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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21  관내지방    북벌, 광주봉기의 조선인

4  북벌, 광주봉기의 조선인


  관내조선인의 반일광복활동은 대한임시정부를 주류로 하는 민족주의자가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무대로 이어지는 반면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혁명을 중국혁명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중국혁명에 투신한 많은 조선인들의 투쟁으로 다른 측면을 이어가고 있었다.

1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국민당에 의해 세웨진 군사학교로서 처음에 교명을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 정했지만 학교터가 광동 황포장주도에 있었으므로 황포육군군관학교라고 불렀으며 황포군교라고 약칭하였다. 황포군관학교는 중국 1차국내혁명전쟁의 요람으로서 조선인을 포함한 동방 여러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인민들을 흡인하였으며 대량의 군사인재를 길러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 5월에 설립되여 6 16일에 개학식을 거행하였다. 건교초기에 학교본부 최고령도자들로는 교총리 손문, 교장 장중정, 교당대표 료중개 3명이다. 1927 11, 장발규는 북벌에 참가한 4군을 무한으로부터 광동으로 옮겨와서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점영하였다. 같은 12월에 중공당이 광주봉기를 일으킨 교무를 맡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황포군교는 중단되고 말았다. 1928 5, 중앙군사정치학교를 국민혁명군군관학교 고쳤으며 1929 9월에는 교명을 국민혁명군 황포군관학교 고쳤다. 1930 9, 황포본교 7개학생들이 졸업후 10 24 교무를 결속지었다.  

   1921 11 3, 당시 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신정은 다섯가지 종목으로 국서를 손중산에게 전달하였다. 그중 셋째조목에는 한국학생을 중화민국의 군사학교에 받아들이도록 비준할이라고 씌여있었다,

  조선청년들은 조선혁명단체의 추천 또는 지명인사들의 소개를 거쳐야 했으며 학교의 시험에 통과되여야 입학할 있었다. 《류오(留粤)한국혁명청년회, 《조선의렬단, 《한국로병(劳兵) 관내의 조선혁명단체 여운형, 조소앙, 박찬익, 이유필, 차리석, 최우강 조선지명인사들은 대량의 조선청년을 황포군교로 추천 또는 소개하였다.

    중국관내대혁명초기, 황포분교 소속부대의 조선청년은 200명에 달하였다. 황포군교 특무대대 2중대 중대장이였던 최용건은 1963 6 8, 중국혁명박물관을 참관할 그때 광주의 황포군교에는 매우 많은 혁명청년들이 왔는데 그중 조선인이 200명이나 되였다. 이제심이 배반한 당시 왕정위는 의연히 혁명하는체 하였다. 그래서 200 조선인은 모두 무한으로 옮겨갔는데 나는 여전히 화포에 남아있었다. 이후 무한에 황포군교 무한분교가 성립되였는데 150 조선인이 참가하였다.》 회억했다.

  화중 화남 북중아메리카주의 조선인개황(1940)에는 대정 12(1922), 손두환(孙斗焕,황해도) 광동 황포군교 교장판공청 부관 정치교관으로 취임하였고 양녕(杨宁,별명 杨林, 평북도 또는 황해도) 동교의 보병기술과 주임으로 취임하였으며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박태화(朴太和) 연계하여 조선, 화북, 만주 등지역에서 200 조선청년을 모집하여 동교에 들어가 학습하게 하였다.》 씌여 있다. 하지만 양녕이 맡았던 직무는 보병기술과 주임이 아니라 4기의 기술조교와 5기의 기술주임교관이다.

