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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 24     조선인종군위안부

7  조선인종군위안부



    조선인종군위안부는 일본이 저지른 인권유린의 국가적범죄의 산물이다. 위안부는일본어의특유한명사이다. 1973년 千田夏光이 《종군위안부》책을 출판한 후 《종군위안부》란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특수한 형식으로 조선인이 중국관내, 만주지방에서의 피눈물의 역사를 엮었다. 종군위안부의본질은일본군성노예이다. 종군위안부의 모집은 일본정부와 군부의 공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진행되였는데 여기에는 국가와 군부의 모든 기구들이 동원되였다.

    일찍 1920년말부터 조선주둔 일본군대에 이미 종군위안소가 있었고 중국동북에 주둔한 관동군이 9.18사변 이듬해부터 종군위안소를 갖고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위안부제도의시점은 1932년초 상해이다.

1932년 1월 28일 상해 제1차 송로사변시 일본군사령군은 白川一则대장이다. 2월 25일 송병연회에서 白川一则는 冈村宁次를 상해파견군 부참모장으로 임명할것을 군부에 요구하였으며 그해 3월 6일 冈村宁次은 부참모장 신분으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당시 상해주둔 일본군은 3만 명에 달했으며 도처에서 당지 부녀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중국과 세계 각국 여론의 준열한 질책을 받았다. 대규모의 강간과 성병의 만연을 방지하기 위하여 冈村宁次는 일본군에게 성봉사를 제공하는 장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는 白川一则 사령관의 동의를 받았으며 冈村은 고급참모 冈部直三郎께 구체적인 사업을 맡기였고 시설의 건립은 永见俊德中중좌가 책임졌다. 冈部와  永见는 함께 상세한 계획서를 작성하여 冈村宁次께 바쳤으며 冈村宁次의동의를거친실시단계에들어갔다.

그들은처음으로일본西关지역의부녀자들을모집하였다. 상해의 육군관병 다수가 일본 西关에서 왔으며 西关이 상해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였다. 长崎현 지사는 冈村宁次의 전보를 받고 매음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모집하여 상해로 보냈으며 이들 여성들은 상해파견군에 의해 오송, 보산, 묘항, 진로 등 지역에 최초의 육군위안소에 배치되였다.

해당학자에의하면상해주둔일본해군은 1934년에 이미 위안소 14개나 가지고 있었고 매주차례씩위안부들에대한성병검사가있었다고한다. (사진2-07-1 1932년 개설한 해군지정 위안소 대일샬룡, 일본교민 近藤 부부가 경영, 해군군의가 매주말에 위한부신체검사를 하였다. 대일샬룡은 전쟁이 끝날때 까지 영업하였다. 현 주소는 상해 동보흥로 125弄이다).  1937 12 남경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이미 종군위안소를 설치하였다.

사진 2-07-01   1932년 개설한 해군지정 위안소 대일샬룡, 일본교민 近藤 부부가 경영, 현 주소는 상해 동보흥로 125弄이다

    1937년 12월 말 화중방면군 松井石根 사령관은 소속부대에 대한 신체검사에서 제 18, 11, 3, 9, 11, 13사와 重藤지대, 国崎지대에 성병이 만연되고 있음을 놀랍게 발견하였으며 부대 내에 위안부제도를 건립할 것을 인식, 화중방면군 참모장 冢田攻이 획책하고 상해파견군 참모장 饭沼守이 구체적인 실시를 책임졌다. 饭沼守는 참모부 제2과 长勇 중좌께 명하여 《여랑옥》(즉 위안소)을 건립할 상세한 계획을 작성케 하였다. 이리하여 상해, 남경 등 지역 위안소건립이 일사일정에 올랐으며 지금까지 정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본군이 경영하는 제1위안소인 상해 양가택육군오락소가 1938년 1월 13일에 간판을 걸고 영업을 시작하였다. 그 위치는 군공로 양가택,. 상해파견군 11군단 병참사령부 소속으로 되였다. 후에 육군위안소라 이름을 고쳤다. 위안소에는 아래와 같은 규정제도를 세웠다.

