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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23   관내지방     조선인항일무장대오

6  조선인항일무장대오

1  조선의용대

   7.7로구교사변과 8.13상해사변을 계기로 국공합작을 기초로 하는 중화민족의 항일국면이 나타났다. 관내의 조선인단체들은 형세에 마추어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였다.

   1937 11 12,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반일단체들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통일적인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하였다. 조선혁명당 총서기였던 김원봉(김약산) 수반으로, 김학무, 김규방, 류자영 등이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1937년말, 남경이 일본군의 위협을 받게 되자 국민정부의 수뇌기관은 중경, 무한으로 이동하였고 조선민족전선연맹도 무한으로 옮겨갔다. 12월초에 연맹은 한구에서 창립선언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 강령에서 외국 지역에 있는 민족무장부대를 연합함으로써 민족해방전쟁을 실행한다 명확히 제기하였다. 1938 7 7, 김원봉은 국민정부에 조선민족전선연맹 무장대오를 창건할데 관한 의견을 제기하였고 일본의 반파쑈전사 청산(본명은 黑田善次 ) 중국국제연구소 왕환생을 통해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장 진성에게 조선인 항일무장대오를 창건할데 관한 상세한 방안을 제기하였다. 진성은 청산방안 군사위원회위원장 장개석에게 보고했고 장개석은 1938 8 12일에 이를 비준했다. 장개석에게 보낸 진성의 보고서에는 조선인항일무장최고지도위원회 조직할 것을 제기하였다. 하여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을 주임으로 하는 지도위원회 건립되였다. 위원회는 정치부 대표 4인과 조선의용대 대표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 류자명 4명으로 구성되였다.

   1938 10 10, 조선의용대창건의식이 한구에서 열렸다. 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 부부장 주은래가 창건식에 참가하여 동방의 피압박민족과 해방투쟁이란 연설을 발표하였고 정치부 3 처장 곽말약이 자작시를 읊었다. 조선의용대는 창립선언에서 3대구호를 제기하였다. 1. 중국에 있는 모든 조선인혁명력량을 동원하여 중국의 항일전쟁에 참가한다. 2. 광범한 일본군인들이 귀순하도록 쟁취하며 동방의 여러 약소민족들을 발동하여 일본군벌을 공동히 타도한다. 3. 조선의 혁명운동을 추진하며 조선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한다.

사진 2-06-01 한구에서창립된조선의용대창립기념사진

   조선의용대는 성립초기에 대원이 140명이였으며 한개 총대로 편성되였다. 총대 대장에 김원봉, 부대장에 신악이였다. 본부에는 신악을 조장으로 기요조, 김학무를 조장으로 정치조, 이집중을 조장으로 총무조, 이두산을 주임으로 편집조, 림약산을 퇀장으로 부녀봉사퇀, 최도의를 단장으로 3.1소년단을 설치하였다.

   총대 산하에 두개 지대를 두었고 이듬해에 중경에서 3지대가 설립되였다. 1지대 지대장은 박효삼, 2지대 지대장은 리익봉, 3지대 지대장은 김세일이였다.

   조선의용대에 맨처음 참가한 100명은 절대다수가 황포군교, 조선혁명간부학교 군사, 정치학교에서 전문교육과 훈련을 받은 인재들이였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군사지휘자이자 정치일군이며 오랜 혁명자들이였다.  

    김학철선생에의해정리된조선의용대명단은다음과같다.

01 金元凤(김원봉약산)

02 金抖奉 (김두봉 호 白渊)

03 石正  (석정, 본명은 尹世胃)

04 崔昌益  (최창익 일명 李建宇)

05 韩斌  (한빈 본명 한미라일, 가명 王志延)

06 金星淑(김성숙)

07 朴孝三(박효삼)

08 李益星  (이익성, 일명 李义兴)

09 王通   (왕통, 일명 金铎)

10 金学武  (김학무, 일명 金俊吉)

이상지도부성원

11 姜振世   (강진세, 본명 洪淳官)

12 高峰起  (고봉기)

13 孙明宇  (공명우)

14 权彩玉  (권채옥  여)

15 金京云  (김경운)

