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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교수의 역사광장38] 독립투사로 남은 ‘나는 홍장군’의 아내(2)

홍범도 귀순공작에 맞서 싸운 이씨 부인
일제의 참혹한 고문에 저항하다 비명횡사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서


1229-2 1929년 재혼한 아내 이인복과 함께, 62살의 홍범도. 임경석 제공.jpg


1929 재혼한 아내 이인복과 함께, 62살의 홍범도. 임경석 제공


일부 학자는 이씨 부인의 이름이 옥녀였다고 전한다. 북간도 조선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라 하니 전혀 불신할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증빙이 발견되기까지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씨 부인이 홍범도와 부부가 된 것은 기이한 인연 덕분이었다. 처녀 때 그녀는 비구니였다. 동기는 뚜렷이 알려지지않았지만, 일찍부터 북청 산골의친정집을 떠나   금강산 깊은 산속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에서 승려의 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24살 홍범도도 승려였다. 금강산 유명한 사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 있었다. 평양 주둔 조선군 친군서영제1대대 군인 출신으로, 제지 수공업자로 일하던그는 산중 사찰에서 은신 중이었다. 부당한 대우와   체불임금에 항의해 공장주를 죽인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금강산 깊은 산속에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어떤 가슴 설레는 과정을거쳐 연인이 됐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머잖아 젊은 여승은 임신했음을 알게 됐다. 바로 큰아들 홍양순을 잉태한 것이다. 두 사람은 승복을 벗고 하산하기로   했다. 가정을 이루기로 합의한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정착한 곳은 여인의 친정이 있는 함경남도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 인필골마을이었다. 북청에서 갑산 쪽으로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후치령 고개 바로 아래였다. 그곳에서 부부는 짧으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아들 둘을 얻었다. 큰아들 양순과 작은 아들 용환이다.

40살에 아내를 잃은 홍범도는그 뒤로도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새 아내를 얻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성화에 힘입어 새 아내 이인복을 맞아들인 것은 20년이 지나 노년기의 일이었다.


홍범도의 아들, 소년 의병 홍양순


이씨 부인의 협력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물러설 인간들이 아니었다. 토벌대는 가짜 편지를만들어냈다. 이씨 부인이 남편에게직접 쓴 글인 듯 꾸민 편지였다. 그 편지를 몸에 지닌 채 심부름꾼이 의병부대 주둔지 용문동 더뎅이로 파견됐다. 하지만 산속으로 올라간 사자들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틀 동안 여덟 차례나사람을 들여보냈는데,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토벌대 집행부는 홍범도의 맏아들 홍양순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홉 번째 사자였다. 귀순을 권유하는 가짜편지를 지니게 한 채 산속으로 올려 보냈다.


홍양순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의병 지휘부로 쓰는 집의 문 앞에 섰다. 홍범도는 격분했다. 아버지를 망치는 일에 아들이 가담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홍범도는 방아쇠를 당겼다. 비명 소리가 났다. 부관이 급히 뛰어나갔다. 천만다행이었다. 총알은 귓바퀴를 맞히고 지나갔다. 한쪽 귀가 떨어져나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백발백중의 명사수 아니었던가. 500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그만 동전을 맞히는 귀신같은 사격술을 익힌 홍범도였다. 격발 순간에 손가락이떨렸음이 틀림없다. 결정적 순간에 아버지의고뇌가 작동했던 것 같다. 총알은 미세한 각도로 빗나갔다.


상처를 회복한 홍양순은 아버지의 의병 대열에 합세했다. 17살짜리 소년 의병이 됐다.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함흥 신성리 전투, 통패장골 쇠점거리 전투, 하남 안장터 전투, 갑산 간평 전투, 구름을령 전투, 괴통병 어구 전투, 동사 다랏치 금광 전투등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홍양순은 1908 6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전사했다.


노년이 되어서도 홍범도는 그 전투를 잊지 못했다.


“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본군과 싸움하여 107명 살상하고, 내 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이는 중대장이었다. 518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이씨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그 뒤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의 운명은 길지 않았다. 임재덕과 김원흥이 이끄는토벌대 200여 명은 용문동 더덩장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짜놓은 매복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 결과 토벌대 지휘부를 포함해 군경 209명이 포로로 잡혔다.


임재덕과 김원흥의 최후


용문동 의병 주둔지 지휘소 앞에 임재덕과 김원흥이 결박된 채 무릎이 꿇렸다. 홍범도가 나섰다.


“너희 두 놈은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시골에서 감자 농사하며 먹고사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이거든. 도리어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다 청한다.


두 사람은 깎아 세운 두 나무 기둥에 각각 묶였다. 홍범도는 지시했다. “석유통의   위 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놓아라”라고. 지시는 즉각 실행됐다. 일본군 토벌대를 지휘하던 전직 한국군 고급 장교와 일진회 간부는 그렇게 생애를 마쳤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