1. 위안소는육군군인, 군속(군대역부는 제외 함)외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음, 입장자는 반드시 위안소외출증을 휴대하여 함.

2. 입장하는자는반드시접수실에서값을치르고입장권과삭구하나를거져야.

3. 입장권가격은하사관, 병사, 군속은 2원 임.

4. 입장권의효력은당일에국한. 만약 입실하지 않았을 때에는 현금과 다시 바꿀수 있음. 그러나 일단 접대부에게 넘겼을 경우에는 되물리지 못함.

5. 입장권을지닌사람은지정된번호의방에들어가야. 시간은 30분으로 함.

6. 입실과동시에입장권을접대부에게넘겨야.

7. 실내에서는음주를금함.

8. 일이끝나면즉시방에서나와야.

9. 해당규정을어기거나군기, 풍기를 문란히 하는 자는 퇴장시킴.

10. 삭구를사용하지않는자는접대부와의접촉을금지함.

11. 입장시간: 병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1938년 4월, 일본군은 전면적인 위안부제도를 추진하였다. 육군성 병무사는 화북, 화중 방면군 참모장에게 보낸 《군대위안부를 모집할데 관한 문건》에서 《(위안부)모집시 파견군에 영도, 합당한 인선을 선정, 각 방면의 관계를 잘 처리하여야 한다. 당지 헌병, 경찰과 합작하며 군대의 위신을 보존하며 각종 불량한 사회영향을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1942년 9월 3일, 육군성회의에서는 장교군관이하의 위안설치를 늘일데 관하여 아래와 같이 규정하였다. 화북 100개소, 화중 140개소, 화남 40개소, 남방 100개소, 남해 10개소, 库页岛 10개소, 총 400개소이다.

    위안소는여러가지경영형식으로운영되였다. 1.일본군이 직접 경영하는 고정적인  위안소, 일본관병들만 사용하게 되였다.  2. 일본교민이 민간형식으로 경영하는 위안소,하지만 일본군도 경영에 참여, 이런 위안소는 대부분이 일본군측의 위탁을 받고 경영되였다.  3. 일본군이 지정한, 일본군관병들만 사용하는 민간기생집형식의 위안소이다. 일본군부는 군관 또는 헌병을 파견하여 기생집의 영도를 책임진다.  4. 일본군 또는 민간에서 경영하는 유동식위안소.  일본군은   기차, 자동차, 륜선 심지아 마차를 조직하여 유동위안소를 만들며 이들을 일본군이 급수하는 전선 등 지역에 보낸다. 1933년 5월 관동군은 첫 위안열차를 조직하였으며 1935년 5월에는 두번째로 위안열차를 조직하였다. 봄, 여름, 가을을 이어가며 260일을 뛰여 1만여 명을 접대하였다. 1938년 화중방면군 제11병참사령부에서는 조선인위안부와 일본인위안부를 조직하여 상해에서 기차편으로 항주로 향발, 도중 열차는 류동위안소가 되였다.  6. 위정권 또는 중국의 업주를 부축하여 위안소를 설립하였다.

사진 2-07-02   남경서남쪽천호일본인종군위안소(1938)

   일제는 주로 군대병원 간호원, 병영청소부, 세탁원, 취사원 좋은 직업을 알선해준다고 유괴하거나 강제련행 혹은 정신대 모집형태로 수만의 조선여성들을 끌어갔다. 이들중에는 어린소녀들로부터 결혼식을 앞둔 약혼녀, 유부녀가 있었다. 조선인종군위안부모집을 담당했던 일본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전쟁기간 육군본부로부터 트럭과 군인 등을 제공받아 조선에서 노예사냥하듯 여성들을 닥친는대로 잡아 강제로 끌고갔다.

