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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지역항일유적지답사기 2-9] 량세봉과  당취오 그리고 천후궁


2015년 여름, 심양사범대학 소수민족연구기지에서 연구과제로 환인현 등을 답사하면서 환인현만족자치현정부 부근의 천후궁天后宫을 다녀간적이 있었다. 그때 료녕, 길림 등 항일유적지 연구 전문가인 전정혁 선생이 우리 일행을 안내하였다. 전선생이 량세봉 장군과 당취오가 혈주를 마시면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천후궁을 둘러보자고 제의하여 천후궁 유적지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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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의하면 천후궁 유적지는 1932년 3월 21일, 환인현에서 동북군 수뇌인 장학량의 지지하에 당취오, 왕육문, 곽정산 등 30여명이 환인현에서   “료녕구국위원회 군사위원회”와 “료녕민중항일자위군 총사령부”를   설립하였다. 당취오는 군사위원회 위원장 겸 자위군 총사령관으로, 리춘윤은 군사위원회 위원 겸 제6로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여 흥경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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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취오가 동변도 각현의 련석회의를 소집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량세봉은 당취오를 만나려고 하였다. 리춘윤과 통화의 동북군 제대군관 손수암이 련계를 지어주어 환인현 당취오 자택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량세봉은 부관 김소묵과 한검추를 데리고 환인현으로 갔다. 당취오는   자택에서 (지금은 천후궁) 량세봉 일행을 정중하게 맞이 하였다. 한검추는 손수암이 써보낸 편지와 사전에 준비해두었던 권총 한자루, 범가죽 한장을 당취오에게 선물로 드렸다. 범가죽은 량세봉이 중대장직에 있을 때 전우들과 같이 로강산에서 잡은 범의 가죽이었다. 한검추가 당취오에게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량세봉을 소개해주었다. 당취 오는 보통 키에 살결이 희고 눈매가 맑고 지성미가 풍겼다. 그는 손수암의 편지를 보고나서 량사령이 파견해온 김학규를 만나본적이 있었고 조선 혁명군의 항일활동 상황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기꺼이 권총을 선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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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취오는 료녕민중자위군을 건립할데 대하여 연구한적이 있다고 하였다.   망국노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항일을 해야한다고 하면서 료녕 민중자위군의 상황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그말을 듣고 량세봉 이“당사령관님, 저희 군대도 료녕민중자위군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자 당취오는   기뻐하면서 환영을 표시하였다. 당취오는 량세봉부대의 인원수, 편제, 배치지역 등을 상세히 문의하고 나서 량세봉을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당취오가 음식을 한상 마련하여 량세봉일행을 초대했으며 당취오와 량세봉은   혈주를 마시면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바로 그붉은 벽돌집에서 연회를 베풀어 당취오의 극진한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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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9일 량세봉은 김학규를 대표로 파견하여 당취오와 협상을 거쳐 “중조 두민족련합항일투쟁협의”를 체결하였는데 리연복(한국)이 쓴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의 항일투쟁”(료동항전연구, 료녕민족출판사 2006년, P65)에 쓴 내용을 보면


1. 동변도(압록강 이북과 남만주남부, 즉 당취오의 활동지역)일대에서 조선혁명군의 활동을 승인한다.

2.당취오부대 사령부의 지시에 의하여 당취오부대 관할지역내의 각급 공서와 민중은 조선혁명군의 모든 활동을 적극적으로 원조해 준다.

3. 조선혁명군의 군량과 장비 는중국당국에서 공급한다.

4. 일본군대와 작전할때 중조쌍방의 군대는 서로 원조하여 작전임무를 완수한다.

5.조선혁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국토에서 일제와 싸울경우 중국군대는 전력을 다하여 조선인의 독립전쟁을 원조한다.



이리하여 조선혁명군은 동변도각지역의 항일무장력량과 실질적인 련계를 갖게 되었으며 련합항일의 새로운 국면이 조성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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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후궁은 호방한 당취오와 량세봉이 혈주를 마시며 의형제를 맺으며 큰일을 도모했던 력사적의의가 깊었던 곳인데 문혁 때 훼손되였다. 1989년, 정부에서 새로 수건하여 지금은 천후궁天后宫이 고대건축단지로써 유가, 석가, 도가 문화를 일체로 하는 집하운문화集河运文化, 항련 문화抗联文化,   건축문화建筑文化가 융합된 백성을 보호하는 백년의 력사를 가진 사찰로   쓰고 있다.(글   김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