16 金东学  (김동학)

17 金武    (김무)

18 金世光   (김세광 일명 金世日 )

19 金仁?  ( 김인철  본명 具在洙)

20 金鼎熙  (김정희)

21 金昌奎  (김창규  가명 王克强)

22 金昌满 (김창만)

23 金铁远   (김철원  본명 金斗声)

24 金河?   (김하철)

25 金学铁  (김학철  본명 洪性杰)

26 金炜    (김위   일명 金幼鸿)

27 金化   (김화)

28 金辉  (김휘)

29 金鑫  (김흠)

30 罗仲敏 (라중민  일명  李明)

31 鲁民    (로명  본명 张海云)

32 卢哲龙   (로철룡  가명 崔成章)

33 廖天铎  (료천택   본명 朴成律)

34 李疆   (리강  일명 李锺乾)

35 李达  (리달)

36 李大成 (리대성)

37 李东浩 (리동호)

38 李始荣 (리시영)

39 刘晚华 (류만화  본명  최진오)

40 刘文华  (류문화  본명 刘元衡)

41 李万永 (리만영)

42 李明善  (리명선  본명  崔约翰)

43 李相朝  (리상조, 일명 胡一华)

44 李成镐  ( 리성호)

45 李苏民  (리소민  일명 리경산)

46 李维民  (리유민  일명 崔莹来)

47 李贞浩 (리정호)

48 李志刚 (리지강)

49 李集中  (리집중  본명 李钟熙)

50 李铁重   (리철중  일명 程毅夫)

51 李春岩  (리춘암  일명 潘海亮)

52 马德山  (마덕산  본명 李元大)

53 马一新  (마일신)

54 马春植  (마춘식  일명 李鸿林)

55 文明哲  (문명철  본명 李逸坤)

56 文正一  (문정일  본명 李云龙)

57 文靖珍 (문정진)

58 李海鸣 (이해명)

59 李鸿斌 (리홍빈  본명 全英吉, 일명  田荣)

60 林相秀 (박상수)

61 林平 (림평)

62 徐觉 (서각)

63 徐相锡 (서상식)

64 朴茂   (박무  본명 朴英镐)

65 白正  (백정)

66 石成才  (석성재  일명 张志民)

67 申岳 (신악)

68 沈星云   (심성운  본명 沈相微)

69 安昶孙 (안창호)

70 杨民山   (양민산  일명 金民山)

71 杨大峰  (양대봉  일명 郭震)

72 余省三  (여성삼  일명 宋银山)

73 余海岩  (여해암)

74 叶鸿德  (염홍덕)

75 吴民星  (오민성)

76 王守义  (왕수의)

77 王子仁  (왕자의)

78 王现淳   (왕현순  일명 李志烈)

79 尹公钦   (윤공흠  일명 李哲)

80 尹治平   (윤치평  본명 尹瑞章)

81 张文海   (장문해  본명 李孝相)

82 张凤翔  (장봉상)

83 蒋元福   (장원복  일명 韩青)

84 张毅   ( 장의  본명 权泰杰)

85 张重光  (장중광  본명  康炳学, 일명 丸山鹤吉)

86 张重镇  (장중진)

87 张之福  (장지복)

88 张振光  (장진광)

89 张平山  (장평산)

90 全容燮  (전용섭  일명 柳新)

91 郑如海  (정여해)

92 郑炎  (정염)

93 郑仓拨 (정창파)

94 赵烈光  (조렬광 일명 马铁雄)

95 赵少卿  (조소경  일명李圣根)

96 朱东旭  (주동욱)

97 周世敏 (주세민)

98 朱然  (주연  본명 裴俊逸)

99 周云龙(주운룡  일명李克)

100 朱革   (주혁)

101 陈国华 (진국화)

102 陈敬诚  (진경성  본명 申松植)

103 陈东明  (진동명)

104 陈乐三  (진락삼)

105 陈元仲  (진원중)

106 陈一平  (진일평)

107 陈汉中  (진한중 일명 金汉中)

108 崔启源  (최계원)

109 崔铁镐  (최철호  일명 韩清道)

110 冯仲天 (풍중천  일명  李东林)

