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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22   관내지방    중공령도하의 조선인무장대오

5 중공령도하의 조선인무장대오


   동북해방전쟁이 끝난후 164사는 장춘위수임무를, 166사는 심양위수임무를 맡았고 그외 4야전군 종대의 조선인관병은 산세관을 넘어 관내로 진군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40군에는 많은 조선인전사들이 있었다. 118사의 경위제1, 2, 119사의 경위제2, 355퇀의 경위련, 120사의 경위 2련은 조선인전사로 구성되였다. 1946 7, 40군의 사에 산포영을 편성하였는데 118사와 119사의 산포영에는 조선인전사들이 50%였다.

   119사 경위 제2련은 남진의 행군길에서 《공고한 모범련》이란 붉은기를 사부로부터 수여받았으며 집체 1등공  1차를 세웠다. 해남도해방전투에서 이 련은 적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를 무릅쓰고 끝내 바다를 건너 섬에 올랐다. 이 전투에서 한개 패의 30여 명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국 국내해방전쟁기간  이 련의 근 100명이 관병이 희생 되였다. 40군에는 많은 조선인 전투영웅과 공신들이 나타났다. 제 118사 제 354퇀 제 1영 기포련 포병반 전사인 전투영웅 김기남, 제 118사 산포영 부패장 이영철으 1등공 1차를 세웠고 그가 거느린 포병반은 대공 3차를 세웠다. 제 119사 제 359퇀 제 5련 제2패  패장 김력준이 거느리는 이 패는 요심전역에서 대공 1차를 세웠다. 그들은 동북에서 해남도에 이르는 만리행군길을 걸었으며 위주도해방전투에까지 참가하였다.

사진 2-050-01  해남도전역에 참가하러 떠나가는 40 포병영의 조선인전사들

  40군의 후방부대에서도 많은 조선인 영웅과 모범이 나타났다.  

  정화주는 120 359퇀의 1 위생원으로서 대공 4, 소공 수차 세워 갑급영웅, 모범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그가 구해낸 전상자는 무려 160명이나 된다.  1948 동북인민해방군 3종대에서는 그에게 구호영웅칭호를 수여하였다.

   전운백은 40 후근부대의 기계수리소 소장으로서  줄곧 후방에서 싸웠다. 1946 40군에는 휘발유가 아주 결핍했다. 그는 밤낮 사흘동안 악전고투하여 휘발유발동기를 목탄발동기로 고쳤으며 휘발유가 없으니 석유를 모아다가 휘발유를 정제해냈자. 해남도해방 병퇀 부사령 한선초가 나무돛배를 기계돛배로 만들 임무를 주자 그는 한달도 안되는 기간에 44척의 기계돛배를 만들어내였다. 그는김광윤과 함께 자동차발동기를 돛배에 장치하여 70척좌우의 지휘선, 통신선을 발동선으로 개작하여 도항작전에서 지휘와 통신련락을 효과적으로 담보하였다. 전운백과 김광윤은 도항작전에서 첫공을 세워 도항비호영웅이라고 불리웠다.

   많은 조선인관병들이 40군의 기층간부, 기술골간, 전투골간으로 있었다. 1951 40군내의 패장이상 조선인이 237명이였다. 1986년에는 퇀이상 조선인간부가 41명이고 사급이 10명이며 군급간부가 3명이였다. 1951년의 통계에 따르면 40군에서 중공당에 가입한 조선인이 447명이나 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4야전군 13병퇀 47군은 동북민주연군 10종대가 1949 1월에 개칭된것인데 조선인이 비교적집중된 부대이다. 그중 139, 140, 141사에 조선인이 특별이 많았다. 이들은 장강을 건너 형보전역 수십차의 전투를 거듭하면서 하남, 강서, 광동, 호남, 광서, 귀주 성을 해방하였다. 그리고 2야전군 주력과 함께 사천으로 진군하여 대용, 중경 도시를 해방하였다. 중남지구에 진출한 47군과 156사는 그후 호남성서부와 강서성의 토비숙청에서 용맹과 슬기를 떨쳤다.

    1949 141사의 조선인관병들의 통계수를 기준으로 추산에 따르면 47군의 조선인지휘원은 89, 정치일군 51, 공급부문에 38, 위생인원 87, 전투인원 913, 기타 494, 도합 1678명이다. 동북민주연군 10종대 건립초기에 조선인관병는 이때보다 훨씬 많았다. 1950 47군의 조선인관병들이 정주에 집결하였을 때는 2500명이였다.

