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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지역항일유적지답사기 2-8] 료녕민중자위군선서대회유적지


량세봉 장군의 생가 신빈현 홍묘자향 금구자터를 보고 환인현으로 차를 돌려 료녕민중자위군선서대회회지辽宁民众自卫军誓师大会会址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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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녕민중자위군선서대회 유적지는 환인만족자치현정부에서 200581일에 세운 것이다.9.18사변 후 중국 외교대사는 일본이 심양을 점령한 진실에 대해 국제련맹이 공정한 립장에서 세계 각국의 명의로 일본의 침략 만행을 제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11210일, 국제련맹리사회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딸리아, 미국 등 5개 나라 대표로 조사단을 조직하였는데 단장은 인도 총독인 영국인 리튼이었으므로리튼조사단이라고 불렀다. 4월 하순, 리튼조사단은 북경을 거쳐 심양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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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취오唐聚五는 이 기회를 리용하여 중국의 항일력량을 보여줌으로써 국제여론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25일 환인현성사범학교 교정에서 만민궐기대회를 열었다.대회장에는 소나무로 아치형천막을 치고 강단을 만들었으며동북 민중항일자위군결의대라고 쓴 프랑카드도 걸어놓았다. 대회에는 각 현의 현장, 법인대표, 학생대표, 주둔군 대표들이 참석하였는데 량하산, 량세봉이 파견한 조선혁명당중앙위원회 김학규를 비롯한대표단성원들과 자위군 제1로군 특무대박대호대장이 인솔하는 100여명의 대원들도 참석 하였다. 대회에서 당취오를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였다. 그는 격양에 넘치는 연설을 하고나서 군도를 뺴들고 오른손 중지를 베여적을 섬멸하고 반역자를 처단하여목숨걸고 나라를 구하자!라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탕취오의   선서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대회장은 항일투쟁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대회에서 김학규가 조선혁명당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축사를 하였다. 그뒤에 박경평등이 연단에 뛰여올라가 흥분된 어조로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인들을 학살한 일본제국주의의 세력의 침략상과 만행을 성토 하고나서망국노가 되지 않으려면 중.조민중은 한결같이 단결하여 항일 투쟁에 나서 빼앗긴강산을 다시 찾고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웨쳤다. 대표들의 연설에 대거 모여든 군중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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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후, 김학규와 조선 혁명당 대표단성원들은 군중들과 함께 환인현성을 한바퀴 돌며 성세호대한 시위행진을 하였다. 당취오는 황마를 타고 시위행진 대렬에 앞장을 섰고 박대호도 백마를 타고 뒤를 따랐다. 조선혁명군장병들은 항일정서에 감동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무,조문기 항일명장량세봉”, 민족출판사 P160 참고)

전정혁 선생에 따르면 환인에서 이 소식을 접한 조선혁명군 사령 량세봉과 부사령 박대호는 당취오와 련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참모장 김학규, 통역 김광오, 문석주, 리해운을 429일에 료녕민중자위 군에 보냈다.

조선혁명군측과 회담을 한뒤 당취오는 조선혁명군과련합할 것을 쾌히 승낙하고 즉시 중국어와 한국어로 량군의 항일련합작전에 관한 포고문을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중 두 민족은차츰 단합되였으며 중국민중 자위군은 더이상 한인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않았고 중국인들 역시 항일 련합군으로 물심량면으로 지원하였다고 하면서 1932년은 참으로 조선 혁명군들의 무장투쟁력사에서 분수령을 이룬 희망의한해였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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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선서대회지 앞에서 전생님의 안내 말씀을듣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나는 비문을 다 읽고 급히 길을 건느려고하는데 조선혁명군 부사령박대호 손자 박홍민씨가 내팔을 당기며 고목나무 옆에서 소원을 빌라는것이였다. 목나무한테 소원을 빌면원하는봐가 이루어진다고 한다.나는 두손을 모아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올해는 답사나온 항일투사후손들이 원하는바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귀전에는 항일 투사들의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글 김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