로군정서 소속으로 받아달라고 자청을 했다는것도 그러하다. 1910년대 중기 독립무장투쟁에서 획기적인 사변의 하나는 왕청현 라자구무관학교와 더불어 철혈광복단의 탄생으로 꼽을수 있다. 철혈광복단은 1915년 전후에 북간도와 로씨야 연해주 반일열혈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조직이다 (61) 말그대로비밀결사조직인데서이조직의상세한내막은잘알려지지않으나리동휘와그의기독교계동지들에의해조직되고움직여졌다. 철혈광복단은 리동휘 등에 의해 미국, 상해, 천진, 북경, 서울, 평양 등 각지의 반일지사들도 망라되였다(62)고하는데필자는아직이에대한연구자료가따르지못하고있다. 믿음직한 것은 1920년 1월, 15만원 탈취사건참가자인 최봉설의 회상이다. 최봉설의회상에따르면철혈광복단은 1914년 라자구사관학교출신인 남공선, 김립, 장기영, 김하석, 오영선 등이 중심이 되여 윤준희, 림국정, 최봉설 등 수십 명 열혈청년들로 조직된 비밀결사단체(63)라고 한다. 최봉설 등이 철혈광복단에 참가한 것은 1914년 8월 10일로서 무명지를 깨물어 《철혈광복단 맹세》란혈서를썼다(64)고알려진다. 해당자료를 보면 1919년 3.13운동에서 희생된 박문호나 채창헌, 최익선도 라자구사관학교시절에 최봉설과 같이 벌써 철혈광복단 성원이였다. 최봉설은 또 《박문호는 창동학원의 교원이였는데 1915년에 남공선교원과 함께 림국정, 최봉설, 최익선 등을 데리고 라자구사관학교에 갔다가 림국정, 남공선과 함께 로령에 들어간 후 다시 돌아와서 서고성자에서 소학교교원을 담임하고 반일운동을 하였》다고 회상(65)하였다. 최근년간에필자는우연한기회에철혈광복단의주성원인채창헌의유가족채경숙녀사를찾게되고취재하는가운데서채창헌의가족내력을다소헤아려보았다. 채창헌은 오늘의 화룡시 동성진 흥진촌 사람이다. 1910년대는 연길현 수신향 오도구 흥연촌으로 통했다. 채창헌의 출생시간을 알 수가 없지만 채경숙녀사가 구술한데 의하면 채창헌은 오두구 흥영촌 출생으로 알려진다. 채경숙녀사는 2004년 76살로서 1929년 생인데 녀사의 친할아버지 채창묵은 채창헌의 맏형이였다. 채창묵은 오두구에서 서당훈장으로 있었고 아래 채인묵, 채창호, 채창헌, 세 동생을 두였다. 즉 4형제였는데 채창헌은 형제중 막내로서 장가도 못 간 총각이였다. 생전에 오도구 사립경애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확실히 왕청현 라자구사관학교시절에 철혈광복단에 가입했었다. 철혈창복단은 1919년 룡정 3.13운동을 앞두고 크게 확충되였다. 이해 2월 18일 밤, 조선독립의사회의 사회하에 국자가 박동원의 집에서 3.13운동의 희생을 예견하고 혈서를 쓰고 철혈광복단 가입의식을 가지였는데 이날 밤 혈서를 쓰고 새로 철혈광복단에 가입한 이들로는 아래와 같다.
국자가지방: 리홍준, 리성근, 박동원, 김영학 룡정지방: 김정 개산툰지방: 백유정 팔도구지방: 류례군 평강구지방: 고동환
이밖에도일찍부터반일운동에나섰던김순문, 강룡헌, 구춘선, 리성호, 고평, 최봉렬, 박정훈, 리동식 등도 철혈광복단에 대거 가입(66)하였다. 철혈광복단의 주체는 기독교출신으로서 리동휘계의 사람들이였다. 서일도이를잘알고있었다. 그런 서일은 15만원 탈취거사의 성공과 실패를 환히 꿰뚫으며 무기구입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 전력을 다하였다.
군자금모금
그시절연변지구내여러반일무장단체들의군자금모금은흔히자기관할구역내조선이주민들로부터생활정도에따라토지를일정소유한부농에대해서는 100~3000원 정도로 내도록 하고 일반 농민들에 대해서는 곡식 2말, 짚신 2컬레씩 내도록 하였다.(67) 부유한유지인사나병원, 상점, 려관들에서도 군자금을 받아 들이였다. 그중간도국민회를보면함경도사람들이주체인데서함경도의명천, 무산, 회령, 종성, 함흥 등지에도 모금대를 보내어 군자금을 모금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되는대로 도처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군자금을 받아 들이며 민중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를 여러 반일무장단체들에도 통보하면서 다른 단체의 세력범위 내에까지 들어가 모금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들의 취지는 자기 소속 민중을 널리 발동하는데 있었다. 간도국민회는그뿌리와발전과정을보면 1910년3월에 설립된 간도교육회와 1913년 4월의 설립된 간민회에까지 거스를 수 있지만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 과정에 나타난 조선독립운동의사부를 거쳐 간도국민회로 정식 개편된 것은 1919년 3월 21~31일 경이다. 간도국민회는 총앙총부와 5개 지방총회로 이루어졌는데 그 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중앙총부: 회 장: 구춘선 부회장: 강구우(초기), 서상용(후기) 총 무: 김규찬 비 서: 최자익 재무부장: 유찬희 서무부장: 김승국 편집부장: 리 완 사법부장: 최익룡 군사부장: 한중근 통신부장: 김병흡 통신부원: 정기선, 황일보
중앙총부소재지는처음에구춘선이활동하고있는연길현하마탕에설치하였다가후에연길현의란구구룡평으로지대를옮기였다.
중앙총부산하 5개 지방총회:
중부총회: 중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국자가 서구(西沟)에 두고 산하에 2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중부 지방회는 연길현 팔도구, 태양, 조양천 일대를 관할하고, 제2중부 지방회는 연길현 국자가 지방을 관할하였다. 동부총회: 동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지인향 화련리에 두었다가 연길현 용지향 화전자로 옮기고 산하에 2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동부 지방회는 왕청현 량수천자(지금은 훈춘을 거쳐 도문시에 귀속) 일대를 관할하고, 제2동부 지방회는 용지향 화전자 일대를 관할하였다. 남부총회: 남부총회는 소재지를 화룡현 지신향 명동에 두고 산하에 2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남부 지방회는 룡정과 회령 대안 일대를 관할하고, 제2남부 지방회는 화룡현 이도구, 삼도구, 무산 대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서부총회: 서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숭례향 명월구에 두고 1~2지방회를 나누지 않았다. 대신 돈화현 관내의 국민회 지회가 서부총회에 소속되였다. 또 초기에는 제1남부 지방회를 서부지방회로 부르다가 후에 남부 지방총회에 넘기였다. 북부총회: 북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춘화향 합수평 이대방자 (지금은 왕청현에 소속)에 두고 산하에 2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북부 지방회는 연길현 춘화향 일대(지금은 왕청현에 소속)를 관할하고, 제2북부 지방회은 연길현 춘양향 일대(지금은 왕쳥현에 소속)를 관할하였다. 이상간도국민회중앙총부와 5개 지방총회 개략적인 소개이다. 국민회는 각 지방회 산하에 80여 개의 총지회(지방지회)를 두었는데 가장 많을 때는 총지회가 무려 133개를 이루었다. 세력범위를 보면 남으로는 화룡현 남부의 두만강변 덕화, 숭선 일대에 이르고 북으로는 왕청현 라자구, 동으로는 량수, 서로는 명월구, 돈화 일대에 이르렀다. 민중발동으로 보면 명실공히 연변지구에서 가장 큰 항일단체이고 조직취지는 항일무장투쟁이였다. 또, 청일색의 기독교 계렬로 이루어졌으며 활동시 모두가 기독교 명의를 띠였다.(68) 그러나모두가대종교계렬로이루어진북로군정서와산하조직체계는간도국민회와판판달랐다. 이들도 연변지구 내 대종교도들을 반일에로 부르며 민중계몽을 드세게 틀어쥐었지만 간도국민회와 같은 민중 조직체계를 가지지 않았다. 군자금 모금도 간도국민회와 달리 주로 모금대를 통한 군자금 모금방법을 취하였다. 북로군정서의모금대를두고현임연변력사학회회장이고연변대학교수, 박사인 김춘선선생은 자기의 한편의 론문《15만원 탈취사건 연구》에서여러관련자료들에따라이렇게밝히였다.