   47군의 조선인관병중 많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였으며 조선인관병이란 미명은 인민해방군속에서 천하무적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139 416퇀의 강철8, 141 90퇀의 허국원반, 독립1 1퇀의 조선인 여위생원 조영희는 야전군총부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군이 따라배울 여영웅으로 되였다.

    조선인관병들은 소박하고 규률을 지키는 모범이기도 했다. 30사의 모범공산당원명단에는 류영섭, 박호섭 15 조선인관병들이 들어있다. 이는 30사에서 평의한 모범공산당원의 반수를 차지하였다.

    38군에도 조선인관병이 적지않았다. 산포영 1 1패는 1946 3월에 조선인으로 조직되였다. 일찍 강밀봉전투에서 비범한 포반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화북으로 진군하는 행군 공고모범패 칭호를 수여받았다. 1949 10월에는 사령부와 정치부로부터 단결전투모범패 칭호와 기발을 수여받았다.

    동북민주연군 공병 1 2 6련은 3명의 중국인을 제외하고는 138 조선열혈청년으로 묶어졌다. 천진해방전역에서 6련은 종대사령부로부터 다리부설영웅련이라는 축기를 수여받았고 2 5반은 도시규률을 지키는 이라는 축기를 수여받았다. 전투에서 련이 집체대공을 세웠고 지도원 김창룡을 비롯하여 송천화, 이영필, 김영도 18명이 대공을 세웠으며 23 전사들이 소공을 세웠다.

   해방전쟁시기 중국인민해방군 철도병부대에도 조선인전사들이 3000명이나 있었다. 1948 10월에 준공된 송화강대철교 수축에는 많은 조선인전사들이 참가하였고 심양- 길림 철도선의 청원-무순 구간을 복구하는 마당에도 조선인전사들이 뛰여들었다. 경한철도선, 북녕철도선, 롱해철도선, 월한철도선 그리고 동북의 철도선 어디에나 조선인철도병들의 발자국이 역역히 남아있다.

   1950 3중순,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독립15사의 편성의식이 하남성 정주시에서 있었다. 이는 사장으로부터 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선인으로 무어진 1 8000 무장부대였다, 사에는 4 보병퇀, 1 포병퇀과 공병영, 통신영, 반땅크영, 경위중대, 야전병원이 있었고 사급기관으로는 정치부, 참모부, 공급부가 있었다. 사장은 전우, 참모장은 지병학, 정치부주임은 양근, 공급부주임은 김윤식이다. 그리고 1퇀장은 최학훈, 2퇀퇀장은 리성원, 3퇀퇀장은 황동화, 4퇀장은 장교덕, 포병퇀퇀장은 사참모장 지병학이 겸했다. 이날 편성의식대회에는 110폭의 축기가 바람에 나붓기고있었다. 축기들은 조선인건아들이 여러차레의 전투와 전역에서 수여받은 것이였다.

   독립15사의 지휘원과 전투원 대공이상을 세운 사람만 해도 2000명이되였고 그중 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 100명이였으며 85%이상이 중공당원이였다.

   관내조선인들중에는 중공당의 많은 걸출한 지도자가 나왔다.

  이철부(李铁夫,원명 한위건,사진2-05-3) 조선공산당 조기당원이며 조선공산당중앙위원이다. 중국에 온후 중공당에 가입하였으며 중공하북성위 선전부장, 조직부장, 성위서기 천진시위서기를 담임하였다.

   이철부는 1901 조선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여났다. 3.1반일운동때 그는 주익, 강기덕 등과 함께 전국학생독립운동총지휘부를 성립하여 학생들의 집회, 시위를 령도하였다. 1919 4, 일제의 사나운 검거선풍을 패해 구소련을 경유하여 중국 상해에 도착한 신한독립신문사에서 편집으로 있었다. 1920 상해를 떠나 비밀리에 일본에 건너가서 경도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그해 10 김세연, 하필원, 박락종 등과 함께 비밀혁명단체인 공산주의연구회를 발기하였다. 그후 이철부는 일본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고 1924년에 졸업을 맞이한 조선에 돌아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1926년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그해에 조선공산당중앙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27 가을, 서울을 떠났으며 1928 2, 재차 상해에 왔고 그해에 중공당에 가입, 북평(북경), 천진 일대에 파견되여 당지하사업을 하였다. 이때부터 이철부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1931 북평반제동맹당 단서기직을 맡았으며 1932년부터 선후로 중공하북성위 선전부장, 조직부장직을 담임하였다.