   황포동학록 의하면 조선인졸업생수는 3(195.7.5--1926.1.17) 5, 4(1926.3.8--1926.10.4) 24,  5(1926.11.15--1927.8.15) 6, 6(1927.10.3 --1929.2.24)10명으로 45명이였다. 1(1924.6.26--1924.11.30), 7(1924.1.14 --1930.9.26) 조선인졸업생이 없었다. 조선인교직원은 3기에 1, 4기에 3, 5기에 7, 6기에 3 도합 14명이였다. 그중 중복자 6명을 포합하였으므로 실제인수는 8명이다. 조선인교직원은 대부분이 본교졸업생인 외에 전부가 중국 기타 나라의 정규적인 군사학교 또는 대학교졸업생이다. 중국국내혁명후기, 무한분교에 집결한 조선청년은 이미 150명에 달했으며 다수가 중공당에 기울고 있었다.

   건교초기, 조선청년들이 광동에 와서 황포군교의 교직원이 되였다. 소련군사학교 졸업생 강섭무(姜燮武) 건교초기에 포술훈련교관 소련고문의 통역으로 있었다. (《광주봉기와 조선용사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상해임시정부로부터 광주로 김철남(金铁男, 김병두) 일찍 황포군교에서 상위참모, 교도 3련대 소좌 부연대장 직무를 역임했다. 손두환은 일본 메이지대학교의 법과졸업생으로서 황포군교에서 4 교장판공청 부관을 맡았고 후에는 남경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일본어교관을 맡았다. 운남강무당학교의 이계동(李启动, 李友白 ) 이검운(李剑云, 철호) 일찍 황포군교에서 각각 부관과 조교를 맡았다 (《군관학교의 진상, 조선총독부 경무국, 1934 12) 《동학록 의하면 가장 일찍 황포군교에서 임직한 조선인은 양녕이다.  황포군교 4기조선인교직원은 양녕 량도부(梁道夫) 이빈(李彬)이 있다.

   량도부는 별호가 추인(秋人)이고 별명이 양달부(杨达夫)이며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여났다. 1920년대, 이만에서 한국의용군 러시아통역관을 맡았다. 1922년여름,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를 배웠다. 졸업 러시아의 군사고문단과 함께 황포군교 훈련부로 왔으며 4 러시아포교련관을 맡았다.

   이빈은 별호는 청파(清波)이며 함경북도사람이다. 그는 원래 황포군교 3기보병대 학생이였는대 졸업수 학교에 남아 4기정치과대대의 구대장을 맡았다.

   5기조선인교직원은 양녕, 오성륜(吴成岑), 채원개(蔡元凯), 오명(吴明), 이일태(李逸), 최추해(崔秋海,崔镛键), 안응근(安应根) 7명이 있다.

  6기조선인교직원은 채원개, 박효삼(朴孝三), 공주선(孔周宣)이다.

  7기조선인교직원은 방우용(方禹镛)이다.

2  북벌전쟁에서의 조선인

   북벌전쟁이란 1926년부터 1927 사이에 국공양당합작으로 이루어진 10국민혁명군 광동성을 근거지로 오패부, 손전방, 장작림을 대표로 북양군벌을 토벌한 전쟁을 가리킨다. 1926 5, 엽정독립퇀이 선발대로 호남성을 진공하였다. 독립퇀은 1925 11, 주은래의 지도밑에 광동에서 조직되였는데 160 조선인이 양림을 영장으로 3영에서 한개 련을 구성하였다. 양림은 1926 4, 황포군교로 돌아가고 조선혁명가이며 독립퇀 포병영장인 이용과 기타 조선인전사들이 엽정을 따라 북벌의 길에 올랐다.

  7 9, 10 북벌군은 세길로 나누어 북벌을 시작하였다. 국민혁명군 2, 3, 6, 8군에 편입한 조선용사들은 거의 전부가 군관학교나 대학을 졸업한 전문인재들이다 2군의 포병련장 권준, 부관 안동만, 6 55 기관총련의 소좌교관 김준섭 등이 대표적인물이다.

   북벌에서 적지않은 조선청년이 전사하였다. 2 포병련 련장 강파는 남창공격전에서 희생되였고 6 55 기관총련의 소좌교관 김준섭은 락화전투에서 희생되였다. 남창성을 점령한 6군에서는 성대한 추도회를 열고 김준섭을 추모하였다.