111 河振东 (하진동 본명 河奉禹)

112  (한경)

113 韩得?  (한득지 일명 李根山)

114 许金山  (허금산  일명 金演)

115 胡维伯 (호유백)

116 胡哲明 (호철명)

117 韩志成 (한지성)

118 黄起凤 (황기붕), 후날 변절

119 黄民  (황민  본명 金胜坤)

120 黄载然 (황재연,  가명 关键)

121 于自强 (우자강)

122 崔庆珠 (최경수), 후날 변절

김학철(사진2-06-3 석정선생의 생가에서 유가족과 함께 있는 김학철은 후날 중국조선족문단의 거장으로 주목되였다. 원명은 홍성걸 (洪性杰),1916년 11월 4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1935년 상해로 망명하고 심운에 포섭되여 의렬단에 가입하였으며 1936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37년 7월에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7월 졸업을 맞이하였고 소위참모로 국민당군대에 배속, 10월에는 조선의용대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으로 되였으며  1940년 8월 29일 중공당에 가입하였다.  1941년 여름, 화북팔로군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대 분대장으로 참전하였으며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文氏县) 호가장(胡家庄) 일본군과의 접전중 부상 입고 포로되었다. 1945년 수감 3년 6개월만에 왼쪽다리 절단, 1945년 10월 9일 출옥하게 되였다. 1947년 노동신문사 기자, 인민군신문 주필로 일하다가 1950년 10월 중국에 입국하여  북경중앙문학연구원(소장 정령)에서 연구원으로 있었다. 1952년 주덕해, 최채의 초청으로 연변에 정착하였으나 1957년 반동분자로 숙청당하여 24년동안 강제노동끝에  1977년 12월 만기 출옥하였다. 1989년 1월 29일 중공당직을 회복, 2001년 9월 25일 연길서 타계하였다.  김철학의 주요작품으로는 《김철학문집》 (14) (연변인민출판사), 《격정시대》(상, 하) (요녕인민출판사),  자서전《최후의 분대장》 (한국문학과 지상사), 장편소설《20세기 신화》 (한국창작과 비평사), 번역작품 《아Q정전》, 《축복》,  《태양은 상간하를 비춘다》 등이 있다

사진 2-06-02   석정선생의생가에서유가족과함께있는김학철(오른쪽 첫사람) 2001.6 한국 밀양

   10중순이 지나자 일제는 무한에 대한 대거진공을 감행하였다. 무한에 있던 , , 기관들은 중경으로 철퇴하기 시작하였고 주민들도 피난했다. 하지만 조선의용대는 포성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곽말약은 자신의 감수를 이렇게 적었다,

   내가 차가 후성거리를 지날 표어를 쓰는 사람들은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네댓씩 무리를 지어 콜타르나 뼁끼를 들고 사닥다리를 메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시간을 다그치며 일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제일 감격을 주었고 나를 제일 부꾸럽게 광경이였다는 것을 나는 승인하여야 하겠다. 그들은 모두가 조선의용대의 친구들이고 중국사람은 확실히 한사람도 없었다. 우리 중국에도 일본어을 아는 인재는 적지 않을것이다. 일본유학생만 해도 최저로 몇십만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한이 위험을 앞둔 시각에 대적표어를 쓰고있는것은 조선의 벗들뿐이였다,》

   곽말약한테서 소식을 들은 주은래는 특히 조선의용대를 찾아와 문안하면서 철거할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의용대가 철거한이튿날 일본군은 무한시내에 침입했다.

   조선의용대는 6 전구(战区) 정면싸움터에 나갔으며 13 성을 누비며 악북회전으로부터 대서남회전까지 참가하며 남정북전하였다. 그들은 전구사령부를 도와 6명의 대적사업일군을 훈련시켰고 진지선전대와 유격선전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와해사업에서 성과를 올렸다. 1지대는 국민당의 9전구에서, 2지대는 1전구, 5전구에서, 3지댄는 6전구에서 활동했다.

   1940 114, 조선의용대는 1차간부확대회의를 중경에서 열었다. 대회에서는 전선에로!》 구호를 적후에로!》 바꾸었다.

