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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익]  조선전쟁의 나날을 회억하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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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청화대학교 졸업시 저자.


13.   백마강반의 이야기


1950년 내가 다니던 그 대학교는 내가 군대에서 제대할 때는 이미 압록강변의 의주义州(신의주 부근)로 옮겨졌다.  


1952년 3월 5일, 나는 조선에서 부상을 입어 조선인민군에서 제대 되어서   더욱 잔혹하고 격열한 평화년대의 전투를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전장에서 부상을 당한 장애군인이 되었다. 왼쪽 귀가 거의 청각을 잃었고, 이는 종신 기능상실로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은 것은 나의 의력과 어려서부터 양성한 양호한 신체자질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사람들.   나는 행운스러웠다.


장애로 인하여 나의 여생은 부단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야 하였다. 전쟁으로 중단 된 학업을 완수하는 것이 첫번째로 되는 도전으로 되었다. 이러한 도전에 응하려면 우선 조선 대후방으로 이사한 이 학교를 찾아야 했다.   나는 학교가 압록강반 의주义州로 옮겨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마지막 쌀주머니를 갖고 나는 평양을 떠나 평안남도를 거쳐 평안북도의 변경도시 의주义州로 향했다. 의주는 압록강과 백마강의 협각에 있다. 나는   의주 부근의 백마강반에 도착해서 길옆 한 집에 들어섰다.


나의 차림새를 보고 집주인은 제대군인임을 인츰 알아보는 것이였다. 주인은 열정적으로 나를 맞이하였다.


군인의 습관대로 지니고 온 쌀주머니를 주인에게 맡기였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묵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집주인에게 자아소개를 하였다. 원래는 중국 해방구에서 보낸 유학생이며 조선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인민군에 참군하였고, 부상을 입었고, 지금은 제대하여 원래의 학교를 찾아가서 계속하여 학업을 마무리할 것라로   말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전쟁으로 평양에서 의주로 옮겨 왔으며, 나는   지금 그 대학교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해석해 드렸다.


주인 아주머니는 듣고 나서 학교가 이곳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다. 내일   집 아이가 나를 배동하여 함께 학교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집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그 대학교 근처에 있었다.


이어 아주머니는 이곳은 전장과 멀리 있어 전쟁의 피해는 받지 않았어도   자기네는 전장의 실제 상황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끔 방송에서만 승리의 소식을 듣는 것이였다. 이때 그집 꼬마가 끼어들면서 선생님이 말하는 소식은 방송에서 말하는 것과 똑 같다고 종알댔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1년 전 나의 경력을 말해주었다. 특히 순천 포위돌파전의 실제상황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장에서의 생사의 장면을 그렇듯 잔혹하여 말로는 표달할 수 없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밥을 지으면서 군대아저씨는 어느 때 부상당했는가 물었다.

나는 부상 당한 경력을 다시 한번 상세히 말씀 드렸다.


밥도 다 지었고, 우리는 식사하면서 또 한담을 하였다.


저녁식사 후 나는 또 피곤해졌다. 아주머니를 이러한 나를 보고 방안에 들어가 주무시라고 했다. 군대아저씨는 조선에 집도 없고, 학교에 돌아간   후   명절 때   시간이 되면 놀러오라면서 그때에 다시 전쟁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였다.


당시 조선과 중국에는 조선전쟁에 참군한 가정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조선전쟁에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뉴스보도가 사람들의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전선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나는 어망결에 문전송달하는 “뉴스원”이 되어 그들이 즐겨 듣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를 갖고 있게 되었다.


낮의 피곤이 몰려들어 저녁 밥을 먹은 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잠을 잤다.

깨어나보니 머리맡에 깨끗이 세탁한 옷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밤새 주인집 아주머니가 옷을 세탁하고 가마에 말리워서 다르미질 하였던 것이다. 그 성의에 나는 다시 한번 깊은 감동을 받았다.  


조선의 습관대로 하루 세끼에 아침식사가 가장 중요했다.


그날 아침은 풍성했다. 농촌에서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풍성한 아침식사였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침식사가 잊혀지지 않고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침을 먹은 뒤, 나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꼬마를 따라 길을 떠났고 약 30분후에는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는 임시로 기관 사무청사에 들어있었고 실은 학교의 접대소로서 몇몇   행정인원이 남아 내방하는 인원을 접대하였다. 나는 학적 회복을 제출했고 학업을 완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학교측에 다르면, 지금은 학교를 찾아오는 인원을 임시 배치할 뿐 수업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다. 개학 시기는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접대원은   나의 상황을 듣고 나서 현재 학교의 생활조건은 부대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나의 상황으로 보면 먼저 동북으로 돌아가서 몸을 잘 호리하고 다시 복학하는 것이 어떠냐고 건의하였다. 학교가 이런 상황에서 상학도 불가능하고 남았다하더라도 별로 재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학교측의 건의를 접수했고 잠시는 조선에서 복학하려는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대교를 건너서 다시 단동, 심양을 경유하는 기차편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52년 5월, 나는 고향 용정현인민정부에서 제대군인 수속을 밟았다.


그후 베이징에 왔고, 선후하여 베이징사범대학과 청화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나는 왼쪽 귀가 청각을 잃은 장애와 한어수준이 낮은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학교측의 지지와 동창들의 방조, 자신의 노력으로 고등교육 학업을 끝내는 마무리 하게 되었으며 청화대학 토목학부를 졸업하였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