   북벌이 실패한 조선청년은 남창봉기에 뛰여들었다. 엽정의 국민혁명군 11 24사에는 박인, 김철광, 방월성 조선용사들이 있었고 하룡의 20군에는 강석필, 홍범기, 김래준 수십 조선용사들이 있었다. 류자명은 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사람이 200명에 달한다고 했다.(《조선인백년사화2)

  3 광주봉기의 조선인

  중공당은 남창봉기와 추수봉기를 이어 1927 12월에 광주에서 한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청년들은 주로 4 교도퇀과 황포군교 특무영에 집중되였다. 광주경위단과 중산대학의 조선청년들도 봉기에 참가하였다. 염검영이 거느린 국민혁명군 4 교도퇀의 2 2련은 80 조선인을 위주고 구성되였다. 박영, 박근만, 박근수, 박건웅 이름난 혁명가, 포병능수들이 5련에 있었으며 김규광이 5련의 당책임을 맡고 있었다. 황포군교 특무영의 3개련 200 전사들도 봉기에 참가하기로 되였는데 2련은 최석천(용건) 련장으로 150 조선인들로 구성되였다.

   광주봉기전야에 국제공산당에서는 소련에 있던 많은 조선인군사지휘원과 군사기술인재를 광주에 파견했다. 모스크바군관학교 포병과 졸업생인 량도부(달부) 봉기군총지휘 엽정의 참모로, 중공당원이며 황포군교 교관인 김산은 엽정의 수행으로, 모스크바홍군대학졸업생 이용은 교도퇀 지휘관 엽용의 군사고문으로, 황포군교 3 졸업생 리빈은 광주봉기북부전선 지휘관으로 임명되였다. 모스크바동방공산주의노동대학 졸업생이며 중공당원이며 황포군교교원인오성륜(吴成伦), 러시아공산당원인 박영(朴英), 황포군교 4기졸업생인 박건웅(朴建雄)등은 소부대를 거느리고 몇몇 군벌두목을 생포할 특수임무를 맡았다.

    봉기날, 광주쏘베트정부창립대회가 서과원에서 열렸다. 김규광, 김산 10 조선인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김규광은 쏘베트정부 반혁명숙청위원회에서, 김산은 노동무장부에서 사업했다.  

  12일저녁, 봉기총지휘부에서 철거명령을 내렸지만 명령을 접하지 못한 박영이 거느린 조선용사 60명을 망라한 200 봉기군은 령남대학부근에서 적의 포위에 들어 연속 5일간 굶으며 혈전하였다. 박영 120 전사들이 희생되였고 조선용사 50명을 망라한 80 봉기군이 체포된 집단도살을 당하였다.

    사하를 지키던 황포군교 특무영의 조선용사 150명은 2개퇀의 진공을 피로써 막아냈다. 그들은 6-7배나 되는 적들과의 육박전에서 거의 전부가 희생되였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청년 량도부, 이용 25명은 신분이 밝혀졌다.

    량도부는 저명한 포병전문가이며 하남성에서 작전할 장발규의 포병부대를 관리하였다. 장개석이 청당 제일 먼저 동로군총지휘부로부터 쫓겨나 한구로 갔다. 광주봉기 엽정의 참모로 있으면서 탁월한 포술재능을 보였으나 그후 행방불명이였다.

   이빈 역시 포병지휘원으로서 대포한발로 일본군함《山本号》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는데 그번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희생되였다.

   오성륜은 봉기실패 해륙봉 등지를 에돌아 상해로 가서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였으며 동맹집행위원으로 선거됐다. 1929 여름 동북에 파견되여 전광(全光)이라 변명하고 남만중공조직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에 체포되였다.