북로군정서의모금대는도합 8개 대로 구성되였는데 각 대는 대장 1명, 대원 12명으로 조직되였다. 모금대는 친일지주와 조선상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는 외 룡정촌의 상부지, 왕청현의 상부지 및 기타 상부지의 재산가들에게도 군자금을 재산의 소유정도에 따라 출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국내인 충청도 지역에도 모금대를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69)
김춘선교수의연구가이러하다면왕청현의리만섭로인도《북로군정서는모연금을받았는데조선에가서도자주모금하였다.》고필자와말하였다. 이같이연변지구여러반일무장단체들의군자금모금활동은비교적활발하게벌어졌는바 1920년 8월의 관련 통계에 따르면 여러 단체들에서 모금한 총액은 대략 50만 원 (훈춘한민회는 제외)에 달한다. 그중 간도국민회가 17만 원, 북로군정서가 13만 원, 최명록의 도독부가 6만 원, 홍범도의 의군단이 7만 원, 신민단이 3만 원, 광복단이 4만 원으로 나타난다. 《한국민족운동사료》(70)에서는《북로군정서는 1920년 초에 이미 20여만 원의 군자금을 확보하였다》고 서술하고있다.
연해주드나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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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은군자금모금과더불어병력확대, 무기 장만, 군사골간 양성이란 세가지 과업을 내세우고 재무 계화와 함께 소속 무기운반대를 거느리고1920년 6월과 7월, 9월 사이에도 수차 로씨야 연해주를 드나들며 무기를 많이 구입해 들이였다. 1920년 6월에만도 총재 서일장군과 계화가 이끄는 무장경비대가 무기운반대 200여 명을 무장보호하면서 구입한 무기를 운반하였다. 그럼 로씨야 연해주 어디에서, 누구한테서 무기를 사들였을까? 이를 알자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부대의 신문—덴니크부터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이들의 무기구입 경로와 무기운반대의 실정을 알아 보기로 하자. 북로군정서무기구입은주로연해주에서사들이였는데그운반경로는대략세갈래로알려진다. 첫 번째 경로는 우쑤리연선방면으로부터 왕청현 오지지역으로 들어오는 길이였다. 철로의 니꼬리스크를 경유하거나 또는 하수빠수카야 류정구역(柳亭口驛)방면으로부터 륙로국경역인 포구라니수야부근으로 나와서 국경을 넘어 둔전영통로(屯田營通路) 또는 삼차구(三岔口)를 경유하여 대오사구로(大烏蛇溝路)로 나와서 수분하원(綏芬河源)으로 거슬러올라가 왕청현오지 라자구(羅子溝)지방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두 번째 경로는 추풍(秋風)방면으로부터 왕청현오지방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울라지보스또크또는 니꼬리스크 지방 및 추풍(秋風)방면으로부터 왕청현오지 방면으로 반입하는 길인데 동녕현의 국경 호포도하연선(胡布圖河沿線) 또는 삼차구(三岔口)로부터 국경을 넘어서는 대오사구로(大烏蛇溝路)로부터 물길을 따라 로흑산(老黑山)으로 나와 치알거띵즈(72介頂子), 라자구, 화소포를 경유하여 훈춘현 대황구 또는 왕청현 춘명향 대파구방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남부 연해주로부터 훈춘현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훈춘현 국경방면으로부터 반입하는 길은 주로 홍무하상류(紅無河上流)지방의 삼림지대 또는 하마탕방면으로부터 교묘히 국경감시를 피해서 훈춘오지방면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이런 세갈래 길들을 보면 전에는 다가 아편을 비롯한 밀수상들이 다녀서 생긴것이였는데 지금은 독립군들이 무기를 비밀리에 사서 운반하는 통로로 변해 버리였다. 왕청 십리평 군영에서 목적지에 이르는데 3일이 걸리는 로정이였다. 이때의 연해주형세를 보면 일부지방에는 아직도 백계(白系)의 로씨야인이 있고 일본군이 출병한데다 토비마저 출몰하니 치안이 극도로 혼란했다. 이런 속에서 서일을 비롯한 계화, 조성환 등 그 몇사람이 먼저 떠나가 일을 성사시켜 놓는족족 알리면 이쪽에서 경비대장 리교성이 운반대를 호위하여 체코식의 신식무기들을 하나도 허실이 없이 운반하기에 바빴다. 북로군정서의 무기운반은 기쁜 일이기도 했거니와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간고한 고역이기도 했다. 운반대의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더구나 농번기여서 일손이 매우 딸릴 때였다. 동원된 농민들은 1주일이면 무기운반이 끝나리라 여겼는데 아니였다. 시일이 썩 많이 걸렸다. 그러니 농사일이 문제였다. 무기구입이 생각과 같이 제꺽제꺽 되는것이 아니였다. 동원된 무기운반대의 농민과 경비대가 한달동안이나 로씨야의 동포마을에서 가래나무껍질을 벗겨 신이나 삶으면서 무료히 기다리는 때도 있었다. 그 마을의 동포호수가 다해봤자 30호에 불과했는데 무기운반에 나선 사람은 무려 230명이나 되였다. 그러니 한집에 무기운반대원이 각각 7,8명씩 분산분배시켜서 수용하게 하였으니 쉬운 일이 아니였다. 《밥 한그릇으로 그집 온 가족과 무기운반에 동원된(한집에 약 7명)인원이 밥 한숫갈씩 먹고 지내려 하니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배가 고파서 6월에 새알만한 감자마저 캐먹었다.》 훗날 나온 한 회고록의 글이다. 로씨야의 동포마을에서 대기하는 동안 식량문제도 문제려니와 언제있을지 모를 일본군이나 토비의 습격으로부터 무기운반에 동원된 농민들을 보호해야 했기에 경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어느날인가는 경비병이 곰이 나타난줄로 알고 총을 갈긴것이 제 동료의 총개머리를 맞혔다. 온 촌민이 총소리에 놀라 소란을 피웠고 한번은 또 낮모를 녀인이 나타나니 그녀를 간첩으로 의심하여 무기운반시까지 억류한적도 있었다. 그같이 극도로 긴장한 나날이였다. 무기와 탄환을 인수하여 힘껏 지고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군병참을 싸움없이 통과한 적도 있고 비가 억수로 퍼부어 게곡에 물이 많이 흐르니 계속 정상으로 국경선을 넘어야 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일본병참과 5리가량 상거한 10여호 되는 동포마을에 이르러서는 모두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잠든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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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에서로씨야연해주로이어진북로군정서무기구입경로와무기운반대의실정이다. 다음은 누구한테서 사들였는가하는 문제이다. 이를 알기 위하여 한국의 《주간조선》 2011년 최근2094호에 게재된 발굴특종 기사 《청산리전투에 쓰인 체코 무기》를헤아리기로한다. 북로군정서의 체코무기구입을 알리는 이 기사에 따르면 체코 망명부대 신문인 덴니크는 1919년 3월 13일자 신문, 1919년 3월 18일자 제 331호, 1919년 3월 28일자 제 340호, 1919년 5월 13일 제 377호 신문을 같은 지점이 아닌 로씨야 극동지역의 옴스크와 노보니콜라예브스크, 이르쿠츠크에서 인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시절오스트리아제국의식민지로허덕이던체코슬로바키아망명부대(1916년 로씨야에서 창설된 군부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랄리아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하다가 제정 로씨야군대에 소속되여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싸우고있었다. 그러던 이 체코슬로바키아 망명부대(약 6만명 규모)는 1917년 볼쉐비크의 10월혁명의 승리로 제정 로씨야가 급속히 붕괴되면서 말그대로 졸지에 《무소속부대》로전락되고만다. 이어 이들 망명부대는 미국에 본부를 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가 프랑스 측과 협의하면서 프랑스군에 소속되여 프랑스 전선으로 이동중 귀국길을 거리상 가까운 서쪽이 아닌 머나먼 씨베리아를 거치는 울라지보스또크행을 선택하게 되고, 울라지보스또크행에서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랄리아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최종목적지가 원래의 프랑스 전선이 아닌 체코민주공화국으로 바뀌우게 되였다. 