   조선의용대 3 지대는 호남, 강서 등지역에서 출발하여 갖은 간난신고를 겪으며 북상하여 1941 7월에 선후하여 팔로군총부소재지인 태항산항일근거지역에 도착하였다.

1941 7, 조선의용대는 그해 1월에 무정을 회장으로 하여 성립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지도밑에 박효삼을 지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년동안에 40차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42 5 태항산근거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5월소탕에서 진광화(陈光华, 일명 金昌华), 윤세주 (石鼎(正)尹世胄,일명 尹小龙) 많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전사들이 희생되였다.

    석정윤세주, 경남 밀양출신, 1919년 고향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巴虎门)밖의 화성여관에서 김원봉 등과 의열단을 조직, 한국내로 밀파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여 7년형을 받고 재차 투옥되었으며 1932년 남경으로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당간부학교 1기 수료,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35년 4월 낙양군관학교 졸업하였다. 1936년 8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1938년 10월 한구에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여 기관지 전고(战鼓)를 편찬, 발행하였으며 1942년 6월 태항산 마전반격전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진광화, 평남 평양출신, 평양상업학교 졸업, 남경으로 망명하여 1929년 철혈단에 참가하였으며 기관지《우리 길》간행하였다. 1933년 중산대학 문학원 교육학부에서 재학하면서조선인용진학회 (朝鲜人勇进学会)학집행위원, 1941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진기로예회장,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부회장(회장은 무정)으로 있으면서 구체적인 조직사업을 책임졌다. 1942년 태항산마전반격전에서 전사, 순국했다.

    1942 8, 팔로군총부와 태항구당위원회는 희생된 조선동지들의 철저한 혁명정신과 고상한 품성을 따라배울것을 호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같은 10 10일에 팔로군총부, 중공중앙 화북국, 팔로군 129. 태항군구, 진기로예변구정부는 연합으로 섭현에서 추도대회를 열고 팔로군부총참모장 좌권과 조선의용군지도자들인 진광화, 석정 등을 추모하였다. 주덕총사령과 염겸영총참모장이 족자에 조사가 걸려있었고 류백승, 라서경 등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좌권의 분묘량켠에 진광화와 석정의 묘지를 앉혔다.

1942 7, 화북조선청년연합회 2차대표대회가 태항산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화북지대로 고쳤다.

사진 2-06-03 석문촌의윤세주, 진광화 묘터

2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화북지대는 사령원에 무정, 정치위원에 박일우, 참모장에 박효삼 등을 임명하였고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위원장에 김두봉, 부위원장에 최창익, 한빈 등을 임명하였다. 이번 기구개혁을 통하여 해방구의 조선인은 화북조선의용군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기치하에 단합되였으며 중공당의 령도를 받는다고 선포하였다. 두개 조직은 당시 화북지구 20 조선인들의 항일중견력량으로 되였다. 이들은 항일근거지의 소탕전투에서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들의 업적은 항일근거지학교의 교과서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1942 12 1, 《화북조선청년혁명군정학교 창설되였으며 무정이 교장을, 정률성이 교육장을 담당하였다. 1943년부터 1944년간 화북조선독립동맹과  화북조선의용군은 항일근거지전설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화북지구의 조선청년들을 단결, 조직하여 항일에 참가하게 하는 사업과 적후에서 선전공세를 발동하여 적군을 와해시키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1944년초, 태항산근거지의 동맹본부와 화북지대본부는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이때부터 화북조선독립동맹  조선독립동맹으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고쳐불렀다. 이때의 독립동맹주석은 김두봉, 부주석들로는 최창익과 한빈이였으며 조선의용군 총사령은 무정, 부사령은 박효삼과 박일우였다. 무정은 여전히 태항산에 남아 인재를 양성하였고 지하일군들과 화북 각지의 조선인지구에 파견하여 조선인을 독립동맹의 주위에 묶어세우고 그들을 반일투쟁에 나서게 하였다.

