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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교수의 역사광장37] 독립투사로 남은 ‘나는 홍장군’의 아내(1)

홈범도 귀순공작에 맞서 싸운 이씨 부인
일제의 참혹한 고문에 저항하다 비명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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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둔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야마모토 대좌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폭도’들의 귀순 공작을 강화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군사작전만으로는그들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폭도’들이 사냥꾼이었기때문이다. 개마고원의 넓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제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니던 이들이었다. 사냥꾼 출신 한국인 의병들의 전투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홍범도 폭도 무리’ 귀순 공작


사령관은 1908 430일 자로 예하 ‘제3순사대’ 대장 임재덕(林在德)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출몰하는 ‘홍범도 폭도 무리’를 유인하라는 내용이었다. “귀관은 순사대를 인솔하고 51일 북청을 출발, 갑산 부근에 이르러 적당한 지점에 위치하여 폭도 귀순 권유에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방법도 제시했다. “홍범도의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사용할 것”을 명시했다.


임재덕과 김원흥(金元興)은 일본군 103명과 한국인 순사보조원 8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갑산군 창평리 산간 마을에 주둔했다. 총기와 탄약을 넉넉히 지녔고, ‘속사포’라는 기관총 공용화기까지 갖춘 막강한 토벌대였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둔지인 용문동 더뎅이 산골짜기가 지척이었다.


3순사대장 임재덕은 일진회 간부이기도 했다. 1907 7월 일진회 간부 송병준이 고종 폐위를 주도한 것과 관련해,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일진회를 타도 대상으로 간주했다. 1907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1개월간 의병에게 처단된 일진회원은 무려 9260명을 헤아렸다. 마치 내전 양상과 같았다. 의병과 일진회는 총을 맞대고 겨누는 적대세력이었다.


또 한 사람 지휘관 김원흥은 대한제국의 고급 장교 출신이었다. 옛 한국군 참령 계급장을 달았던 고위 군사간부로서 북청진위대 대장까지 지냈다. 그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기꺼이 일본군 휘하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통감부 예하 경찰 조직에서 경시 계급을 부여받고 반일 의병운동을 탄압하는 최일선에서게 됐다.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끔찍한 짓이었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의병 지도자를 전향시키려는 술책이었다. 해방운동의 투사를 정신적·정치적으로 파멸시키려는 행위였다. 홍범도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함경남도 북청군 인필골, 깊은 산중 마을이었다. 처가 동네 였다.   늙은 장인 장모와   함께, 아내와 두 아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 마을을 급습했다. 그리하여 홍범도의 아내와 17살 맏아들 홍양순을 토벌대 주둔지로 압송해 왔다. 홍범도의 귀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질이었다. 홍범도여, 가족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와 같이 위협하는 데 쓸모 있는, 인질들이었다.


홍범도의 아내 이씨 부인은 거센 강압을 받았다. 산중에 웅거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임재덕 순사대장은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쓰라고 했다. 공작은 일본제국의 귀족 시스템 속에서 1등급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최상층 귀족이었다. 망국 이후 일본 귀족으로 편입된 조선인 고관대작 중에서 어느 누구도 공작 작위까지 오르지 못했다. 회유에다 협박도 덧붙였다. 임재덕은 시키는 대로하지 않으면 너희 모자를 어육 내겠다고 위협했다.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서


1229-2 1929년 재혼한 아내 이인복과 함께, 62살의 홍범도. 임경석 제공.jpg

929 재혼한 아내 이인복과 함께, 62살의 홍범도. 임경석 제공


이럴 때는 차라리 글을 쓸 줄 모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씨 부인이 글을깨쳤다는 사실을 저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응할까, 거절할까. 두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랴. 고초를 각오해야만 했다. 이씨 부인은 결심했다. 거절의 뜻을 단호히 표명했다. 그날 아내가 입에 담았던 말을 홍범도는 누군가에게서 전해들었던 것 같다. 평생토록 그 말을 잊지않았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이렇게 말했노라고, 노년의 홍범도는 또박또박 기억해냈다.


이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만적인 폭행이 쏟아졌다.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놓는 등,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됐다. 거듭되는 악행은 이씨 부인을 반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한 회상기에 따르면, 그때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처참했다. 그녀는 벙어리가 된 채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다. 하지만 머잖아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향년을 정확히 댈 수는 없지만, 아마 30대 후반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