   1942년까지 여자징용은 주로 일본과 조선남부에서 진행되였지만 그후부터는 점차 조선 전지역에서 대규모적으로 감행되였다.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집거구역에서도 근로봉사대, 여자정신대 강제모집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정신대의 징용대상은 12살부터 40세까지의 미혼여자이다. 《너는 정신대다.》라는 통지가 하달되면 3일내로 무조건 출발해야 했다. 순응하지 않으면 국가총동원법 36 등에 의하여 1이하의 징역 또는 천원이하의 벌금을 안기였으며 박해가 가해졌다.

    조선 황해도 은파군 구련리에 살고 있는 윤경애(증언당시 72) 증언:

   1941년이 가던 때였다. 평양거리에 낯선 사나이들이 나타나서 인부모집을 한다고 하였다. 일본놈인 그자들은 처녀애들만 꼬였다. 《지금 황군은 아시아의 맹주로 승전고를 울리고 있다. 너희들에게는 좋은 일자리가 차례지게 되였다,》 하면서 자기들의 소개를 받게 되면 먹고 입고 돈을 많이 버는 곳에 직업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술집종살이에 지칠대로 지친 나는 그만 그놈의 속임수에 넘어갔다.

   부산에 도착하니 거기에는 전국 각지역에서 모여온 조선처녀들이 수천명이나 되였다. 나이는 모두가 20안팍이였다. 부산항은 출전준비를 갖춘 일본군대와 끌려온 조선처녀들로 들어찼다. 여기서 10여일간 머무르다가 가나꼬라는 이름을 받고 땅크며 대포 등을 싣고 일본군이 욱실거리는 군함에 올랐다. 7척의 군함에 수천명의 처녀들 모두가 올랐다. 부산항을 떠난 일본군함은 파도 사나운 대양을 지나 40일만에 싱가포르에 닻을 내렸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성노예의 처참한 운명이였다.

   조선여성들을 수백대의 짐차에 실어가면서 개보다 못한 놈들의 성노리개가 되여 릉욕을 당하였다. 한번은 처녀가 필사적으로 반항하자 놈들이 그를 다섯필의 말에 팔과 다리, 목을 매여 각을 뜯어 죽이면서 너희들도 황군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이렇게 죽을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노동신문 1992 6 24일자)

   한국에 살고있는 길갑순(68) 증언: (한국정신대자료집))  

   나는 1924 12 7, 전라북도의 지주의 딸로 태여났다. 1940 음력 12, 갑자기 5명의 군인이 나의 방에 들어와 잠간 일이 있어하며 나를 집밖으로 끌어냈다. 집에 나오자 집대문앞에 서있는 트럭에 실리였다. 도중에 번이고 여자들을 태워 트럭이 가득찼다. 트럭의 양끝에 붙은 의자에는 대여섯명의 군인이 앉아있었다. 트럭은 하루밤을 달려 커다란 건물앞에 섰다. 여자들을 건물안에 넣었다. 안에는 여자가 수백명이 있었고 군인도 다수였다.

  그중에서 30명의 여자가 불리워 배바닥에 실렸다. 배에 실릴 나는  후지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배가 육지역에 도착했다. 나가사끼라는 단어가 귀에 들려왔다. 항구근처의 2 세멘트건물로 끌려갔다. 거기서 우리 30명은 30정도의 일본여자 3명으로부터 한달간 훈련을 받았다.

   한달간의 훈련 우리는 배에 실리고 트럭에 실려 3층으로 훌륭한 건물의 3층에 끌려갔다. 각자 작은 방을 배당받았다. 도망가려고 했던 그녀는 붙잡혀 지하실에 끌려갔다. 그리고 여자 전체가 지하실에 끌려와 늘어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발가벗긴채 거꾸로 매달려 맞았다. 군인은 군도로 그녀의 유방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우리에게 던지면서 너의들도 도망치려 하면 이런 꼴이 하고 했다.