   1943하반년부터 연안에 있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책임자들인 김두봉, 최창익, 한빈, 박일우, 박효삼 등은 중공당의 배려하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창설에 착수하였다. 연안해외연구반의 주덕해, 전우, 장복 등은 학교를 수건할 라가평에 가서 구체적인 준비사업에 착수하였다. 반년 남짓한 노력끝에 500여무의 황무지가 개간되였고 81섬의 알곡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17채의 움집과 19칸의 보통집을 지었으며 3만여근의 남새와 1 7000근의 목탄을 구워내고 벽돌 5만여장과 기와 4만여장도 구워냈다. 1944 12 10 교사가 드디여 일떠섰다.

   1945 2 5일오전. 조선혁명군정학교개학식이 있었다. 김두봉교장이 개막사를 올렸고 주덕총사령이 중공당을 대표하여 참석하였으며 연설을 발표하였다. 학교에는 조직교육과와 총무과를 설치하였는데 부교장인 박일우가 조직교육과 과장을 겸했고 주덕해가 총무과장직을 맡았다.

   주덕해(19111972, 본명 오기섭)는 러시아 원동연해주 우쑤리스크에서 출생, 1920년 2월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수동촌(현 용정시 광신향 승지촌)에 정착하였으며 청소년시절을 승지촌에서 보냈다. 1929년 9월에 혁명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 공청단에 가입, 1931년 5월에 중공당당원으로 되였다. 1930년부터 1936년사이에 흑룡강성 녕안, 밀산, 벌리일대에서 항일구국투쟁을 하였으며 1937년에 모스크바동방노동대학에서 학습하였다. 1939년에 연안에 돌아온 후 팔로군 359려 련지도원으로 있었다. 1945년 할빈에서 의용군 3지대 정위로 있다가 1947년에는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사업하였다.  1949년 3월, 중공연변지위 서기 연변전원공서 전원, 1952 9 3일에는  연변조선인자치주 1 주장으로 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 박해를 받아 61세기를 일기로 무한에서 별세하였다.

   1945 8, 소련홍군이 동북에 진출하였고 8 11 조선의용군이 동북에 진출할데 관한 주덕총사령의 6호명령이 하달되였다. 9, 조선의용군의 간부와 장병,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간부와 학원 300명이 선후하여 연안을 떠나 동북진출에 나섰다.

사진 2-06-04    연변조선인자치주성립대회에서연설하는주덕해주장(1952)

3  한국광복군

   김구를 위수로 하는 임시정부는 건군사업을 다그쳐 1940 9 17, 중경시 가릉호텔에서 한국광복군 창건의식을 거행하였다. 조선광복군은 일제가 투항한후의 국세에 적응기 위하여 조직된군대이다. 김구 등은 중국국민당의 진립부와 진과부를 통해 중앙정보부의 책임자인 주가화, 이사영 등과 교섭하여 광복군창건을 허락하도록 장개석에게 요청하게 하였다. 국민당은 아래의 조건부로 이를 비준하였다. 첫째, 한국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의 조직체계에 따라 조직하며 편제, 최고지휘관 기타 법제는 모두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총적으로 관리한다. 둘째, 중일전쟁이 승리한 한국광복군은 중국경내에서 전부 철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셋째, 중국경내에 외국집단의 명의로 독립군, 《혁명군 조직을 두지 못한다. 넷째,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아래 중국군대와 연합작전을 해야 한다. 중국정부에서는 광복군에 군비, 무기 등을 지원한다.

   한국광북군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은 이범석, 부관장은 황화수, 주계장은 안훈(조경한)이였다. 중국의 제도에 따라 총무, 참모, 부관, 경리, 정훈, 편련, 군의, 선전 8 처와 체에는 , 등의 제도를 두었다. 1940 11 총사령부를 섬서성 서안에 옮겼다,

   1941년에는 3 지대로 편성하였으며 임무는 1. 주로 징병과 훈련 2. 본군의 선전과 정보수집 3. 적정심사 4. 경우에 따라 유격활동을 전개하는것이다.