   1933 5 18일에 경찰에 체포되여 북평공안국 3간수소 6 감방에 갇히였다가 남경으로 옮겨갔으며 그해 7 15, 조직의 구원으로 석방되였다.

   이철부는 사업의 수요로 국민당군 중장이며 북평경찰총감인 장벽의 여동생이며 공산당원인 장수암(공개신분은 남개중학교 교원) 결혼하였다. 그는 장수암의 조카들인 장결청(팽진의 부인), 장문송(해방후 국가교육부 부부장)등을 혁명의 길로 이끌었다.

   이철부는 왕명경모험주의노선을 반대한 이유로 반우경투쟁 주요한 대상으로 되였으며 조직관계마저 단절당했다. 1936년봄, 류소기가 천진에 와서 와요보회의정신에 따라 이철부와 장수암의 조직관계를 회복시켜주고 이철부를  중공하북성위 서기 천진시위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7 5, 이철부는 연안에서 열린 당중앙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차례나 연설을 발표하였다. 두달후인 7 10일에 병환에 있던 그는 37세를 일기로 연안 교아구요양소에서 서거하였다. 모택동주석은 이철부를 왕명모험주의노선을 반대한 화북지구의 우리 당의 수령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1945 4, 중공당의 7차대회를 앞두고 중공중앙판공청에서는 이철부의 묘지역에 대리석비석을 세웠으며 비석에는 조선공산당창시자의 한사람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위원이며 중공하북성위 서기인 이철부동지의 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양림(杨林,원명은 김훈(金勋), 별명은 양주평, 양녕, 필사제이며 중공조기당원이며 중국조선인 가장 성망이 높은 군사활동가의 사람이다. 1898, 조선평안북도의 반일지사가정에서 태여났다. 3.1반일운동시 양림의 부친은 희생되였고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19년말에 중국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를 배웠다. 1920 2, 왕청현 서대파에서 북로군정서부대에 참가한 중대장으로 있었으며 1920 10. 이름난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양림은 주력부대전이엄호를 완성한 그해말에 상해로 가서 독립신문)을 통하여 청산리전투경과를 연속 보도하였으며 북로아군실전기 남겼다.  1921 4, 상해에서 떠나 천리길을 보행하여 6월에 곤명에 도착하여 곤명강무학교( 운남강무당) 화교양주평의 신분으로 16기에 입학하였다. 그는 포병과에서 학습했다. 1923년말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학교측의 만류도 마다하고 광주로 가서 맔스주의를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1924 6, 황포군교가 개학하자 양림은 집훈처 교관으로 임명되였다가 1925 1에는 학생대 상위대장으로 있었다. 그때 그는 공산당원이 핵심을 이룬 중국청년군인연합회에 가입하였다. 1925, 군벌 진형명의 세력을 소탕하는 차례 동정(东征)에 참가하였다. 그의 안해 이추악은 황포군교정치부 동정선전총대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같은 해에 양림부부는 중공당에 가입하였다. 이추악은 중공당에 가입한 조선인여성이다 그해 11, 중공당이 국민혁명군 4 독립퇀(엽정독립퇀) 건립할 양림은 조직의 명을 받고 황포군교 중좌기술 조관직을 사퇴하고 엽정독립퇀 3 영장으로 임명되였고 그때에 양녕이라고 개칭했다. 양림은 손중산이 령도하는 광주혁명투쟁에 참가한 조선인의 주요 대표이다. 1926 3, 《중산사건 발생한 양림은 황포군교 기술주임교관을  담임하다가 8, 부인과 함께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1년간 정치이론을 배운 모스크바육군보병학교에서 1년간 군사과학을 배웠다.  1930 부인과 함께 귀국의 길에 올라 상해로 왔다.  같은 10월에 중공동만특위 위원 군사위원회 서기, 1931 겨울에는 중공만주성위 군사서기로 임명되였다. 1932년초에는 반석지대로 내려가 중공반석현위를 도와 반석로농의용군을 창건하였다. 7, 강서의 중앙쏘베트구역으로 조동되였다. 미구에 중화쏘베트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에 좇아 인민위원회 아래의 노동과 전쟁위원회 참모장을 담임이였는데 위원회의 주임은 총정치위원 주은래가 겸했다. 1933 양림은 중화쏘베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 총동원무장부 참모장을 담임하였다. 1934 1, 양림은 중화쏘베트공화국 2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회의후에는 홍군대학에 가서 사업하였다. 장정이 시작되자 양림, 무정을 비롯한 30 조선인이 위대한 행렬에 들어섰다. 준의회의 양림은 홍색간부퇀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퇀장에는진경, 정위는송임궁) 1936년 초, 섬북에 도착한 후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직을 맡았다. 2월, 중공중앙에서는 대일작전을 개시하여 화북의 위기를 만구하려고 황하를 건너 동정하기고 결정하였다. 황하강행도하전투에서 양림은 도하선두부대인 75사 223려단 제1영을 거느리고 종점진지인 하가요촌을 점령함으로써 주력부대의 도하길을 열어놓았다. 그번 전투에서 양림은 복부에 중상을 입고 3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김산(金山, 원명은 장영, 일명은 장지락, 한산) 중공당의 조기당원이며 백절불굴의 항일혁명가이다, 1905 3 10, 조선평안남도 룡천군에서 태여났다. 1919 여름, 일본제국대학에서 공부했고 그후 만주에서 조선독립군에 가입하여 신형무관학교에서 군사를 배웠다, 1920 겨울에는 상해에서 독립신문사직원으로 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북경협화의과대학에 붙었다. 북경에서 김산은 중공당원으로 되였다. 1925,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중산대학에서 경제를 연구하였다. 김산은 광주봉기에 참가했으며 해륙풍쏘베트정권을 보위하는 싸움에 반년동안 참가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산은 1929 봄에 중공북경시위 조직부장직을 맡았다.  1930 12 9 북경에서 사복경찰에게 체포되였고 갖은 악형을 당했으나 3일간의 단식까지 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승인하지 않았다. 석달 석방되였으나 당조직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그후 보정에 가서 이대소가 친히 꾸렸던 2사범학교에 가서 좌파학생들을 묶어세워 학생운동을 벌리였다. 1933 5 변절자에 의해 김산은 재차 경찰에 체포되였다가 두달후에 석방되였다.  1934 1 다시금 북경에 돌아왔으나 당조직에서는 여전히 그를 의심하였다.

