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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익]  조선전쟁의 나날을 회억하여 (10)

微信图片_20210729145622s02.jpg 조선 해주에서(1950.08)



10. 야전병원에서의 따스한 정


전쟁시기, 소위 야전병원이란 실은 작은 마을의 민가로 되어 있다. 마을의   민가가 임시로 병원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지휘부로 사용되는 것도 있고   의사의 거처로 사용되는 것도 있으며 병실로 쓰이기도 한다. 어떤 민가는   후근용 집으로 되었다.


나는 시중时中분원에 보내졌는데 역시 농촌 민가로 되어있는 병원이었다.   나는 그곳 백성의 집에서 의사의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20일, 나는 순천顺川에서 포위돌파전을 조직, 지휘하였으며, 오른쪽 어깨와 왼쪽 귀에 관통상을 입었다. 부상 입은 후 나는 몸에 지니고 있던 군인용 붕대로 간단히 싸매는 등 긴급처치를 하였고, 그후 20여일 후퇴 중 어떠한 정규적인 약물치료도 받지 못하였다.


시중분원에 임원하면서부터 나는 정식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시 야전병원에서 의사들은 의료상자를 메고 부상병이 들어있는 집에서 병을 보았던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의 병적 상황에 따라 처치하였으며 치료가 가능하면 즉석에서 치료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 분류하여 후방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의료설비, 기재와 의약품은 극히 결핍하였다. 예로, 구급에 쓸 주사액용 생리염수도 매우 적었고, 어떤 때는 얼어 있었다. 주사기도 부족했고 부득이   참대통으로 대체했었다. 초라하고 상식을 떠난 일들은 희기해 보이지도 않았다.


입원해 있는 기간 나는 부상병들로부터 오래동안 소식이 끊혔던 고모사촌   형 김홍석金弘锡(원 조선인민군 5사포병연대 참모장)이 전사한 소식을 알았다. 형은 고모의 독자였고, 나는 비감함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책임주치의사는 전쟁 폭발 전 평양의과대학 3학년 학생이었던 주숙희朱淑姬였다.


당시 부상병은 대개가 전쟁이 시작되면서 남진한 주력군 장병들이었고 실은 중국인민해방군 4야전군 조선족이었다. 이들 많은 이는 빈고농 출신이며 문화정도가 낮았고 나처럼 대학생 출신 부상병은 거의 없었다.


주 의사는 늘 치료를 하면서 나와 한담을 하군 하였다. 참군하여서 지금까지 그녀가 만난 부상병 중 지식인은 거의 없었고, 부상병들과 공동언어란   거의 없었다.


주 의사는 내가 자신이 만난 첫 대학생이라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늘 나와 전쟁 전 대학교 생활을 이야기하였고 우리 둘은 늘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군 했다.


그녀는 열심히 나의 병을 치료하였고, 외상이니 곧 회복되어 계속하여 학업을 완수할수 있을거라고 늘 나를 위안하였다. 그러한 말을 듣고 나는 치료에 신심이 생겼으며 마음속으로 따스한 느낌이 흐르고 있음을 지각하였다.  


어떤 때는 나더러 많이 활동하라 하면서 나와 함께 1Km 밖에 있는 분원 소재지에 가기도 하였다.


11월에 접어든 시중은 벼가을이 이미 끝났고 논물도 배수가 마무리 되었다. 실어가지 못한 벼는 논밭에 쌓여 있었다. 우리는 멀리 가지 않고서도 벼이삭 무지를 찾아 앉아서 휴식하고 한담할 수 있었다. 이럴 때면 극히 유쾌하였고 즐거웠다. 몸 상태가 부상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이지만 정신적으로 의외의 경희를 얻은 것이다. 잔혹한 전쟁년대에 가장 낭만하고 따스했던   나날이었다.


약 1주일이 지나서 부상 부위가 표면이 염증으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주   의사는 소염제가 없는 상황에서 구급차로 나를 만포진满浦镇 병원총부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하였다. 작별할 때 주 의사는 나에게 쪽지를 남겨주면서   완쾌되면 다시 시중병원에 와서 자기를 찾아라는 것이었다.


만포진 병원총부에서 몇 일 치료한 후 나는 동북 길림성 덕혜현德惠县 오과수 양촌五棵树扬村으로 전이 되었다. 그곳에는 조선인민군 제27병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입원해 있는 동안 외상 치료를 받는 외 나는 더욱 큰 시끄러움을 맞게 되었다.  


부상을 입을 당시 피를 과도하게 흘렸고,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신체 면역기능이 쇠퇴 되면서 병원치료를 받는 시기에 상한에 감염되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환각에까지 시달리면서 부득이 정신병 호실에 들게 되었다.


4개월 치료끝에 나는 건강을 회복했으며 전장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퇴원할 때 나를 치료하여 주던 한 의사는 나처럼 이렇게 심한 병을 거친 사람은 50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귀속말로 여쭈는 것이였다.


19 51년 4월,나는 동북의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다시 조선전장으로 돌아왔다.  


주 의사가 나에게 남긴 글쪽지를 나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더는 시중병원에 가서 그녀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