    일본군에 끌려간 조선인위안부의 숫자에 대하여 1992년이후에는 20만명좌우에 달한다는 설이 많아졌다. 어떤 학자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여자정신대에 끌려간 조선여성은 모두 25만명이고 그중에서 위안부로 여성은 18만이라고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조선인위안부들이 중국점령지역에서는 80% 이상을 차지하고 동남아지역에서는 절반이상을 차지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살고있는 이경재(75) 증인: (한국정신대자료집)

  나는 그만 임산되여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자리에 눕게 되였다. 장교놈이 이런 나를 보고 저년은 인물이 고우니 그냥 내버려서는 안되겠다 하는것이였다. 그후 나는 놈들에게 강제로 끌려갔다. 일본군의란 놈이 나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냈으며 나중에는 자궁을 들어냈다.

   조선 양강도 혜산시에 살고있는 김영실(69) 증언:

   그때 내가 보고 들은 참혹한 사실들도 많다. 도끼고라는 처녀가 조선말을하고 제놈들의 말을 듣지않는다고 하여 우리가 보는 옆에서 칼로 목을 베여 죽였다. 준꼬라는 처녀가 임신했을 때였다, 놈들은 임신한 그녀에게 그냥 달려들었을뿐만 아니라 그가 아이를 낳았을 때는 그애를 집어던지고 앓아누운 준꼬도 어디론가 실어갔다. 후에 들은데 의하면 강물에 던져졌다고 한다. 놈들의 야수같은 만행을 참지 못해 처녀애는 모포를 찢어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옆방에 있던 연자라는 처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일본놈은 그의 유방을 도려내고 때려죽였다.

조선에 살고있는 김대일(76) 증언:

   나는 1932 일본 오사까에 있는 텐노지병원에서 잡부로 일하다가 종군위안부로 강제련행되였다. 처음 끌려간 곳은 중국 장춘에 있는 일본군 동경 12사단의 위안소였다. 부대가 주둔한 근처에 있었는데 판자로 지은 단층건물이였다.

   보리밥 한덩어리와 소금에 절인 무우 한쪽이 전부인 아침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치욕스러운 봉사를 낮에 밤을 이어 계속해야 했다.  

   나는 가는 곳마다에서 위안부들에 대한 일본군의 잔인한 학살만행을 많이 목격하였다. 위안부들은 성놀이개로 실컷부려먹다가도 전염병에 걸리면 한꺼번에 여려명씩 산채로 불태워 죽이기도 하고 구뎅이에 쓸어넣고 수류탄을 마구 던지고는 묻어버리군 하였다.

   내가 일본군 6사단의 종군위안소에 옮겨진 어느날 이런 일이 있었다. 평양이 고향인 하나꼬라고 불리우던 처녀가 임신을 하였다. 어느날 다나까라는 일본군인 술을 먹고 달려들었다. 하나꼬여성이 반항하자 놈은 그녀를 사정없이 걷어차서 류산시키고말았다. 다나까놈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하나꼬의 배를 군도로 아래까지 째고 내장을 마구 들어내여 여성들에게 뿌려던지는것이였다. 그때 너무 놀란나머지 심장이 파렬되여 자리에서 죽은 여성도 있었다.

    중국 연변에 살고있는 (1997) 이옥선여인의 증언:

  나는 1927 10 10, 부산시 보서정 8번지역에서 6남매중 둘째로 태여났다. 1940 , 나를 공부시켜주겠다기에 술집에서 일했고 후엔 울산으로 팔려갔다. 울산에서 고통스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백화점에 잠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건장한 사나이가 나를 훌쩍 들어 트럭에 싣는 것이였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트럭은 떠났다. 천막 덮개를 트럭에는 우리또래의 여자애 대여섯 있었다. 일본사람 하나와 조선사람 하나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날저녁에 기차를 탔다. 기차를 우리같은 애들이 30명정도 있었다.

