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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지역항일유적지답사기2-7] 량세봉 생가 금구자

료녕성 신빈은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되었 을 때 서슴없이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던 독립군의 고향이기도   하다. 심양에서 신빈 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겨 3시간이면 신빈에 도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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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량세봉 외할아버지 얼굴을 본적이없다. 그러나 어린시절부터 큰외조부는 내게 태산 같은 존재로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17년 겨울 량세봉가족들은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을 떠나 매서운 바람을 맞받으며 중국을 향해 떠났다.


량세봉은 가족의 주요한 재산인 자신이 읽던 책, 놋그릇과 반자루 가량의   식량을 지게에 걸머지고 량세봉의 셋째동생 량시봉은 운도를 업고 둘째 동생 원봉이는 운항이를 업었다. 어머니와 숙모는 이불과 옷을 머리에 이였고 재순(량세봉의 부인)이는 생활용품과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가야금을 메였다. 그들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수풍을 거쳐 관전현, 환인현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한달가량   걸어 흥경현 영릉 경내에 도착했다. 먼길을 오는 동안 그들은 값이 제일   싼 려인숙에 묵거나 중국인 농가에서 묶었으며 어떤날은 남의 집 뜰안에서 밤을 지새운적도 있었다. 영릉 부근의 와자구에 도착하자 량세봉의 어머니는 더 이상 걸을수가 없었다. 숙모 문씨와 재순이, 두 동생은 발에 물집이 생겼고 날씨도 점점 추워져 모두들 추위에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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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짐을 풀고 정착한 곳이 신빈현 영릉 로성이라고 한다. 로성에서 지은   첫 농사는 좋은 수확을 거두었다. 그런데 지주는 피난온 조선인 가족의 수확이 많아지자 량세봉 이더러 이듬해에는 소작료를 늘여달라고 하였다. 량세봉은 타국인데다가 조선인이라고는 한집밖에 없었으므로 업신여긴다고   생각했다. 또 어머니와 동생들, 숙모 문씨는 중국말을 몰라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여서 흥경현 동부에 있는 조선인 집거지역인 홍묘자 사도구로 이사갔다. 량세봉 가족이 홍묘자로 이주할 당시 그곳에는 몇십 호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 북풍을 휘몰 아치는 신빈일대로 향했던 것이다. 량세봉이네는 홍묘자 사도구에 이사온 후 조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림시로 자그마한 집을 한채 짓고 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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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세봉의 부인 윤재순 할머니가 생전에 친손자 량철수가 다니는 학교에 가서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윤재순할머니는 량세봉 장군을 우리 사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 사령은 원래 농사군이였다우, 시체말루 그분은 실농군이였다우. 농사일에 막힘이 없었지. 산에 가서 나무를 지고오면 반달구지가 실히 될만큼 하였지. 우리 사령이 그냥 농사군노릇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내사 우리 사령이 말타고 칼을 휘두르고 총쏴서 왜놈들을 거꾸로뜨리는거야   어떻게 제눈으로 볼수 있었겠나. 그런건 그저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어둔 소리구. 그러니 난 지금도 눈감고 우리 사령 생각을 할 때면 소를 몰아 밭을 갈구 씨뿌리구 김매구 물곬을 째서 논풀이를 하던 모양이 선하구나. 벼단을 지고오는걸 봐도 큰 낟가리가 옮겨오는 것 같았지. 싸움하다가 한해치고 사나흘 틈을 타서 집에 들리기도 했지. 그러면 내가 제발 쉬다가 가라고 달리며 막아나서도 기어이 낫들고 호미들고 밭이랑에 나서군 했어. 땀으로 군복을 함뿍 적셔야 직성이 풀리군 했지. 그러니 그 시절 사람들이 우리 사령더러 그 무슨 장수요, 사령님이요 했지만 이 할미 눈에야 그 어른이 무슨 장수겠니. 여불없이 그저 실농군이였지. 그래서 난 이따금 생각했지. 우리 사령이 큰 장수가 된 것은 땅속에 혼을 묻고 땅기운을 평생토록 안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어마어마하게 생각되어온 조선독립군의 총사령 량세봉 할아버지가 신화속의 거인이 아니라 땅에 아낌없이 땀을 뿌리며 묵묵히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그지없이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가는듯 싶었다. 땅속에 혼을 묻고 이 땅의 기운을 평생토록 안고 살아온 인간.


- 그것이 바로 량세봉을 남만의 항일전쟁터에 우뚝 솟아오르게 한 비결이었다고 하는 윤재순할머니의 소박하면서 의미심장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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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란 무엇인가. 또 땅속에 혼을 묻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땅의 기운을 평생 안고 살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때문에 평범하던 실농군이 큰 장수로 되였다 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금구자 마을은 일찍부터 조선이주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고장이였다. 청나라 말, 민국 초기, 조선 항일의병장 류린석이 여기에서 반일활동을 하였고 농민들의 자치단체인 “농 무계”의 건립을 창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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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세봉 가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목적 의식적으로 자리를 잡은 금구자마을, 독립 운동가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근거지였으며 독립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금구자, 지금은 낮으막한 산아래 옹기종기 기와집이 보이는데 아득히 먼 옛날 마을의 모습은 어땠을가?...


항일유적지답사 일정이 빠듯하여 금구자에서 단체 기념사진만 남기고 마음으로 훑어보고 다음 유적지로 차를 돌렸다. (글 춘련)