기구한 운명의 망명부대, 이들 망명부대가 1919년 3월과 5월에 로씨야 극동지구에 모습을 보이고, 덴니크 신문을 이동중에도 계속 인쇄발행함을 보이니 중국 연변에서 활동하던 북로군정서부대와도 무기매매로 이어지게 된다. 1917년 로씨야 볼쉐비크의 10월혁명의 승리로 로씨야 극동지역이 점차 쏘베트 정권의 장악하에 놓이지만 체코슬로바키아 망명부대는 1918년 4월부터 1920년 여름사이 비교적 순조로이 울라지보스또크에 이르게 되고, 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게 된다. 그럴 때 로씨야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북로군정서 무기구입대가 울라지보스또크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체코군대의 무기가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들이기로 했다. 체코군대도 로씨야 체류와 귀국길 비용수요 등 제원인들로 무기를 팔고자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망명부대의무기구입을두고북로군정서련성대장으로활동했던리범석장군은자기의회고록《우등불》에서다음과같이회고하였다.
1차 대전 중 독일, 오스트리아가 로씨야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해 자유민주국가가 되였다. 이같은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쟁에 참전하고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동유럽의 최전선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유럽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독립을 되찾은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이였다. 이것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로씨야를 가로질러 우랄산맥을 넘어 울라지보스또크에 집결한 이유였다. 울라지보스또크 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 들였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제국 식민통치 아래에 겪어 온 노예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 놓았다.
체코무기관련리범석장군의회고는상기주간조선 2094호 기사의 내용과 맞아 떨어지고있다. 주간조선 2094호 관련 기사는 또 리범석장군의 증언 외에도 그 시절 1920년 7월 북로군정서 무기수송대 책임자(그해 25세라고 한다)로 활동했다는 리우석의 증언을 언급하고있다. 리우석은 85세에 나던 1980년에 한국의 력사학자 박용석에게 무기구입과 수송를 두고 《이 작전에 동원된 한국인 230명은 200정의 권총, 기관총, 탄약을 옮겼다.》고증언하기에이르렀다. 리범석장군의 회고와 주간조선 2094호 관련기사, 이우석의 증언은 하나같이 체코슬로바키아 망명부대와 북로군정서부대 사이에 무기교역이 있었음을 너무도 잘 알려준다. 《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3)나《현대사자료》(27)를 보면 1920년 7월에만도 로령지역에서 군총 3만여 자루를 구입하기로 계약했다고 서술하고있다. 이런 서술은 북로군정서부대가 서일장군의 지도와 지휘하에 귀국 도중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부대를 통해 많은 무기를 사들이였음을 밝히였다. 한데서 북로군정서는 시초 병력 500여 명에, 보총 500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으로 나타났으나 일제측의 자료—《간도에 있어서의 불정선인단의 상황》에의하면 1920년 8월 현재로 북로군정서의 무력은 독립군 약 1600여 명, 총 1300자루, 권총 15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밝히였다.
봉오동대첩전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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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룡정 3·13 반일운동 이후 동북의 겨레 반일단체들이 분분히 무기를 잡고 무장투쟁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데서 1920년 여름에 이르러 동북 경내에는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한족회, 대한독립단, 군무도독부, 신민단, 의민단, 의군부, 광복단, 광복군총영, 대한독립군비단, 보합단, 의성단, 간도국민회, 대한정의군정사, 창의단 등 30여 개의 반일단체와 무장대오가 건립되여 활동하고 있었다. 해당통계 자료에 의하면 1919년 말까지 동북 경내에 이미 45개의 반일무장대오가 실재했고 그 인수가 8450명에 달했다고 하니 경이롭지 않을 수가 없다. 연변 경내에만 해도 반일무장단체가 24개, 인수가 4650명에 달했다는 기꺼운 현실이다. 상기반일무장단체들가운데서연변경내에서조직된주요한무장단체들은이러하다.
간도대한국민회 (회장 구춘선, 사령관 안무)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사령관 김좌진) 훈춘한민회 (회장 리명순, 군사부장 황병길, 후에 최경천) 신민단 (단장 김규면, 사령관 양정하) 도독부와군무도독부 (총재 최명록, 참모장 박영) 광복단과의군부 (단장 김성극, 군무 국장 리동수) 의민단 (단장 방우룡) 라자구의사부 (의사부장 김리근) 대한의군단 (단장 홍범도)
주요한무장단체들이이러하다면 1920년 해당 통계수자는, 연변 각지에서 조직된 반일단체(일부 단체는 무장단체의 성격을 띠지 않음)는 26개에 달했다고 알려준다. 이 가운데도 구춘선이 이끄는 간도국민회를 두고《조선총독부경무국조사자료》에의하면연변지구의무장단체 24개에 권총 390자루, 기관총11정, 수류탄 120개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간도국민회에 보총 200자루, 의군부 보총 600자루, 신민단 보총 600자루, 군무독독부 보총 100여자루 있었다고한다. 여기에는 그후의 수자들이 망라되지 않았다. 다음은일본군에대한반일무장단체들의빈번한습격인데 1920년 중조변경 지구에서만도 연인수 1651명이 일본군습격전투에 가담하였다. 1921년에는 일본군과 602차의 전투를 벌려 연인수로 3184명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중 조선서 벌린 전투가 87차, ,동북 경내서 벌린 전투가 73차로 나타난다. 일본 외무성보존서류(고경)과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에 반영된 수자들이다. 이에 따라 연변의 여러 반일무장단체들은 고군분전의 한계를 의식한 끝에 서로간의 통합과 협동작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였다. 1919년 하반기에 홍범도부대는 중조국경지구에 출격하여 일본군과의 작전공세를 벌리였다. 간도국민회에서는 이파저파의 계선을 타파하고 홍범도부대의 작전을 적극 받들어나서는 한편 이해 11월에《고유문》(告諭文)을 발표하여 정의단 내부의 분렬과 일부 단체들에서 각기 자금을 모집하여 민중부담을 가중케 하는 등 행위를 비판하고 일치단결하여 싸우자고 호소하였다. 1920년 1월에 홍범도부대가 조선 국내 진공작전에서 개선하여 왕청현 북하마탕 국민회본부에 이르렀다. 간도국민회에서는 홍범도부대를 뜨거이 맞이하고 통합문제를 의논하여 일치한 견해를 가져왔다. 그후 국민회의 주도아래 제1차하마탕회의(2월 21일), 제2차 하마탕회의(3월 8일~10일), 제3차하마탕회의(3월 25일)가 련이어 소집되였다. 이런 속에서 서로 의견이 같은 국민회와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 등 4개 단체의 련합이 이루어졌다. 련합부대는《군무독군부》로불리우면서두만강대안의온성, 종성, 회령 일대에서 빈번히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군의 초소를 습격하였다. 1920년 1월부터 6월 7일전까지의 해당 통계수자를 보면 군무독군부는 온성, 종성, 회령 등 조선 국내 지구에 26여 차나 출몰하며 적들을 타격하였다. 이시기에군무독군부는북로독군부로개편되였다. 개편 후의 진영은 아래와 같다.
