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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익]  조선전쟁의 나날을 회억하여(7)

微信图片_20210729145622s02.jpg 조선 해주에서(1950.08)



7. 산속의 외로운 노인


산비탈 길을 따라 약 2시간 걸어서야 우리는 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지름길을 택하였다. 실은, 지름길이란 느슨한 산길이 아니라 산정을   향해 직접 산을 타는 것이다.


산중턱까지 톱았는데 앞에 7-10미터 되는 벼랑이 나타났다. 두 손을 번갈아 가면서 등나무 덩굴을 잡고 기어올라야만 했다. 정상적인 사람도 기어오르려면 힘들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손 밖에 쓸 수 없으니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대오의 마지막에 떨어졌고,   한 손으로 덩굴을 잡고, 다른 한 손의 기능은 이빨로 대체했다.


나는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한 절반쯤 기어올랐을 때 덩굴을 깨물었던 이빨이 그만 덩굴을 물어끊었다. 나는 4미터 높이에서 굴러 떨어졌다.


산정에 오른 사람들은 각기 떠나갔고, 나는 대오에서 떨어졌고, 상처에서 또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땅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혼미상태에 들어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가 깨어날 때는 날이 이미 어둡기 시작했다.


산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냉한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길옆에 있는 바람을 막을 곳을 찾아 앉았고, 다음에 어떻게 할가 생각했다.야외에서 잠 잘수 없음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만약 잠이 들면 가능하게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생각이 굳혀지자 나는 일어나서 먼 길로 가기로 했다. 비교적 느슨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온 밤 기어서 다음날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길 옆 멀지않은 곳의 “토굴집”을 발견하였다. 즉 조선인 초가 일종이다. 내가 토굴집에 뛰어 들었는데 50여 세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들어온 나를 보고서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어제 소분대가 이곳을 지나가면서 한 명이 뒤떨어져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네가 옳아?


노인의 말에 나는 머리를 끄떡이었다. 삽시에 온몸의 힘이 풀리면서 옷의   피 흔적과 흙을 뒤집어 쓴채 땅에 거꾸러졌다. 노인은 아무런 꺼리김 없이   젖은 천으로 나의 얼굴을 닦고 몸의 면지를 털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집에   돌아온 자식에게 말하듯이 돌아왔으니 좋아, 좋구말구...


노인은 나더러 초막에서 잠자며 휴식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깨울 때는 이미 저녁을 먹는 시간이 되어서였다.


겨울철과 늦가을에는 산길이 험난하다고 노인이 말했다. 사람이 지쳐서 눕기만 하면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거 어제저녁 야외에서 혼미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하면서 빨리 일어나 밥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날 저녁 식사는 찐 감자에 무우절임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날 마신   무우절임 국물은 특별히 맛 있었다. 한 숨에 두 사발을 마셨다.


저녁을 포식 후 나는 노인과 몇 마디 한담을 한후 피곤이 몰려오면서 인츰   잠을 잤다.


날이 밝을 때까지 줄곧 잦다.


잠에서 깨어나니 머리가 무척 맑았다. 또 한번 죽음의 고비에서 돌아왔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배불리 먹고 마시고 나서, 또 한잠을 자고나니 정신이 났다.


나는 은인에게 다시한번 감사를 드렸다. 노인은 이 산에 홀로 약 30년 지냈다고하면서 사람을 만나기가 극히 쉽지 않았다고 했다. 노인은 세상을 등진 생활을 하면서 줄곧 홀로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노인은 이러한   조용한 독거생활을 하려 했다고 했다. 하지만 10월달 이래 후퇴하면서 북상하는 군인들이 끊임 없이 나타났고 몇 일을 멀다하면서 소부대 또는 한무리 군인들이 이곳 산길을 지나갔다. 나도 늘 그들에게서 전방의 소식을   듣고 거개가 전사들이 전장에서 피 흘리며 희생된 소식이었다. 전사들은   백성을 위하여 싸우고 피 흘리면서 희생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백성의 은인인 것이다. 내가 어찌 너희들의 은인이 될 수 있게나?   너희들은 모두 나의 자식들이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