   몇일 탓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려서 들으니 도문이라 했다. 이틑날, 함께 여자들이 도문에서 여러 곳으로 갈라졌다. 나는 다른 명과 함께 연길로 왔다. 연길에 와서 내린 곳이 동비행장(소영자촌)이다. 비행장주위에는 철조망을 쳐놓았다. 중간에 전기철조망까지 있어 아침에 일어나 보면 개들이 전기에 붙어 죽는 일도 가끔 있었다. 동비행장엔는 우리 5명을 합하여 15 여자들이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날은 1942 7 23일이다. 나는 도미꼬라는 이름으로 등록부에 올랐다. 우리를 ㅂ행장 철조망안에 있는 일본군 병영으로 들여보냈다.우리 5명은 한방에 2, 다른 방엔 3명이 들었다. 옆방에는 일본군인들이 들어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일본군이 몰려들었다. 칸에 , 셋씩 들어있었지만 성폭행을 해댔다. 며칠이 지나서 합판으로 중간을 막아 작은 칸에 사람씩 들게 했다.

   결국 우리는 위안부로 떨어졌다. 위안소관리는 일본인이 였다. 식당은 일본군과 함께 썼으며 일본군이 먹은 뒤에 우리가 가서 밥을 타왔다.

  북방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여름에 게다 하나가 유일한 신이였다. 양말이 없어 아예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해 겨울을 비행장안에서 보내고 이듬해   연길서시장부근으로 자리를 옭겼다. 그곳은 비행장보다 위안소였다. 대문옆에 무슨 위안소란 커다란 칸판도 붙어 있었다. 2층으로 벽돌건물의 내부구조도 전문적으로 영업하도록 되여있었다.

   위안부들은 화장을 하고 군인들이 시간에 복도에 있는 걸상에 앉아 있어야 했다.  머리우 복도벽에는 나의 사진과 도미꼬라는 나무패쪽이 걸려 있다. 성병에 걸렸을 때는 나무패쪽을 뒤집어 놓는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방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우린 비행장의 군인, 하남부대군인, 북산부대 군인 곳에서 몰려드는 군인을 접대해야 했다. 하루에 적어야 7, 8명이고 일요일처럼 많을 때는 40-50 정도였다. 이런 날에는 밥도 먹고 완전히 죽은 사람이 된다.

   위안소내에서 조선말은 엄금되였다. 전문적으로 감시하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돈을 넣는 작은 통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누가 조선말 하는가 적발하였다. 적발당한 여자는 통에 벌금액을 넣어야 했다.

   일본군에는 조선인도 있었지만 위안소에는 오지 않았다. 간혹 오더라도 성관계는 하지 않고 살구, 왜지와 같은 과일을 사가지고 와서 먹으며 한담하다가 돌아가곤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군의가 와서 검사했다. 병이 없어도 한달에 한번씩 606 주사를 맞아야 했다. 군인들은 피임주머니(삿쿠) 쓰도록 규정되였다. 피임주머니는 주인이 방마다 나누어 주었다. 병사들은 그래도 모두 사용하였는데 소위이상 군관들은 사용하지 않으려고 때가 많았다.

   나는 그렇게 주의했는데도 어느 틈에 매독에 걸렸다. 부위가 가렵다가 헐기 시작했고 속이 메시꺼워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독한 606 주사를 일주일에 한번씩 강제적으로 맞아야 했다. 하루는 군의가 수은을 가지고 와서 여차여차 하라고 일러주었다. 수은을 담은 컵을 화로에 올려놓고 연기를 쏴였다. 과연 치료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임신할수 없게 되였다.

  배고픈것이 제일 고생이였다. 납작 보리쌀을 주던것이 나중에는 그것도 없고 조밥과 수수밥뿐이였다. 게다가 문제는 밥술양이였다. 일본군이 한끼 먹는 밥이 우리에게는 하루 먹는 분량이였다. 숟갈 뜨면 밑굽이 드러난다. 그나마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병졸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나와 위안소밖에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런날에는 하루종일 굶는 판이다. 나와 함께 부산에서 잡혀온 여자 하나는 끝내 위안소안에서 굶고 병들고 지쳐서 스르르 죽어버렸다.