부장최명록 부관안무 정일제1군 사령 홍범도 부관주건 참모이병채 군무국장리원
이밖에정일제1군사령부산하에 4개 대대와 1개 헌병대를 두어 무장력량을 집중하고 강화하였다. 이런 통합에 힘입고 신민단부대까지 힘을 합친데서 정일제1군은 홍범도사령의 지휘하에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유인, 매복전을 벌려 일본침략군 야스가와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에섬멸적타격을주는휘황한승리를거두었다. 잠간먼저봉오동전투전후관계를상세히돌이켜보는것도본문이해에도움이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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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를알자면봉오동전적지답사가필요하고두만강변의삼툰자로부터 5호동네, 남봉오골, 북봉오골로 이어가야 한다. 필자 일행이 답사의 첫 목적지 삼툰자를 찾은 것은 1990년 11월 20일! 도문시를벗어난뻐스는두만강변을따라달리더니한참만에오늘의도문시월청향마패7대에 이르렀다. 예가 바로 봉오동전투의 서막으로 펼쳐진 그젯날의 삼툰자마을이다. 마을어구에 이르니《간평》(間坪)이라고 새겨진 지명패가 우리들의 시야에 유표하게 안겨왔다. 이날우리는짙은호기심을갖고이마을의진생봉(1990년 73살, 광복 후 향안의 삼동촌에서 고빈농퇀장, 농회장, 당지부서기 등 사업을 하다가 1952년부터 1980년까지 줄곧 마패대대 주임, 부주임으로 사업)로인을 만났다. 진생봉로인은 자기의 농가에서 우리와 허물없이 이 고장의 흘러온 력사에 대해 이야기를 터놓았다. 진로인이살고있는이고장은마패일대에서의첫개척마을로서 130년의 력사를 기록하고 있다고한다. 따져보니 조선이주민이 두만강을 건너 이땅에 첫 곽지를 받은 것은 1861년 경, 말하자면 기사년 대흉년(1869년) 직전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처음으로이땅에농막을짓고개척을시작한것은종성군삼봉일대에서이주한김씨, 박씨, 최씨 세 일가이고 이들 세 일가를 중심으로 세 개의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세 마을동네》라부르다가중국인들이삼툰자(三屯子)라고 불렀다는 것을 진로인을 통해 알게 되였다. 일명 간평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 고장의 두만강가 두 산, 두 바위사이에 끼운 벌판이라는 데서였단다. 처음에는 사이벌로 부르다가 새볼로 입에 오르고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니 간평으로 되었단다. 벌판이라야 동남으로 길이 약 1500메터, 너비 약 300~400메터에 지나지 않았다. 개척후반세기가흐르는사이간평—삼툰자는 이름없는 산간마을. 그러던 것이 1919년 3·1운동이 후 독립투사들이 자주 이 마을을 통해 조선으로 나들면서 이름이 나게 되였다. 1920년 10월 12일 상해 대한민국 림시정부 군무부의 전과발표에 의하면 이해 6월 4일 새벽, 즉 오전 5시에 약 30명으로 무어진 조선독립군의 한 소대가 삼툰자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 종성군 북방 5리 지점에 위치한 강양동에 진출하여 일본헌병군조(軍曹) 후구가와가 거느린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본때스레 까눕히고 어스름이 깃들 때 유유히 두만강을 건너서고 뒤따른 적병을 급사격으로 파멸하자 그 잔병이 삼툰자 북방으로 패주했다고 밝히였다. 허나일제측의《군사전투보고서》는강양동에서의참패를언급하지도않았다. 삼툰자전투의 경과는 언급했으나 적들의 참패와 피해사실을 회피하고 있다.
6월 4일 아침 두척의 쪽배가 조선측 강기슭에 머물러있음을 보아냈다. 이는 전날 밤에 잠입한 것임을 알고 정착하던 중 대안 삼툰자로부터 17~18명의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무기를 갖고 침입하려는 것을 발견한 일군초소에서는 이를 발포 격퇴시켰다. 그들이 대안의 지물(地物)를 리용하여 맞총질하였음으로 급히 남양수비대, 헌병경찰단에 보고하였다. 서로간의 사격은 그리 심하지는 않았으나 두만강을 사이두고 계속되였다. 한편 급보를 접한 수비대, 헌병, 경찰관들은 교전지점에서 약 1리(중국 리수로 8리) 떨어진 하류로 월강우회하여 삼툰자후방에 이르렀다.…불령선인이 도주함을 목격하고 발포 교전하게 되였다.
