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지역항일유적기답사기 2-10] 량하산 장군 기념원3월 29일 새벽에 리진룡장군 기념원을 답사하고 저녁에 식사했던 곳에서 가볍게 아침식사하고 료녕성관전현 하로하조선족촌 련강촌으로 이동하였다. 련강촌에는 하산 량기하의 순국지로 련강촌 뒤산에 모셔져 있었다. 우리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렸다. 큰길옆에서 안박사님 등 다큐팀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여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니 파아란 하늘이 구름한점 없이 맑고 공기도 깨끗하였다. 길옆에 있는 마른 나무가지에 물오른 몽오리가 꽃피기 직전이였고 조금 떨어진 련강촌 사도구 마을 앞으로는 무덤무덤 녹기 시작한 파란 혼강물이 고여 있었다. 강건너편으로는 환인현 로흑산이 높이 솟아 있었다. 파아란 하늘 아래 회색을 띤 로흑산에는 잎이 돋지 않은 나무들이 어우러져 안온한 느낌이 들어있어 짜장 농가원 유람지에 온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고 새로 닦아 놓은 경사진 길로 씩씩하게 올라갔다. 전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올라가는 길은 원래 흙길 이었는데 지난해 아스팔트길로 길을 닦았다. 우리는 맑은 공기를 들이 마시며 걸어서 량기하와 조선혁명군이 주둔하였던 유적지를 향해 올라갔다. 길옆에는 꿀을 빚는 벌통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벽돌과 담장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어 아직 공사 중인 것 같았다.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증령지曾凌志라는 남자가 우리를 반겼다. 전정혁 주임은 증령지 외할아버지가 량기하와 같이 항일을 했으며 증령지의 외할아버지가 그 당시 살았던 집터와 량기하 묘지가 가는 길 옆에 아직 남아 있다고 소개하 였다. 증령지는 현재 외할아버지가 살더 집터 아래에서 새집을 짓고 꿀을 팔고 개암을 따서 팔며 지금껏 여기서 생활하면서 집에서 약 30메터 떨어 진 산중턱에 모셔져있는 량기하 석상을 돌보고 있다고 한다. 키가 크고 검붉은 얼굴이 좀 퉁퉁했는데 인상 좋게 생겼다. 전선생님은 특별히 나를 증령지씨에게 량세봉 장군의 외손녀라고 소개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놀란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아, 량세봉 장군, 대단한 분이시죠. 저의 할아버지는 이름이 알려지지~~” “뭘요, 다들 대단합니다” 량세봉 장군이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서 얼른 다들 (량기하,증령지 할아버지를 가르킴)대단한 분들이라고 말머리를 자르고 인사를 나누었다. 전선생님이 항일영웅의 외손자들끼리 기념사진을 남기라고 하여 기념석상 옆에서 우리 둘이 특별히 사진을 찍고 서로 전화번호를 남기였다. 유적지를 답사할 때 후손을 만나면 친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고 정감이 갔다. 우리 일행이 대부분 처음 오는 유적지이고 량기하에 대해 잘 몰라 여유있게 주위를 둘러보고 사진을 남긴 후에 전선생님이 량기하에 대해 소개하는 것을 핸드폰에 록음하며 들었다. “량기하(1878.10.8.-1932.2)는 한국 충남 논산군 두마면에서 태여 났다. 호는 하산이며 이명으로는 인원, 임창주 등이 있다. 량기하는 경술 국치로 주권이 상실되자 충청남도 공주 군수직을 내던지고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무장투쟁 단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3월 15일 박장호, 조맹선, 백삼규, 전덕원 등의 의병 출신 애국지사들과 함께 대한독립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1년 4월 6일 상해림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였고 군무와 교통분과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1일 상해에서 김구, 손정도, 여운형, 김인전, 조상섭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로 한국로병회의 조직을 추진하였다. 1924년 길림시 통화현 에서 중대장 김승학, 윤세용 등과 협력하여 림시 정부 군무부 직속 군사기구인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1927년 3월에는 참의부의 교육위원장겸 제3행정구 위원장으로 선임되였다. 1931년 9.18사변 후, 량기하를 비롯한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국민부 간부들은 1931년 12월 17일 신빈현 서세명의 집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를 단일 조직체로 만들어 임전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하면서 이미 피체된 현익철의 후임으로 당 중앙집행위원장에 리호원을 선출하고 량기하를 정치부장에 선임하는 등 당.군의 조직을 정비하고 임원을 개선하여 대일 투쟁력량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밀정들로부터 이같은 회의 사실을 탐지한 통화일본령사 분관 경찰서에서 일경 50여명과 중국 보안대 100여명을 출동하여 12월 19일 신빈현 회의장을 포위 습격하였다.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리호원과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관웅, 그리고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리종건 등 주요 간부 10여 명이 체포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 회의에 참석했다 탈출한 량기하는 량세봉, 고이허 등과 조선혁명당, 조선 혁명군, 국민부의 조직 재정비에 착수하였다. 량기하는 국민부 중앙집행 위원장을 맡고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은 고이허, 조선혁명군 총사령 관은 량세봉이 맡아 당, 정, 군의 조직을 재건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전선생은 또 설명하기를 “...1932년도 량하산이 원래 사령이고 량세봉이 부사령이었다. 량하산이 왜서 여기 왔는가? 1932년도에 정월달에 30명이 여기 와서 항일투쟁을 하였는데 그때 당시 량세봉과 량기하가 의견 충돌이 있었다. 량세봉은 당취오와 련합하여 항일하겠다고 하고 량하산은 로선을 따라 하겠다고 하면서 량세봉 보고 당신네는 그렇게 하라, 나는 압록강을 건너 일본 경찰을 치겠다”그렇게 항일을 하다가 1932년 2월 관전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은 밀정을 렴탐해 량기하부대가 사도구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조선총독부 평북 초산경찰서 경찰대와 위만주군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량기하와 조선혁명군은 화력과 수적 렬세 에도 불구하고 적들과 이틀동안 격전 끝에 수십명의 조선혁명군 병사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고 하였다. 2003년 량하산장학회에서 료녕성관전현 하로하진 련강촌에 “항일명장 하산 량기하 (1878-1932)” 라는 석상을 세웠다. 비석 뒷면에는 량기하의 생애를 적어 넣었다. 한국정부는 량기하의 공훈을 기리여 1963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전정혁 선생님은 량기하 기념 석상 위치에서 600메터 더 올라가면 지금까지 증씨네가 보살펴온 량기하 묘지가 있다고 알려주다. 다음 답사 일정 때문에 더 올라가지 못하고 량기하 석상 앞에서 묵념을 드리고 아쉬운대로 신흥무관학교 유적지로 발길을 돌렸다.(글 김춘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