  1936 5, 김산은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같은 8월에 섬감녕변부주재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로 연안에 갔다. 1937 여름, 미국의 이름난 여류작가 윌스는 연안에서 김산을 만나 그의 과거사를 듣고 그를 동방의 거인이라고 하면서 그의 전기를 쓰기로 했다. 김산이 광주봉기 한산 이란 이름을 쓴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윌스는 그의 이름을 김산 금빛나는 산이란 이름으로 고쳐 책을 썼다. 1941 윌스가 미국에서 출판한 아리랑의 노래 바로 책이다.

   연안에 도착한후 중앙군위의 요청으로 연안항일대학에서 일본경제와 화학, 물리를 가르쳤다.

    1938 김산의 역사를 심사한 섬감녕변구 보안처에서는 그를 일본간첩이란 루명을 씌우고 연안에서 비밀리에 살해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살이였다. 1983 1, 중공중앙 조직부에서는 김산의 명예를 회복하고 당적을 회복한다 선포하였다. 김산은 죽지 않는 불사조였다.

사진 2-05-02  소설아리랑영어판표지. 1941년 뉴욕에서 발간되었다.

  주문빈(周文彬,원명 김성호) 1908 9 23, 조선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에서 태여났다. 1914, 홀몸으로 중국에 왔고 그후 온가족이 중국 통주( 통현) 이주하였으며 중국국적에 가입하였다. 1926 로하중학교에서 둘째형님의 소개로 중공당에 가입했고 이듬해에 통현의 중공당지부를 세웠고 초대서기로 선거되였다. 1928년에 이름을 주문빈이라고 고치고 북경에 파견되여 당의 지하사업을 하였다. 1937 여름에는 중공당산시사업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였고 1938 3 조각장탄부들의 파업을 조직하였다. 그의 지휘밑에 2000명의 탄광노동자들이 항일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봉기노동자 700명이 기동항일연군에 참가하였다. 뒤이어 당가장광부들도 무장봉기를 일으켜 항일유격대는 3000명으로 발전하였다.