보다싶이량측에서는전과나손실을확대하거나회피하고있다. 어느 것이 옳은지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쌍방이 삼툰자에서 교전한 것만은 틀림없다. 지금의 간평에 당년 우리 측 사상자와 견증자의 후손들이 살고있지만 쌍방군대의 사망에 대해선 들은 적이 없다고하였다. 우리는무척흥미를가지고갖고간일본측자료—관련현대사자료를다시펼쳐보았다. 자료에서 불령선인(독립군을 말함)들이 기와를 얹은 큰집에서 휴식하고 있다가 급보를 받고 싸우면서 퇴각하였는데 지방민 가운데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 나타났다고 씌여졌다. 우리가 자료를 가리키며 사망자 2명가운데 김향칠의 장남인 김봉룡(12살)이 있는데 사실인가고 묻자 진생봉로인은 박장대소했다. 《봉룡이죽다니웬말이오? 그는 맏이도 아니고 향칠의 아들도 아니오.. 그는 김씨의 후손인 김경보의 둘째 아들이오. 봉룡은 물론 그의 아버지 경보도 문화대혁명 후에 사망했소. 이 마을에 봉룡의 아들 김명산이 살고 있는데 올해 34살 쯤 될 거요.》 《그렇다면그날부상당했다는봉길은어떠한지요? 일제측자료에는 봉길의 나이도 12살로 되여 있군요.》"" 《엉터리없소. 봉길이와 봉룡은 친형제간인데 봉길이 맏이고 봉룡이 둘째요.》 《???》 진짜사실앞에서우리는어안이벙벙해지고말았다. 그날 우리는 김명산씨를 만나지 못했다. 허나 김봉길이 있으면 약 80세이고 봉룡이 있으면 약 76세라는데야 더 캐어 뭘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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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간평을찾았을때 간평에는개척때의 3세대 중 김씨 후손이 2호, 박씨 후손이 1호, 최씨 후손이 1호 살고 있다고한다. 그중 최씨 후손 최송봉로인(64살)을 만나 보았는데 자기 아들까지면 벌써 5대가 이땅에서 살아 온다고한다. 두로인한테서우리는당년독립군이휴식했다는큰기와집주인이다름아닌김경보농민이였고 1989년도에 그집을 허물었다는 것을 알았다. 김경보로인의 아버지가 한다는 포수로서 별명이《족돌포수》였다는말에우리는귀가솔깃하였다. 《족돌포수라면여기엔꼭그럴만한사연이깃들어있겠는데들려줄수없을까요? 》 우리의청구에진로인은쾌히응하였다. 《김경보의할아버지때였다오. 그때는 이 고장에 범이 가끔 출몰했는데 글쎄 마을아래 드레바위에서 경보의 할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사망되지 않았겠소?! 바로 저 아래 두만강가를 따라 뻗은 바위무리가 드레바위라오.. 드레처럼 생겼다 해서 드레바위라 하지. 경보 할아버지의 죽음은 김씨네로 말하면 실로 청천하늘의 마른 벼락이였소. 경보의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의 원쑤를 갚는다며 사냥총과 조막도끼를 가지고 드레바위로 갔다는구만. 헌데 드레바위 틈에 숨어있어도 범이 나타나질 않더라오. 동네서 그만 돌아오라고 해도 들을 리가 만무하지. 그러던 그분 이 연일 드레바위 틈에 숨어있다가 끝끝내 그 범을 잡았다오. 그후부터 사람들이 그분을 족돌포수라 한거요.》 《대단한분입니다!》" 우리는전설처럼들리는이야기에감탄을금치못했다. 《그렇소. 그런 헌헌 대장부였기에 자식들을 휘동하여 독립군후원에 힘 다할 수 있었지.》 이렇게말하는진생봉로인은그젯날의기분에푹젖어있었다. 정녕존경이가는분들이였다. 그런 분들의 아낌없는 후원이 있었기에 독립군부대가 도처에서 신출귀몰하며 일제침략자를 본때스레 족칠 수 있은 것이 아니였겠는가! 옛집터가우리의발목을잡고놓칠않았다. 우리는 이윽토록 그젯날에서 헤여 나오지 못하다가 간평을 둘러싼 뒤산들을 바라보았다. 보매 뒤산들은 하나의 옹근 산이 아니라 네 갈래의 골안을 이루고있었다. 진로인이 서쪽으로부터 첫번째, 두번째 골을 각기 백산골, 정삼골이라고 하고 세번째골을 원골로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이골(걸만도, 입봉도가 원골로 통함)로 수레길이 도문까지 뻗었는데 드레바위 밑에 큰길이 닦아진 후부터 다니는 수레는 거의 볼 수 없다고한다. 네번째 골이 도문행 오솔길이 통한다는 가파란 범진골인데 이 골에서 홍범도장군이 한 개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일본놈 한 개 중대를 몰살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그것도 산중턱의 바위밑 샘물가에서 물마시느라 몰켜있는 것을 몰살했다고한다. 금시초문이였다. 아마 삼툰자전투 때 이 일대서 교전한 사실이 이렇게 번져진 모양이였다. 여하튼 우리의 마음을 끄당기는 범진골이였다. 산을 넘고 령영을 넘어 한시간 정도면 도문에 닿을 수 있다는 말에 우리는 한번 걸어보기로 작심했다. 때는오후 2시반이였다. 우리는 진생봉로인과 뜨거운 작별인사를 나눈 후 범진골에 들어섰다. 늘찬 령길이였다. 처음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올라 갈수록 힘에 부쳤다. 가까스로 산중턱의 바위밑에 이르니 과연 샘물이 쉼없이 솟아 오르고있었다. 일제놈들을 전멸시켰다는 이야기가 깃들어서인지 물맛 또한 별미였다. 샘물터를 누빈 가둑나무 잎들을 가셔내니 선경의 약수물 예 아닌가 싶다. 온몸에새힘이솟았다. 바위우로 치달으니 저 아래 두만강가에 자리 잡은 25호의 아담한 농가들이 정답게 펼쳐졌다. 원쑤놈을 족친 우리 독립군전사들의 노한 함성이 금시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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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후찾은곳은도문시에서북으로 5킬로메터가량 떨어진 후안산이였다. 관련자료를 보면 삼툰자전투와 이어진 6월 6일 밤의 후안산전투가 이곳의 5호동네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허나 이 마을 로인들은 그런 일이 없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목도고개 너머 전안산에 김용손이라는 로인이 혹시 알 거라고 하였다. 일제측자료에의하면조선측의강양동과중국측의삼툰자에서독립군에게얻어맞은일제놈들은독립군을일망타진하겠다고미쳐날뛰며야스가와소좌가인솔하는월강추격부대(200여 명)를 편성하여 남양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게 하였다. 이 부대는 안산에서 삼툰자전투에 개입했던 아라요시중대와 합류한 뒤 목도고개를 넘어섰다가 5호동네를 발견하였다. 적들 척후병이 정주문을 여니 2명의 조선녀인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없다는 품이 수상쩍어보였다. 그래서 방문을 열어제끼니 독립군 여럿이 이리저리 누워있었다. 찰나 한 독립군전사가 제꺽 총을 들어 적 척후병을 쏘아눕혔으나 뒤이어 몰려드는 적을 당해낼 수 없다. 그러자 독립군들은 뒤문을 차고 뒤산으로 내달았다. 그번전투에서적들은자기편 1명이 부상당하고 독립군 1명과 지방인 1명이 즉사했으며 6명을 포로했다고하였다. 지방인 즉사란 최진삼의 안해 김씨를 가리킨다. 그날 밤 김씨는 시동생인 최진포(일명 최진국)의 집에서 동서와 함께 10여 명 모금대의 새벽밥을 하다가 참변을 당했었다. 전안산(도문시 홍광향 안산촌)의 김용손로인(78세, 당지 태생)을 찾으니 그번 전투에서 김씨 녀인이 확실히 적탄에 맞아 사망되였다고하였다. 그리고 5호동네가 후안산이 아니라 전안산 뒤 목도고개 너머의 강건너 편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전안산과 후안산 일대는 신민단부대의 주요한 활동지라고 덧붙혔다. 《당시남봉오골과북봉오골의형편에대해선아는것이없는지요?》 우리의물음에김로인은몇개의토막사건을들추어냈다.
—남봉오골이란 지금의 리인진이라는 사람의 안해가 독립군의 밥을 해주다가 그번 토벌에 사망되였다. 피난중 생죽음을 당했다. 북봉오골은 지금의 흥진치기와 고개하나를 사이두고 있다. —당시 주인없는 말 한 필이 안장을 지닌 채 흥진치기로 넘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7~8살에 지나지 않았던 용손이와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그말을 붙잡자고 야단을 부렸다. —봉오동전투가 벌어진 날 오후 1시쯤에 큰비가 내렸다.