   일일내내 고기란 구경도 못했고 기름맛도 몰랐다. 서시장부근의 위안소에서 1년간 있다가 지금의 연변병원 남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자들은 생리기에도 손님을 받아야 했다. 주인에게 말하면 누런 솜같은것을 주어 그것을 깊숙이 밀어넣고 계속 손님을 받았다. 어떤때는 솜같은것이 너무 깊이 들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꺼내기도 했다. 목욕은 집안에 있는 참대통안에서 하였는데 매일 불을 때서 물을 데워주는 일꾼이 있었다. 한번에 2,3명씩 들어갈 있었다.  

   하루는 주인이 우리들더러 행장을 꾸리라고 하였다. 행장이래야 몇벌밖에 없었다. 주인은 우리들을 데리고 길을 가로 건너 북쪽 계곡을 따라 20 들어갔다. 지금 보면 연길공원뒤산이다. 거기에는 이엉새가 절반 벗겨져 있고 문도 없는 오두막 세채가 있었다,  

   주인은 량식을 가져올테니 여기 그냥 있으라 하고는 돌아갔다. 주인은 이틑날에도 오지 않았다. 지나가던 농민 둘이 일본이 망하였다는것을 말해 주어서야 우리는 광복이 알았다. 우리들중에는 간도에서 끌려온 애들도 있었으므로 끼리끼리 무리지어 어디론가 떠나갔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나를 포함한 넷이였다. 우린 연길에서 유랑하다가 연길 동비행장에 근로봉사로 왔던 심영순이란 분을 만났다. 나에게 행운이 텄다. 심영순을 따라 연길현 팔도구로 갔다. 나이 그때 18, 심영순은 나보다 10 년상이였다. 심영순의 부모를 만나보고 모두 동의를 표시하여 우리는 결혼하였다.

   근년에 한국에 있는 동생들을 찾아 서신 왕래가 있던 초청장이 금년 1997년에 한국 나들이를 갔다왔다.(《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 강용권 )

   중국 훈춘에 살고있는 박서운여성의 증언:

   1915 11 23, 조선의 남대문인 부산에서 태여났다. 항렬로는 열번째인데 내우로 아홉이 모두 요절하였기에 열형제에서 내가 외동딸로 자랐다. 열서너살때부터는 도에언니들을 따라 다니며 미역을 걷어오는 일을 하였다.

  내가 19살이 되여 어느 농촌마을로 시집 갔다. 남편은 나보다 다섯 연상이였다. ...일년도 못되여 나는 시집에서 쫓겨나고말았다. 몇달후 여관집의 양딸로 들어갔다. 어느날, 여공모집하는 사람이 여관에 머무렀다. 그의 말은 달콤하였다.

   북간도는 복지다. 농사를 지으면 조이삭이 개꼬리만하고 감자가 사벌만큼씩 하다. 노루가 길가에서 자고 꾕이 집안으로 날아 들어온다. 공장에 일하려고 하면 방직공장, 옷공장, 과자공장, 신공장 별의별  공장이 있는데 각자가 요구하는대로 들어가 일할수 있다. 대우가 좋고 로임이 높아 간도에서는 누구나 풍족한 생활을 한다. 마누라들이 시장에 나갈 때는 개들이 돈가방을 물고 앞서 간단다. 돈이 가랑잎처럼 날려가고 있으니 돈벌려 사람은 자원하라  

   우리를 데리러 사람은 50여세되는 부부였는데 모두 조선사람이였다. 나는 22살인 1937년도에 사람장사꾼을 따라 부산아ㅔ서 도문까지 기차를 타고 왔다. 그리고 다시 도문에서 훈춘 춘화까지 자동차를 타고 왔다, 여관에서 2 묵고 간판까지 붙어있는 군위안소에 들어가게 되였다. 나는 문맹이여서 어떤  글이였는가는 모른다.

   작은 방에 한사람씩 넣을 때야 우리는 공장에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위안부로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나와 함께 여자애들 넷은 팔려온 돈을 도로 내놓고 끝내 조선으로 돌아갔다. 나와 같이 돈없는 여자들은 제자리에 눌러앉고 말았다.