   1938 11월부터 1939 5 사이에 주문빈과 이운창은 330차의 전투를 지휘하여 2만여 일본군의 5차례 포위토벌을 분쇄하고 1500명을 소멸하였다. 1941 11 15일부터 1943 2 15일까지 사이에 23차의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 괴뢰군 3000명을 소멸하였다. 1943 주문빈은 중공기열변특별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였다.  1944 10 16, 주문빈이 거느린 한개 련의 180명과 현에서 회의하러 간부들이 풍윤현 장장자에서 5000명이나 되는 일본군에게 포위되였다. 주문빈은 적탄에 맞아 36세를 일기로 희생되였다.

   무정(武亭, 본명은 김무정, 별명은 武丁, 武静) 1905 조선 함경북도 경생군에서 태여났다. 청소년시절을 서울에서 지냈다. 1919 3.1반일운동에 참가했으며 1923년초, 중앙고보(高普) 중퇴하고 압록강다리를 건너 중국 동북에 왔다. 북경에 도착 무정은 문화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웠고 1924 보정육군군관학교에서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국민군 염석산부 포병대위로 있다가 22살에 포병중좌로 승급하였다. 1925 북경에서 중공당에 가입하였으며 그후 상해에 가서 중공상해조선인지부에서 사업하였다. 무정은 오명, 윤호, 김원식, 허렬추 등과 함께 중국본부조선청년동맹상해지부 발기하였으며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29 무정은 상해폭동을 지휘한 연고로 상해영국조지계당국에 2개월 감금당했다가 12월에 석방되여 장개석정부의 백색공포를 피하여 향항으로 갔다.  그후 당조직의 소개로 서금에 가서 홍군제3군단 포병련장을 담임하면서 팽덕회의 수하에서 사업하였다. 1930 7월말 동정호전투에서 20발을 쏘아 10척의 적군함을 명중하자 무정의 이름이 홍군에 알려졌고 홍군에 조선인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1933 겨울, 홍군대학이 4 학교로 나뉘자 무정은 특과학교 교장 포병영 영장을 담임하면서 최초의  중공포병인재를 양성하였다.

   1934 10, 무정은 홍군 3군단에서 팽덕회를 따라 장정의 길에 올랐다. 장정도중 무정은 군위 1종대 3제대의 사령원 정위를 담임하였다.

   중앙홍군에는 조선인이 몇십명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장정의 길에 올랐다. 홍군은 노획한 국민당비행기로  삐라를 뿌린 일이 있었는데 비행사가 바로 조선인이였다. (《조선의용군사령 무정장군김순기) 그러나 조선인전사들은 거의다 희생되고 섬북에 도착한 사람은 양림과 무정 두사람뿐이였다. 섬북에 도착한 무정은 홍군총부 작전과 과장으로 있었다.    

   1936 6, 무정은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 1기고급간부과에서 학습하였다. 학원 림표, 라영환, 라서경, 진광 홍군고급지회원들이 있었다. 12월말, 졸업한 무정은 홍군총부 작전과장으로 계속 류임하였다. 1937 8, 무정은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였다. 팽덕회의 주선으로 직속포병퇀의 지도원 중국인 등기(腾绮)와 결혼하여 일남일녀를 보았다. 연려는 1943 생이다. 아들 연진은 1944 생으로서 1970 결장암으로 병고했다. 평소에 무정은 라서경과 함께 숙식했다.  

   7. 7사변후 무정은 국민혁명군 18집단군(팔로군)총사령부 포병주임으로 있었고 1938 1 28일에는 군위포병퇀성립대회를 맞이하였다. 무정은 1임포병퇀장으로 되였다. 1940 백퇀대전에 참가한 무정은 1941 포병일터를 떠나 관내조선인반일력량조직사업에 착수하였다. 1941 1 10,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으로 추대되였다.

    1942년말에 조선의용군사령원으로 임명된 무정은 태항산에 가서 화북조선혁명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직을 맡았다. 1945 8 11, 조선의용군사령원 무정은 팔로군총부의 명령을 받고 동북으로 진군하였다. 무정 일부 조선독립동맹의 주요간부들은 개인신분으로 조선에 갔다.

   광복후, 무정은 조선임시인민위원회중앙위원, 조선노동당제2서기, 보안간부훈련대대포병사령관, 조선인민군제2군단장, 수도방위사령관 직무를 역임하다가  1951 7 평양에서 병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