김용손로인이꺼낸토막사건하나하나가자료보충으로되는귀중한력사사실들이였다. 더우기 남봉오골 부근 신선더기에서 밥짓던 녀인이 사망되였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또한 도문시 서쪽가의 오공촌에 당년 5호동네에서 사망된 녀인의 아들 최상준이 있다는 귀뜸은 우리의 마음을 흥분케 해주었다. 했으나갖은노력끝에최상준댁을찾고보니최로인은이미사망되고장년에들어선그의아들이출국친척방문을가고없었다. 우리는 최로인의 며느리한테서 력사부문에서 일하는 한 선생이 시할아버지한테 몇번 다녀갔다는 것만 알았다. 누굴까, 연길에 돌아온 후 여러 모로 탐문해보니 연변력사연구소의 강룡권선생이였다. 강선생은 1985년과 1988년, 1989년에 걸쳐 세 차례나 최상준로인을 방문했는데 세번째 만에 끝내 최로인의 어머님 존함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였다. 5호동네에서 사망된 녀인의 이름은 김숙정이였다. 1920년 6월 6일 밤에 김숙정녀인은 동서와 같이 밥을 짓다가 적들과 맞띄우게 되였다. 총싸움이 벌어진 후 신민단의 13명 전사들은 뒤문으로 빠지고 전안산의 최명극 등은 자리를 옮기였다. 동서인 최진포의 안해도 어느 결에 김숙정의 집으로 피하고없었다. 홀로 남게 된 김숙정은 무섭기만 했다. 하여 자기도 집으로 가려고 나섰다가 두집 사이에서 적탄에 맞아 당장에서 숨졌다. 이는어머님에대한최상준로인의회억이다. 그는 피맺힌 그날의 참상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다가 강룡권선생한테 터놓았다. 강선생의 록음테프에는 지금도 그날의 회억담이 소중히 간직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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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툰자, 5호동네를 답사한 후 1년이 지나서 봉오동전적지를 답사할 기회가 왔다. 1991년 11월 23일 오전 7시 30분에 우리 연변력사연구소의 연구일군들은 소형뻐스를 리용해 동북방 봉오동으로 갔다. 연길에서 도문시 북쪽의 봉오동어구 수남촌까지 한시간, 거기서 다시 산길을 따라 봉오동전적지까지 반시간! 연길—봉오동전체로정은약 70킬로메터였다. 수남촌을지나고토성자마을을지나자봉오동저수지검사소가나타났다. 사전에 해당 수속절차를 밟은데서 검사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산골짜기를 따라 한참 달리니 골짜기를 가로 막은 봉오동저수지땜과 눈뿌리 모자라게 뻗은 저수지가 시야에 안겨들였다. 《봉오동반일전적지》패말은저수지입구의길가에세워져있었다. (이제부터 전적지 구내에 들어서는구나!) 우리모두의가슴은세차게높뛰였다. 1920년 6월 7일에 있었던 봉오동전투가 신기루마냥 저앞에 펼쳐졌다. 1920년 6월 6일 밤 안산의 5호동네와 남봉오골 신선더기에서 참상을 빚어낸 일제《월강추격부대》는새날새벽에봉오동밖의고려령부근에서독립군소대의유인작전에걸려들였다. 그때 봉오동골짜기—북봉오골에 주둔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국무도독부 등 독립군부대 300~400명은 새로《대한북로독군부》로편성된뒤봉오동여러마을의주민들은대피시키고봉오동상촌아래호박골어구의시루봉과서산, 남산고지에 진을 치고있었다. 6월 7일 아침 월강추격대놈들은 독립군의 뒤를 밟아 봉오동 하촌에 기여들었다. 중촌에서 독립군의 그림자도 발견 못한 놈들은 독립군이 저들 기세에 눌려 북으로 패주한 줄로 알고 기고만장해서 상촌에 접근하였다. 하촌과 상촌사이는 약 10킬로메터의 거리였다. 점심때적척후병이독립군부대가매복한산밑의홈채기에들어섰다. 이어 적 주력부대가 따라 들어서자 삼면고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독립군부대는 홍범도장군의 사격령에 좇아 일제히 맹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급기야응전했으나피동에빠지고말았다. 홍범도장군의 지휘부가 설치된 서산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홈채기 복병의 몰사격을 면치 못했다. 방향을 홈채기 복병들한테로 돌리자 동산 시루봉에 진을 쳤던 최진동부대가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독립군의일련의유인작전에들였다는것을알았을때는이미늦였다. 적들은 퇴각을 시도했다가 퇴로를 차단하여 나선 남산 신민단부대의 공격을 당했다. 적진은일대수라장을이루었다. 말에서 곤두박질하는 장교놈들, 살겠다고 줄행랑을 놓는 놈들, 내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놈들—세시간 남짓한 응전도 기울어진 대세를 돌려 세울 수 없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천지가 어두워지며 소낙비까지 마구 쏟아졌다. 적들은 일시 적아를 분별하지 못하고 서로 란사하다가 퇴각길에서 또 맹추격을 받아 무리죽음을 당했다. 당시《상해시보》와《길장일보》의보도에의하면일본군사망자가 150명, 부상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고한다. 독립군도사상자여럿을냈다. 한 독립군의 시체 앞에서 그의 고향친구가 설음에 북받쳐 지은 시가 있다.
내고향몇천리던가 고향을떠난후만주벌판에 황혼에싸여서늦은저녁에 사랑하는내동기는사직을한다 적탄에쓰러진동기앞에서 이름을부르며끌어안으며 상처는일없다, 정신 차려라 동기야이산천아암만불러도 말없는시체의식은팔목에 시계는여지없이 돌아가누나 남자의리별인가수풀속인가 가난한앞뒤집에태여난이몸인 나는야승리의기발높이들고 때가되면고향으로돌아가리라 너를두고가는것은아득하지만 결국에네원쑤는내가갚으리 동기야잘있거라나는간다.