   최용건은 뵹기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최용건은 1906 6 21, 조선 평안북도 영주군 하석리에서 출생하였다. 3.1운동 정주의 오산학교로부터 정학처벌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일경에 체포되여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1922 중국에 그는 처음에는 동북에 발을 붙혔으며 그해 가을에는 상해로 갔다. 남호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고 연말에는 최수길로 이름을 바꾸고 운남강무당 17 보병과에 입학, 1924 가을에 졸업을 맞이하였다. 1925,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취임했고 25 보병대대 2소대 소좌급 부대장직을 맡았으며 1926년에 중공당에 가입했다.

    1927 광주봉기에 참가했으며 황포군관학교 간첩영 2 련장으로서 사하령부근의 수구령전투에 참가했으며 봉기가 실패 중공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에 지하사업을 하였다.

   1928년봄, 탕원현 북흥촌에 이르러 선후하여 하동의 라흥소학교와 하서의 송동모범학교를 꾸리며 반일교육을 진행하였다. 1929년말 요하현에 도착했고 1932 10월에는 요하지구의 항일무장대오인 간첩대를 건립하였다. 1933 4 21, 간첩대는 요하로농의용군으로 발족되였다. 최용건이 대대장직을 맡았다. (정치부주임은 김문형) 1934 2 3, 간첩영은 요하민중반일대대로 재편성되였고 최용건은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대대장은 리학복) 1935 9 18 요하유격대는 대엽자구에서 동북인민혁명군 4군단 4려단으로 재편성되였고 최용건이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1936 3 25, 4려단은 동북항일연군 4군단 2사로 재편성,최용건이 참모장이였다. 1936 11 15, 동북항연군 7군단이 정식으로 설립되였고 최용건이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이듬해 3월에는7군단의 중공당위서기 대리군장으로 있었다. 1937년말, 7군단은1500명으로 늘어났다. 1940년후에는 동북항일연군 2로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였고 1940년말에는 2로군부대를 거느리고 소련경내로 들어가 남녀영지를 설립하였다.  1942 8 1,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를 건립하였는데 최용건은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후 최용건은 주보중과 함께 교도려의 학습과 훈련 그리고 소부대활동을 령도하였다. 1945 일제가 투항한 최용건은 조선공작단위원회 서기로 선거되여 귀국하였다. 그는 조선의 당과 국가의 탁월 지도자의 한사람이였다. 1976 9 병환으로 조선 평양에서 서거했다.

  박건웅과 이기환은 원래 의렬단이였으나 후에 박건웅은 공산주의자로, 리기환은 무정부주의자로 전향하였다.

   대혁명이후 의연히 중국혁명대오에 남아 군직에 종사한 황포군교 조선청년들로는 양녕, 차정신(车廷信), 장성철(张圣哲), 리일태(李逸泰), 손두환(孙斗焕), 채원개(蔡元凯), 양검(杨俭), 박효삼(朴孝山), 권준(??), 김종(金钟), 로일룡(卢一龙), 장흥(张兴), 박시창(朴始昌), 리춘암(李春岩), 최문용(崔文镛), 김은제(金恩济) 등이다.

   중국 엽검영원수는 광주의 중조인민혈의(血谊)정 아래와 같은 비문을 썼다.

  1927 12 11, 광주공인계급과 혁명사병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기세드높은  무장봉기를 거행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사병 조선청년 150명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전우와 함께 기치를 높이 들고 어깨곁고 싸웠다. 사하전투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대부분이 영용히 희생되였다. 그들은 위대한 무산계급국제주의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적영웅기개를 보여주었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하리라.

  중조 두나라 인민들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장청하라!

(一九二七年十二月十一日,广州工人阶级和革命士兵在中国共产党的领导下,举行了轰轰烈烈的武装起义。

   在参加起义的革命士兵中,有朝鲜青年一百五十余人。他们与中国战友高举义旗,并肩作战,最后在沙河之役,坚守阵地,大部分英勇牺牲,表现了伟大的无产阶级国际主义精神和大无畏的革命英雄气概。

  在广州起义中牺牲的朝鲜同志永垂不朽!

  中朝两国人民的战斗友谊万古长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