  내가 있는 군위안소 남쪽으로 100m에 군위안소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도 10명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위안소를 제외하고는 허허벌판에 다른 건물이 없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간 첫날부터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제일 어린 여자는 14살이였다. 대부분이 농촌에서 팔려 문맹소녀들이였다.

   군위안소는 일본군부대와 1시간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백성은 한명도 들어올 없었고 일본군인만 들어왔다. 한사람이 한시간에 2원씩 내면 주인이 표와 삿쿠 하나씩을 주었다. 일본군이 표를 나에게 주고 내가 표를 다시 주인에게 바친다.

  목욕탕은 군위안소 근처에 없어서 일본군부대주둔지로 한시간가량 걸어야 했다. 군위안부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일본군부대병원에 가서 성병검사를 하였다. 부대에 간김에 병원에도 들고 목욕까지 하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군위안소안에서 조선말과 일본말을 마음대로 있었다. 하루 두끼씩 먹었다. 오전에는 11시경에 먹고 오후에는 4시경에 먹었다. 화장품은 주인이 사올 때도 있고 우리가 상점에 나가 때도 있었다. 주인이 사온거을 가질 때에는 값이 우리 빚으로 오르게 된다. 화장품은 주로 구리무(크림), , 향수, 머리기름, 구지삔(루즈) 등을 썼다. 아마 내가 빚을 갚은 모양인지 1942년에 군위안부에서 풀려나게 되였다.  1943년에 일본군관가족의 보모로 들어갔다. 1년이 못되여 로두구촌(춘화에서 17 떨어진 ) 있는 홀애비한테 시집을 갔다. 광복은 노두구에서 맞이했다.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 강용권)

    정쟁터에서 요행 살아남은 조선인위안부 많은 이는 일본패잔병 무리에 뒤섞여 일본으로 갔다. 그녀들은 주로 오사까, 고베시거나 나가노시의 번화한 거리에 몸을 숨기고 있거나 미군기지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싸할린에 끌려갔거나 동남아 열대지방에 떨여져 남아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는 조선여성도 적지 않다.

   1991 12, 위안부였던 한국여성이 일본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일본정부는 증거자료가 없다면서 일본국가의 관여를 완전히 거부하였다.

   1992 1 11, 일본정부 관방장관 가또는 기자회견에서 종군위안부문제에 관하여 당시 군의 관여는 부정하지 못한다 말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1 14, 일본수상 미야자와 기이찌는 일본군의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진심으로 사죄하며 반성한다고 말하였다. 29일에 그는 일본국회 참의원 본회의에서 종군위안부노릇을 강요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일본황군이 그러한 행위를 한데 대해 부인할 길이 없다. 조선여성들이 형언할수 없는 고통을 겪게 한데 대하여 정부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양심상 가책을 느낀다 말하였다. 이는 일본수상이 국회 본회의에서 전쟁시 범죄에 대하여 사죄한 례이다.

    2000 8 17, 유언인권소위는 일본정부에 위안부에 대한 법적배상을 요구하는 내용의 군위안부를 비롯한 현대판 성노예에 관한 결의안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의안은 일본정부는 2차세계대전중 운영한 군위안부 대한 국제법상의무를 리행하지 않고 있다면서 법적배상과 책임처벌을 력설한 게이 맥두걸 특별보고관의 최종보고서를 적극 지지했다.

   결의안은 이어 유엔인권판무관에게 일본정부가 맥두걸보고서내용을 이용했는지 여부를 2001 53차유엔인권소위에 보고하도록 요청, 군위안부문제는 유엔인권유치위에서 계속 중요한 의제로 다뤄지게 됐다.

    이를 이어 9 18,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군위안부로 일했던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지역의 11 여성이 일본정부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워싱톤연방법원에 제기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군위안부련소소송이 제기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멀지않은 장래 일본의 군위안부문제배상이 실현될것이벼 수십만명의 군위안부는 역사의 증거로 영원히 살아남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