이것은후에민간에널리퍼진독립군노래이다. 전적지를답사하는가운데서우리는무장으로일제를항격한우리겨레의독립항쟁이겨레민중의성스런안받침과갈라놓을수없다는것을새삼스레느끼였다. 삼툰자와 5호동네, 남봉오골 일대가 그러했다. 봉오동의 작전 지역들이 그러했다. 봉오동과 그 연도의 간도국민회 소속 제1남지방회장 마용하와 제2북지방회장 김정도는 산하 각 지회장 앞으로 속보를 띄우며 전투전과를 알리는 한편 군사통신의 신속한 수행에 힘다했고 간호대의 파견과 군량, 군수물자의 공급을 시달하였다. 이렇게두만강가의삼툰자로부터적을끌어다가봉오동골짜기에서일망타진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국무도독부 등 독립군부대들의 련합작전과 겨레 민중의 헌신적 투쟁열에 받들린 봉오동전투—사책에서는 이 전투를《독립전쟁의 개시》또는《독립전쟁의제1회 회전》이라고적고있다. 우리는강룡권선생의안내하에독립군부대가이동했다는북쪽골로도들어가보았다. 1킬로메터 쯤 걸으니 페허로 된 사슴우리가 나타났다. 북쪽골은 여기서 또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오른쪽골—동골을 민간에서는《도투묵은데골》이라고불렀다. 그 전의 삼개마을이 이 골안에 자리 잡았다고한다. 상촌은왼쪽골어구에자리잡았는데지금은그흔적조차찾아볼수없다. 상촌자리에서 보니 서쪽켠이 석현방향이고 동남쪽이 후안산방향, 남쪽이 봉오동전투지점이였다. 일행중 전투지점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놓는 사람도 있었으나 타인을 설복시킬만한 근거는 내놓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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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의개시또는독립전쟁의제1회 회전이라고 대서특서하는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의 전 과정을 20여년 전의 답사로 그대로 재현해 보았다. 왜서 품을 들여가며 봉오동전투 전 과정을 돌이켜 보아야 할까? 실천은, 봉오동전투의 휘황한 승리는 연변지구 여러 반일무장단체 간의 통합의 힘이 크다는 것을 사실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토대하여 국민회는 6월 21일, 7월 1일, 7월 7일에 또 연속 3차의 통합회의를 가지였다. 어떤 자료에는 4월 2일과 5월 7일에 봉의동(鳳儀洞)에서 제1차, 제2차회의가 열리고 5월 15일에 왕청현 가야하 대지동(大地洞), 수전동(樹田洞)회의, 6월 21일에 장암동회의가 열리었는데 모두가 간도국민회의 주장과 창도결과라고 한다. 어찌하든간도국민회가통합주장의선두에나선것만은자명한일이다. 상기 6월 21일, 7월 1일, 7월 7일의 3차 련합회의에 앞서 국민회에서 먼저 통합방안을 작성하고 상해림시정부 측에서 파견된 류동렬, 리용과 안정근 등이 5월이래 여러 반일무장단체를 찾아 대량의 설복사업을 앞세운데서 통합문제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결과는하나였다. 로씨야와 연변 경내 대소 반일부대들을 모두 해산하고 무기는 모두어 통일분배를 하며 군사와 행정은 2부제로 나누어 실시하고 통합명칭은 7월7일에 토의, 결정하기로 한것. 했으나순탄치못한일도없지않았다. 통합을 앞두고 북로군정서에서《국내 진공계획은 시기상조》라고주장하면서독립성을강조한데서통합이순통치않았다. 이해 1920년 7월 7일, 연길현 의란구 신계동회의에서 북로군정서가 통합에 동의하고 서명하였다고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잘 알려지지 않는다. 북로군정서는북로군정서로서의사연이있은모양이다. 북로군정서에서 이렇게 나서는데는 간도국민회에서 자기들만이 상해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승인하는《유일한 지방행정, 군사기관》으로자처하고일을처리하는데서인기된모순이아닐까도생각해본다. 하지만 통합은 대세의 추세였다. 서일장군은 이를 잘 알고있었기에 그후 전이과정의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그리고 밀산으로의 집결에서 홍범도 등 여러 독립군부대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맹부덕의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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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와서로군정서를중심으로하는동북에서의겨레반일무장단체들의흥기는일본제국주의의지대한불안을자아냈다. 일본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찌(赤池)는 봉천(심양)에서 동북군벌 장작림과 담판을 벌리며 장작림을 핍박하여 공동수색반을 무어 봉천, 길림 2개 성 내의 조선인반일단체를 수색하고 취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의 압력을 장작림은 이겨내지 못하고 공동수색반은 그해 5월~8월 사이에 봉천성의 통화, 안동, 관전, 환인, 유하 등지에서 조선인 반일지사와 관련 이들에 대해 대대적인 체포를 벌린다. 길림성은 사정이 다르다. 일제놈들이 길림성 내에서 조선인반일단체를 수색하려고 하자 길림성 성장 서정림(徐鼎林)이 강력히 거절하고 연변의 지방당국이 호응하지 않는다. 1920년 6월《봉오동전투》에서참패한일제놈들은7월에《간도지방불정선인초토계획》을꾸미고봉천회의를재차소집하며동북군벌장작림에게압력을가하여중국군의명의로일본군이출동하는등조건을접수할것을강요하였다. 장작림은 또 어쩔수 없이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지만 출병범위를 길림성의 동녕현 서남지구와 연변 4개 현으로 규정하고 길림성 성장과 연길도윤에게 일본군과 협동작전하여 조선인 반일무장대오를 취체하라는 령을 내린다. 1920년 8월 일본군은 정식으로《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확정하고 9월에는 출병대기중인 각 부대에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중국 지방당국은 일본의 압력에 연길 주둔 중국륙군 제2혼성려 보병 제1퇀 퇀장 맹부덕을 본지 토벌장관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언녕부터 동정하며 일본군의 만행에 반감을 가지던 륙군퇀장 맹부덕은 토벌을 앞두고1920년 9월 5일에 산하의 중국군 160여명을 십리평 잣덕에 보내고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만나 자기의 권고를 전달하게 하며 독립군부대들이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 것을 바랐다. 연변내 다른 반일무장단체들에도 사전 알림이 전해졌다. 그럼맹부덕은왜서우리반일무장단체들이원래의근거지들에서빨리퇴각할것을바랐을까? 이를 알자면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에서의 맹부덕부터 다시 리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난세기 1991년과 1992년 사이 필자 리광인은 연변의《문학과 예술》 문학평론지(격월간)에 연변의 항일독립운동 현지답사기를 6회에 걸쳐 련재한 적이 있다. 현지답사기의 한 편이 룡정 3·13반일운동인데 그 글에서 필자는 맹부덕이를 언급하면서 3·13반일운동을《탄압》한중국순경들에대한평가가적대적이였다.
3월 10일, 룡정주재일본총령사스즈끼와연길도윤(道尹)은뒤늦게야이소식을입수하고미쳐날뛰였다. 12일연길도윤공서에서는대회조직자들을불러운동금지를요구하다가거절을당하게되자그날로수십명의순경을룡정촌에금파하였다. 룡정일본총령사는국자가주둔육군제2혼성려보병제10퇀퇀장맹부덕에게반일독립시위탄압을강요했다.
그다음은군경, 순경들과의일장충돌이다. 군중대오는룡정상부국순경들과국자가에서파견한병사들에게막혀꿰고지나지못한다. 군경들의뒤에는중국육군퇀장맹부덕이서있다. 이자는오전 8시경에 20여명기병을이끌고국자가에서달려오더니룡정상부국국장장은적의순경배비회보를듣는다. 일본총령사스즈끼를만나오늘경비형편도회보한다. 이번엔 5000여명군중이동산기슭에집결되고있다는소식을접하고현지로달린다. 허나무슨대수랴, 시간이흐름에따라 5000여명군중대오가동산기슭에모여든다. 7000~8000명군중대오는대회장으로휩쓸어든다. 놈들은땀벌창이되여맴돌이친다. 맹부덕은군중들을막아내지못한채부하들을끌고회장경계에나선다.
그날대회소집은천주교교회당정오종소리를계기로시작되기로약속되였다. 이소식에접한맹부덕과상부국국장장은적은교회당일체출입을엄금하라고교회에알리였다.
대회가끝나자대회참가자들은 320명《충혈대》를선두로내세우고충혈대기발과《정의 , 인도》라는프랑가드를추켜들고성세호대한시위행진에나섰다. 급해난것은맹부덕이였다. 이자는총칼을꼬나든군경들이시위대오가경과할가두에횡대로늘어서게하였다. (무장한일본경찰은영사관부근에배치됨) 시위군중과군경들사이엔일대충돌이벌어졌다. 놈들은최선두의기수공덕흡에게달려들어기발을빼앗아냈다. 충혈대원인공덕흡은수차의격투끝에다시기발을앗아들였다. 앞에서는육박전이벌어지고뒤에서는계속내민다. 이때다. 《땅! 땅!》 총소리가울리자선두에선학생들과군중들이피못에쓰러졌다. 시위대렬을막아낼수없게되자맹부덕이발포명령을내렸었다. 《엎드렷!》 누군가높이웨치자뒤따르던시위군중들이거리바닥에엎드렸다. 총소리가멎고군중들이언땅에서기여일어날때는이미 10명투사가숨을거두고 19명이부상을입었을때였다. 때는 3월 13일오후 2시였다. 분개한군중들이왜총을쏘는가고따지고들자급해맞은맹부덕은수하들을이끌고일본령사관쪽으로물러가다시총을꼬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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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반일운동 한 편의 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의 한 편의 필자 글에 나오는 맹부덕 관련 편단편단들이다. 계급투쟁의 연기가 풀썩 풍기여 나며 맹부덕은 일제놈들의 앞잡이로 룡정 3·13반일운동을 현지 탄압한 살인마로 매도된다. 필자 만의 견해가 아니라 우리 조선족 력사학계의 견해였다. 오늘 이 편단들을 다시 읽으면 어이가 없어 스스로도 머리를 흔들게 된다. 흥미로움은연변력사연구소시절필자와둘이서연변내독립운동전적지답사를다니고둘의서명으로《문학과예술》지에답사기를련재했던박경재후배는그후연길도윤공서와중화민국등관련자료들을깊이있게연구한데비추어여러해가흐른 1999년 9월에 발표한 한편의 논문—《연길도윤공서에서 3.13반일운동을 제지하게 된 력사적 배경에 대하여》서두에서당년맹부덕퇀장의변명을언급하며비뚜러진력사를바로잡고있다.
