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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교수의 역사광장 36] 시운이 없으면 영웅도 소용없다(2)

2 러일전쟁 대신 1세계대전 터지며
실패로 끝난 망국 이후 독립운동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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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결의 힘은 컸다. 하는 일마다 성과가 컸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일자리 소개 사업, 기관지 <권업신문> 발간, 한인 학교의 설립과 후원 등이 활발히 이뤄졌다. 규모가 큰 야심 찬 사업도 기획됐다. 연해주 내륙 ‘라블류’에 대규모 농지를 불하받아 인구 1만 명 규모의 대농장을만드는 사업을 발족했다. 러시아 지방정부는   권업회에공신력을 부여했다. 러시아 국적 취득 업무를권업회에 위탁했다. 거주 등록증도 권업회의보증이 있어야만 발급할 수 있게끔 제도를 바꾸었다. 권업회의 위신이 나날이 높아졌다. 각지에서 지회 설립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의 크고 작은 도시와 농촌 지구에서 지회를 설립하고 싶다는 청원이 잇따랐다.


그러나 권업회의 가장 큰 역할은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한광복군정부   발족의 모태이자 활동 근거지 역할을 한 것이다. 대한광복군정부란 권업회에 참가한 망명자들이 반일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단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광복군을 결성해 운용하기 위한 참모본부를 조직했던 것이다.


이 비밀단체에 가담했던 계봉우의 회고에 따르면, 단체의 발족은 신한촌에서 이뤄졌다. 러시아령·중국령 연합대표자 모임이 은밀하게 열렸고, 거기서 집행부가 선출됐다. 최고 책임자의 직위는정도령(正都領)이라고 명명됐으며, 초대 정도령에는 이상설이, 2대 정동령에는 이동휘가 선임됐다. 3대 군관구가 설정됐다. 한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연해주(1), 북간도(2), 서간도(3)가 각각의 군관구로 설정돼 각각 ‘동로, 북로, 서로’라고 불렀다. 또 군사 간부 양성 사관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그   소재지는 중국령 ‘나자구’였다. 나자구는 왕청현 소재지를 출발해 험산과 무인지경을 지나 깊은 산속 궁벽진 오지에 있었다. 당장 군대를 편성한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 시기가 되면 언제라도 대규모 무장력을 갖출 수 있는 합리적인 준비기   전략이었다.


연해주와 간도에 출현한 정도령


강대한 일본을 격퇴할 수 있는가? 김만겸 같은 원호 동포들이 회의적으로 여기던   문제였다. 대한광복군정부 참가자들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어떻게? 망명자들은   두 조건이 갖춰진다면 실현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하나는 독립전쟁 근거지의 존재였다. 간도와 연해주가 바로 그곳이었다. 100만 동포 사회가 형성됐고, 일본의 국가권력이 못 미치는 곳이었다. 양쪽을 합해 해도(海島)라고 했다. 연해주에서 ‘해’를, 간도에서 ‘도’를 땄다. 해도는 도탄에 빠진 민중의 희망이었다. 조선왕조 후기에 널리유포되던 예언서 <정감록>에 의하면, 도탄에 처한 민중을 구원하는영웅 정도령이   해도에서 나온다고 했다. 바로 ‘해도진인설’이었다. 망명자들은 <정감록>의 아우라를 활용했다. 대한광복군정부 수반을 대통령 대신 정도령으로 명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해도에서 정도령이 출현한 셈이다.


다른 한 조건은,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었다. 망명자들이 생각하기에, 일본은 줄곧 식민지 확장 정책을 펼쳤으므로 다른 열강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일본을 적대하는, 더 강력한 강대국이 나타난다고 예측했다. 예측은 1913년 들어 점차 현실화했다.


바로 러시아였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다가오자 러시아 조야에서는 배일 분위기가   고조됐다. 일본처럼 작은 아시아의 신흥 산업국에 패배하다니, 러시아인들은 치욕스럽게 생각했다. 패배의 원인을 성찰해, 좌절된 동방 확장 정책을 다시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동방 정책을 맡은 러시아 관료들은 한인 반일운동을 지원하는 쪽이었다. 연흑룡주   총독 곤다티는 권업회 활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권업회 명예회원으로 이름 올리는   것을 승낙했다. 연해주 일원의 정치 사찰과 방첩 업무를 맡은 우수리 철도 헌병대장 셰르바코프 대령도 한인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심지어 권업회 설립을 촉진하기 위해 한인 사회에서 지도적 영향력을 가진 이종호와 이상설의 합석도 주선했다.

1913년 말에는 구체적인 전쟁준비 조짐마저 감지됐다. 예를 들어 제정 러시아군대에는 해마다 111일 만기 사병을 제대시키는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해에는이듬해 11일로 연기했다. 이례적이었다. 그 기일은 또 연기됐다. 연말이   되자 다시 5 1일로 미뤄졌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러일전쟁의 재발 가능성으로   받아들였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널리 퍼졌다. ()자 들어간 해에는   어김없이 전쟁이 터졌지 않았는가. 갑오년(1894년 청일전쟁), 갑진년(1904년 러일전쟁)에 병란이 있었는데, 갑인년(1914)에도 그를 면치 못하리라는 풍문이었다.


일본에 적대할 강대국은 누군가?


갑인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이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이었다. 1914 81일 독일과 개전한 러시아는 전쟁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한데 집중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연합국 일원이 됐다.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된 것이다. 정세가 달라졌다. 러시아는 일본 요구를 받아들여, 연해주가 반일운동 기지가되는 것을 차단했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나 단체는 탄압 대상이 됐다. 권업회가 해산되고, <권업신문>도 정간됐다. 이종호와 이동휘 등 망명자 36명은 러시아 영토 추방 명령을 받았다.비밀결사 대한광복군정부의 독립전쟁 계획은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망국 이후 처음 수립된 독립운동 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어쩌랴, 시운이 따르지 않으면 영웅도 어찌할 수 없는 법이었다. 동학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이 사형을 앞두고 읊조린 말이다. 망명자들은 제2의 러일전쟁을 예상할 수는 있었지만,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고는 미처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일본에 적대하는 강대국이 누군가? 독일이었다. 망명자들은 독일을 파트너로 삼는 새로운 운동을 수립하기 시작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