   1지대 지대장은 이준식(李俊植), 산서성 대동에 거점은 두고 산서성, 하남성 등지역에서 활동하기로 하였고 2지대 지대장은 공진원(公震远), 수원성 돈두에 거점을 두고 차할, 하북성일대에서 활동하기고 하였고 3지대 지대장은 김학규(金学奎), 안휘성 부양에 거점을두고 안휘성, 강소성, 산동성 지역에서 활동하기로 하였다. 1941 1월에는 서안에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에 편입되여 5지대로 되였다. 지대장은 라월환(罗月焕), 서안에 거점을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하며 신병을 모집하고 사병을 훈련시키는 한편 하남, 하북, 만주 등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광복군대오를 신속히 확대하기 위하여 1942년부터 화북징모총판사처, 《화중징모총판사처, 《화남징모총판사처 설치하였으며 그외에 1941 1 중경에3 징모분처 설치하고 강서성 상요에 김문호, 리지일, 리규학, 한돈명 등을 파견하였다.

   1942 9, 광복군사령부 내부부서를 개혁하고 지대도 개편, 정돈하였으며 부내에 부사령제도를 두어 김원봉(金元凤) 광복군 부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참모장에 김홍일(金弘一), 3처로 축소하여 총무처장에 최용덕(崔用德), 참모처장에 채형세(蔡衡世), 군수처장에 중국인 모모씨, 정훈실장 대리에 양우조(杨宇朝), 법무처장에 조시원(赵时元)이 임명되였다. 조선의용대을 1지대로 개편하고 김약산을 지대장으로, 신악을 부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광복군 1지대, 2지대, 5지대를 합하여 2지대를 구성하였는데 광복군참모장 이범석이 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3지대장엔 김학규가 유임되였다.

   한국광복군은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에 따라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한중, 한영 합동작전에 먄마로 출병했고 종전직전에는 한미OSS 공동작전에 참가한 광복군 제2지대, 제3지대가 크게 활약하였다.

  1945 8, 일제가 패망하자 조국광복의 군대로서의 한국광복군은 일본군과의 일전도 치르지 못한채 일본항복의 날을 맞이하였다. 1946년에 해외정규부대의 공식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주한미군정당국의 거부로 인해 중경, 서안일대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은 개인신분으로 서울로 돌아갔다.

사진2-06-04    귀국선을귀한조선인,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 장인 차이석의 부인이 아들 차영조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 (가운데) 차이석은 1945년 9월 9일 중경서 별세

   한국광복군 김원봉은 중요한 인물이다.

  약산 김원봉은 1898 8 13일에 한국경상남도 밀양군에서 92녀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1913, 서울중학교에 입학, 1916 10월에 중국 천진에 도착한 그는 독일인이 경영하는 덕화학당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여름방학 학당이 페쇄되자 고향에 돌아왔다.

   1918, 김두봉은 김두진, 이명건 친구들과 같이 두번째로 중국에 와서 남경 금릉대학게 입학하였다. 여기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1919 6월경, 서간도로 향했다. 11 9, 길림 파문호밖에 있는 중국인 농부 ()씨네 집에서 윤세주(석정), 이성우, 곽경, 강세우, 리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13명과 함께 독립단체인 의렬단을 결성, 김원봉이 단장으로 추대되였다. 1926 1, 의렬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등에 육속 입학, 김원봉은 최림이란 가명으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 의렬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하고 최고지도자로 추대되였다. 1927 남창에서 김원봉은 하룡이 군장을 맡은 20군에 소속되였고 남창봉기에 참가한후에는 상해로 돌아왔다.  1932 10 20,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 개교식을 가지고 교장을 맡았다.  1937 1, 민족혁명당 총서기를 맡았다. 1938 6 2 무한에 도착했으며 10 10 조선의용돼가 결성되였고 대장에 선거되였다. 그외 부녀봉사단이 있었는데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이 책임을 맡았다.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1지대로 편성됨에 따라 김원봉이 지대장을 맡았고 광복군에 부사령제가 실시되면서 김원봉은 직책을 맡았는데 중국군 소장계급이 부여되였다. 시기 민족혁명당은 의용대를 위주로 광복군버마전지공작대를 파견했는데 공로가 커서 김원봉에게는 영국여왕의 훈장이 내리였다.  1944 4 20, 민족혁명당 36차회의에서 김원봉은 국무처장 군무부장으로 선거되였다. 1945 11 5 오전,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 1958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