사건직후연길도윤공서와그날군경들을직접지휘하여사건을저지른맹부덕은충돌당시 군경들가운데서총을낮게받쳐든병사들때문에 10여 명 군중을 오상하였다고 재삼 강조하면서 뜻밖의 사건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면서박경재선생은그자료출처를당년그날의룡정상부국국장장은적의보고에서찾았다. 3.13 며칠 뒤인 3월 20일 , 장은적은《룡정상부국에서 조선인들이 회의를 열고 독립을 선포한 정형과 죽고 상한 조선인 명단에대한보고》에서이같이밝히였었다. 력사를보면 1919년 2월까지 연변의 반일지사들이 조선, 로령 연해주 반일지사들과 련계를 맺으며 대규모 반일운동을 준비할 때 연길도윤공서 장세전 도윤은 연변 각 현 지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도윤공서의 입장을 천명했다.
간도에거주하고있는한민들은고무받고기뻐하면서서로소식을전하고있는데이는다년간갑갑함을풀기위함인지라당연한것이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모두가 여러 나라에서 법리(法理)를 고수하고 정의가 강권을 전승하는데 달린 것이지 결코 민간에서 떠들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장세전은이번운동이일본의간섭을초래할까두려워각지지방관원들에게조선인지사들을타당한방법으로 권유할것을요구하기에이른다. 이에 따라 연길도윤공서와 룡정 상부국에서는 3.13을 앞두고 부근의 조선인 반일단체의 지도자들을 불러 여러모로 권유하는 한편 포고를 내는가 하면 연길도윤공서에서는 밤중으로 군경을 룡정에 급파하여 상부국 군경들과 함께 순라를 강화하며 사태를 미연에 막기로 하였다. 또, 연길도윤공서 장세전과 육군퇀장 맹부덕은 3월 12일 저녁까지도 조선인 반일단체지도자들을 불러《천방백계로 권유하면서 4시간 정도 지체하였으나 끝내는 설복하지 못하였다》이는중화민국 8년(1919년) 3월 1일《훈춘지사가 조선인들이 로씨야 국경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하는 문제에 대하여 상급의 지시를 바람》에서드러난다. 이런형편에서장세전과맹부덕은길림성독군과성장한테전보를보내여처리지시를바라면서군경들에게는《상부지밖에서진행되는한인들의시위운동에대해방관적태도를취하고상부지내에서의운동은절대금지해야한다. 일본인의 생명재산에 해를 끼치는 일체 행위는 상부지 내외를 불문하고 엄격히 취체해야 한다.》고명령을내리였다. 여기에서, 상부지밖의 조선인 반일시위운동에 대해 방관적 태도를 취하는 면에서 우리는 연길도윤공서와 지방당국에서 조선인들을 동정하며 묵인하려 하고 있으며, 3·13탄압도 본의가 아니라 핍박에 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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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사정은이들이바라는의도와는완전히 달랐다. 룡정 상부국 국장 장은적과 화룡지사는 1919년 3월 20일과 3월 25일 관련 보고에서 이렇게 썼다.
분노한조선인《약 2000~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발을 날리며 상부지 안으로 들어오려 하였다. 맹퇀장은 앞장서 도리로 권고하고……군경들은 모두 횡대로 대렬을 지어 제지하였으나 ……선인들은 권고를 듣기는커녕 도리어 돌멩이를 퇀장한테 뿌리고 깃대로 퇀장을 마구 때렸다.》 그거동은반역과흡사하였다. 《군경들은장관이수모를당하자총을쏘아위협하였는데뜻인즉선인들이회오(悔悟)하고 흩어져 돌아가도록 하려 하였으나 뜻밖에도 군경들 속에 총을 낮게 쏜 자들이 있어 탄알은 10여 명 군중을 오상》하였다.
연길도윤공서에서도이에해석을가하고있다.
맹퇀장은……시위군중들이 상부지 안으로 밀려들면 치안질서에 해로울까 두려워 영사관과 외국상인을 보호하려는 견지에서 친히 군경을 이끌고 상부지 밖으로 나가 시위대오를 막았다. 중국 군경들은 시위군중들이 맹부덕퇀장을 구타하고 심지어 돌멩이까지 뿌리자《정당방위》책으로무력탄압을가하였다.
이에박경재선생은《무력탄압은지방당국인연길도윤공서가제지과정에서필연적으로취한주요한수단이아니고시위군중들과의충돌에서의외로벌어진류혈사건으로보아야한다.》고찍어말한다. (71) 여기까지보노라면륙군퇀장맹부덕은극단적으로살인마로평가할인물이아니고실사구시하게다시평가해야함을느끼게되며박경재선생의견해에백배수긍하게된다. 그리고우리는연길도윤공서나산하지사들, 맹부덕퇀장의 말—《충돌당시군경들가운데서총을낮게받쳐든병사들때문에 10여 명 군중을 오상하였다》에주의를돌릴필요가있다. 룡정 3·13반일운동을 연구한 국내외 연구성과들을 주의하여 살피면《총을 낮게 받쳐든 병사》들이부분에서문제가생겨난다. 어떤 연구가들은 그날 1919년 룡정 3·13 중국 군경들 속에 일본영사관 측 놈들이 변복차림으로 섞이어 총을 쏘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직 학계의 정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정하는 학자들이 한둘만이 아니다. 이런연구속에서당년룡정 3·13반일운동에서의 맹부덕이를 떠나 다시 왕청현 십리평 북로군정서 부분으로 돌아 오면1920년 9월 5일에 맹부덕퇀장 산하의 중국군 160여 명이 십리평 잣덕에 가서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찾아 맹부덕퇀장의 권고를 전달함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날 십리평 잣덕에 이른 맹부덕퇀장 수하들은 일본 측의 강경한 교섭하에 중국 측에서는 부득불 토벌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연길도윤 도빈과 맹부덕퇀장의 명령에 좇아 줄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군정서 간부들은처음이에동의하지않았으나중국측에서북로군정서의철퇴를방해하지않겠다고답복하니그들의권유를받아들이기로했다. 룡정 3·.13반일운동에서의 이른바 맹부덕《탄압》을다시사고하며리해해야했다. 이럴때국민회계통의독군부사령관홍범도한테서도일본군이대거침공해오는형편에서국민회계통의독립군부대가장백산방향으로진출하니같이이동하다가기회를보아침략자들을섬멸하자는밀서를보내왔다. 그러나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재무부장 계화와 함께 로씨야 연해주 무기구입에 나선 터에스스로결단을내릴수는없었다. 명령에 복종함은 군인의 천칙이므로 모든 것은 최고사령관 서일총재의 결단에 좇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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